해병대 자료

해병대 전적비-도솔산지구 전적비

충실한 해병 2022. 11. 29. 14:37

● 위치 : 양구군 동면 팔랑 1리
● 건립일자 : 1982. 9. 28.
● 시설제원 : 경역면적 30평, 기단높이 1.3m, 비높이 3.4m
● 관리기관 : 해군본부
● 참고문헌 : 전적기념물편람집(국방군사연구소)
상 세 설 명
 
ㅇ개요

위치 : 양구군 동면 팔랑 1리
건립일자 : 1982. 9. 28.
시설제원 : 경역면적 30평, 기단높이 1.3m, 비높이 3.4m
관리기관 : 해군본부


ㅇ건립취지 및 유래


    도솔산은 태백산맥 중 가장 험준한 산악지역인 천연요새로 북한군 지상부대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제5군단 예하 12, 32의 정예 2개 사단병력이 어떠한 공격에도 절대 함락당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며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병력을 배치해 오던 고지였다. 그러나 1951년 6월 14일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와 임무교대한 해병 제1연대가 17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전 끝에 1951년 6월 20일 00:00를 기하여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 새벽 05:30 적을 완전히 섬멸하고 빛나는 승전의 개가를 올렸다. 이 전투를 산악전 사상 유례없는 청사에 길이 빛나는 해병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산화한 전몰호국해병용사의 넋을 추모하고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1982년 9월 28일 해군본부 해병참모부에 의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도솔산(해발 1,147.9m)전투는 17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대공방전 끝에 적의 요새지 도솔산 탈환에 성공한 전투로써 이 전투는 최초 미 해병 제1사단이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국군해병 제1연대가 이 작전을 인수하여 도솔산을 점령한 공격전투이다.


ㅇ비문내용


적이 난공불락을 호언장담하던 이 도솔산지구는 1951년 6월 4일 미해병 제1사단 제 5연대와 임무교대한 해병 제 1연대가 개시하여 17일간의 혈전 끝에 완전 탈환함으로써 그 용맹을 만천하에 떨쳤다.
당시 이 지역을 점령 방어하던 적은 북한군 제 5군단 예하 제 12및 32사단의 정예부대였다. 이 작전에 계획된 24개 목표를 공격함에 있어 아군은 초전벽두부터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게 됨에 따라 주간공격을 야간공격으로 전환하여 결사적인 돌격전을 감행한 끝에 6월 20일 드디어 빛나는 개가를 올리게 되어 교착상태에 빠졌던 우군 전선에 활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우리 해병은 이 작전에서 3,263명의 적을 사살한 반면 아군 또한 700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으니 해병대 전통의 찬란한 금자탑을 이루는 이 전투야말로 산악전 사상 유례없는 피의 대공방전으로서 청사에 길이 빛날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ㅇ참고사항


    도솔산 일대는 태백산맥 중 가장 험한 산악지대로서 1,000m이상 고지가 중첩되어 있을 뿐아니라 연중 이상기후가 계속되고 있는 지대이다. 특히 하절기에는 안개로 수m 전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곳이므로 전투를 전개하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1951년 5월 춘계공세에서 실패한 북한군 제12사단은 동부전선의 전략·전술적 요충지인 펀치볼을 확보할 목적으로 대암산~도솔산~대우산으로 연결되는 산악지대에 지뢰를 매설하고 기암괴석을 이용하여 중화기를 배치하는 등 난공불락의 요새 진지를 구축하였다.
    6월 3일 미 해병 1사단 제5연대는 강력한 항공 및 포병화력의 엄호 하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막대한 인명피해만 입고 공격이 저지되었다. 이에 미 해병 1사단장은 6월 4일에 국군 제1해병연대를 이 지역에 투입하였다.
    국군 해병대 제1연대장 김대식 대령 지휘아래 도솔산(1,148m) 지구 공격을 강행했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반격과 지형적으로 극히 불리한 아군은 유엔군의 포격지원과 공군지원을 받아 가면서 일진일퇴 공방전을 전개했다.
    북한군은 이같은 자연적인 장애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견고한 진지를 구축했다. 해병대 정면에 배치한 북한군은 최강을 자랑하는 제5군단 예하 제12사단과 제32사단으로서 대우산을 공격목표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장비와 지원포는 우세했지만 병력은 북한군군은 2개 사단인데 비해 남한군은 1개 연대란 열세에 있었다. 남한군은 적소에 부대를 배치하고 대소간의 전투를 전개하면서6월 19일을 기해 도솔산 공격을 개시했다.
    영시부터 돌격작전을 감행했는데 남한군공격 부대는 야음을 틈타 적진 근처까지 진격해 있다가 5시 30분에 이르러 일제히 적진에 돌격하고 육박전까지 전개했다.
남한군의 최후 근거지로 알려진 도솔산고지 전투는 악전고투 육박전과 혈투였다. 국군 해병대 제3대대 장병들의 주도 면밀한 작전계획과 용감무쌍한 애국애정의 발로로 적의 주요전술인 야간공격으로 완전히 점령하고 말았다.
해병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3대대가 도솔산을 쉽게 점령할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의외로 공격이 부진하여 야간공격을 명령하였다.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3대대장은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하여 야간공격을 토의하였다. 11중대장 육동욱 중위는 야간공격을 반대하였고 반면 작전보좌관 노원근 소위는 우리가 공격하고 적은 후퇴하는 상황이지만 적이 바위틈에 은신하여 저격사격을 해오기 때문에 부상자만 증가할 뿐 진출이 불가능하고, 그리고 여기서는 지원화력도 효과가 없다.
    북한군은 우리보다 이 지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야간공격을 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할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용하여 야간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처럼 야간공격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견이 비슷하였지만 대대장은 야간공격을 결심하였다. 10중대가 선봉에 서서 도솔산 정상까지 올라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때 북한군은 도솔산 정상 부근이 암산으로 되어 있어 남한군의 항 공 및 포병사격에는 방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도솔산 정상은 주간에도 올라오기 힘든 지형이기 때문에 야간공격을 못할 줄 알고 고지 후사면에 있었다. 선발대에 이어 본대도 도솔산 정상으로 진출하였는데 동이 틀 무렵 대원중 일부가 도솔산 점령에 감격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에 놀란 북한군이 고지 하단에서 사격하면서 기어 올라오기 시작하였지만 상황이 불리한 듯 대우산 쪽으로 철수하였다. 북한군은 장기간의 악전고투와 막대한 사상자의 속출, 보급의 부족으로 극도의 전의를 잃고 있었다. 남한군 해병대의 집요한 공격으로 퇴각하기 시작한 적은 주력을 분산하여 패주하면서도 패전참상을 은폐하기 위해 부상병은 물론 수많은 전사자 시체까지 끌고 가고 생포자도 많았다.
    남한군은 123인이 전사하고 484인의 전상자가 있었다. 도솔산 고지를 점령한 남한군은 도솔산 인근에 있는 24개 목표를 완전 점령, 차기 작전에 방비하기 위해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피의 공방전을 벌인 이 전투는 한국전쟁 중 해병대 전통의 금자탑을 이루는 5대 작전 중의 한 전투이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 이라는 휘호를 하사받은 전투이다.

    ―Kansas선내 공격 작전 (6.4~6.12)
676고지에서 최초의 공격 임무를 맡은 제1중대장 이서근 중위가 보낸 1개 분대의 정찰대는 1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으로부터 돌연한 공격을 받고 곤경에 처하게 되었으나 중대의 지원 공격으로 정찰대를 구출하고 중간 고지를 점령하였다. 제2대대는 912고지 부근에 진출하여 제한된 시계와 유리한 지형에서 북한군 진지로 근접하여 목표 지역을 점령하였고 제3대대는 1개 소대를 뽑아 854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연대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는 한편 연대 우익을 엄호하였으나, 일몰과 지형의 불리함으로 연일 공격과 철수를 반복하였다. 7일 제2중대는 북한군이 해병대의 철퇴로 대부분 사살당하고 60여명의 잔존 병력이 증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포로의 말에 따라 기습을 시도하였으나 불리한 지형과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일단 방어를 하였고, 제5중대는 좌우로 단애를 이룬 지형에서 적의 저항을 받고 교전 끝에 탈취하였다. 8일 제3대대장 김윤근 소령은 그간의 전훈과 북한군 능력을 분석한 결과 지형의 불리에도 불구하고 대대 전력으로 공격할 것을 결심하고 제11중대는 정면으로, 제9중대는 우회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2소대장 김문성 소위의 전사와 함께 돌격을 감행함으로써 만 4일간에 걸친 분전 끝에 목표 지점을 점령하였다. 사단장으로부터 방어에 실패한 북한군 연대장이 문책을 당하자 전세를 만회하고자 북한군의 역습 부대가 중대 분초선을 넘어 기관총 및 로케트포 진지마저 파괴하면서 광란하였으나 제9, 제11의 양개 중대가 협조된 반격을 가하여 북한군을 모조리 격퇴하였다.
    10일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 및 참모들의 연석 회의에서 주간 공격만으로는 북한군의 대처와 지형의 불리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야간공격을 단행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공격을 시도한지 6일 만에 야간 일전으로 탈취하였으며 제2중대는 궤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여 공격하자 전의를 상실한 적이 퇴산함으로써 무혈로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제2대대, 제3대대 역시 야간 공격을 전개하여 백병전을 전개한 끝에 06:00에 북한군은 궤멸하였다. 12일 야간 공격의 성공으로 전선의 교착 상태를 타개한 연대는 계속 여세를 몰아 Kansas선내의 잔여 목표 점령에 박차를 가하였다. 석태진 소위가 인솔하는 소대는 수색을 실시하면서 전진하다가 이동중인 적 1개 분대와 교전 끝에 이들 전원을 물리치는 것으로 6월 4일 도솔산 지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이래 만 9일간에 걸친 격전 끝에 Kansas선내의 15개 목표 고지를 모두 점령하였다.

    ―Badger선내 공격 작전 (6.13~6.19)
    Kansas선내의 공격 작전에서 모든 목표를 점령한 해병 제1연대는 13일부터 공격 준비를 위한 적정 탐색을 시작하여 확보중인 방어선을 계속 보강하면서 수색 정찰을 실시하였다. 17일 제1, 제2대대는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고 제3대대는 도솔산 동남방 2km에 있는 표고 1,100m의 험준한 도솔산의 지맥으로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고수하고자 하였으나 중대는 목표 지역에 박격포 및 3.5″ 로케트포의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면서 돌진을 감행하여 마침내 적을 퇴각하게 하고 12:30에 목표를 점령하였다. 이날 전투는 연대가 Badger선내에서 감행한 전투중 가장 북한군의 저항이 치열하였던 일전으로 북한군사망 91명에 포로 11명이라는 결과를 내었고, 아식 소총 20정, 다발총 20정을 획득하였으며, 아군은 12명의 사망자와 49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제3대대는 19일 영시를 기하여 도솔산에 대한 야간 공격을 감행하여 제11중대는 동측 능선을 따라 우회하여 목표의 우단부를 공격하고 제10중대는 정면에서 공격하여 육탄과 육탄이 서로 마주치는 혈전을 전개한 끝에 05:30분에 도솔산의 정상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연대는 지난 6월4일에 도솔산 지구에서 공격전을 개시한 이래 만 16일간에 걸친 격전을 거듭한 결과 피로 얼룩진 24개의 목표를 모두 점령하고, 북한군의 역습에 대비하여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였으며, 이로부터 적극적인 정찰과 수색전을 전개하였다.


ㅇ양구군 인문지리


    강원도 중앙부에 위치하며, 북쪽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회양군과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인제군, 남쪽은 춘천시, 서쪽은 화천군·철원군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서울시보다 1.2배 큰 700.80㎢로 강원도 면적의 4.2%에 해당하며, 인구는 2002년 현재 2만 3198명이다. 행정구역은 1읍(양구읍) 4면(남면·동면·방산면·해안면) 77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청은 양구읍 하리에 있다. 수입천과 서천이 북한강과 합쳐지는 곳에 평야가 발달하여 농업이 활발하고, 최근에는 약초와 고랭지채소의 재배가 증가하고 있다. 특산물은 쌀·방산꿀·더덕·감자·치커리 등이 있으며, 예로부터 양구쌀은 질이 좋기로 유명하여 임금님께 바쳐지기도 하였다. 들판이 넓어 소를 많이 키우고 산에서는 산양도 많이 기르며, 잣·대추·도토리·송이·표고버섯의 생산량이 많다. 또한 백자를 만들어내는 방산가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마터로서, 앞으로 도자기 공예 발전에 큰 기대가 되는 곳이다.
    양구군은 방산면과 동면 일부, 해안면 전체가 민간인 출입 통제선보다 북쪽에 있어 6·25 전쟁 후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왔다. 따라서 대암산 용늪·두타연 등 잘 보전된 자연환경과 선사유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희귀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대암산 용늪은 수천년 동안의 생태계 변화를 간직하고 있어 학술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소양댐과 화천댐의 건설로 군 전체의 85%가 호수와 임야지역으로 되어있으며, 소양호와 파로호에는 정기 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교통은 양구읍을 중심으로 평화의 댐을 거쳐 화천군에 이르는 도로가 있고, 남쪽으로 소양강을 따라 추곡령과 춘천시에 이르는 국도가 있다. 최근에는 각종 도로망의 확충으로 수도권과 설악권·동해권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 당시 격전이 있던 곳으로 이와 관련된 안보 관광지가 많으며, 국내 최초로 세워진 선사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서 앞으로 펀치볼∼두타연(금강산 길목)∼추곡약수, 파로호∼소양호를 연계하는 관광권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지역의 인물로는 빙상선수 유선희와 서양화가 박수근 화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