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북풍한설 속 장진호 지역의 미1해병사단 약 23,000명은 중공군 6개 사단 약 120,000명에게 포위되어 괴멸할 위기에 봉착하였다. 미1해병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강경시를 확보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중공군 제9병단은 미1해병사단을 격멸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안타깝게도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중공군의 전투역량도 농촌군대 수준으로 경시한 채 압록강으로 계속 북진하여 크리스마스 이전에 통일을 달성한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장진호 일대 도로는 비좁은 산길로 결빙까지 겹쳐서 매복에 유리한 험지이다. 심지어 중공군 포로가 대규모 중공군이 장진호 지역의 산속에 숨어 있다가 미군을 일거에 포위할 것이라는 정보를 실토하였으나, 미10군단은 이를 무시하였다.
장진호전투는 유엔군 뿐만 아니라 중공군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처절한 역사이다. 혹독한 한파는 장진호전투의 지배자였다. 실례로 중공군은 미군의 항공화력을 피하려고 눈 위에 엎드렸다가 부대원 전체가 동사하였다. 미군도 얼어붙은 전투식량을 취식하여 심한 장염과 설사에 시달렸으며, 맨손으로 장비를 만지면 손이 얼어붙어서 뚝 떨어져 나갔다. 차량과 전차는 엔진의 동파방지를 위해 2시간마다 시동을 걸어야 하였고, 엔진 부분에 소변을 보는 일도 있었다. 또한, 장진호전투는 피복, 병기, 장비 등 보급이 전투의 승패를 갈랐다. 중공군 보급은 현지조달이 기본이었으나 미1해병사단의 완강한 전투로 중공군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하여 혹한 속의 배고픔을 견딜 수 없었다.
미1해병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다는 신조에 따라 장진호 축선에 부대를 집중 배비하고, 하갈우리에 충분한 탄약과 필수 보급품을 사전 배치하였다.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압록강을 향해 쾌속진군하는 것과 달리 미1해병사단은 11월 1일부터 26일까지 무려 26일간을 하루 평균 1.5km로 신중하게 진군하였다. 또한, 사단장은 사단 전체가 포위된 최악의 상황에서도 단 한 명의 전우도 남기지 않고 모두 함께 이동하자고 독려하여 강력한 전투력 발휘가 가능하게 하였다. 참고로 미 해병은 전사한 전우의 명예를 존중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부상자와 시신을 모두 회수하는 전통이 있다.
장진호전투의 피해를 살펴보면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5일 동안 중공군의 피해는 미군 대비 10배가 넘었으며, 대부분의 비전투사상자는 동상환자였다. 미군은 전사상자 3,637명, 비전투사상자 3,657명이었고 중공군은 전사 25,000명, 부상자 10,200명이었다.
미1해병사단이 중공군과 장진호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수행한 덕택에 장진호 북쪽까지 진출했던 연합군 2개 사단은 특별한 저항 없이 모두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반면에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전투의 참담한 패배로 ① 흥남철수작전이 완료될 때까지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수행하지 못하였고, ② 1951년 1·4후퇴 중공군 3차 공세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③ 1951년 3월이 되어서야 전투력을 재편성하여 전선에 복귀하였다. 만일 중공군 9병단이 장진호전투에서 승리하여 서부전선을 증원하였다면 유엔군은 어디까지 후퇴했을지 예상할 수 없다.
장진호전투의 승리에 이은 흥남철수작전은 단기간에 193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연합군 뿐만 아니라 피난민까지 최대 인원을 철수한 완전작전이다. 한국군 및 유엔군 105,000명, 피난민 98,100명 차량 17,500대, 물자 350,000톤을 철수하였다. 최초에 연합군은 ① 시간이 지체될 경우 연합군 피해의 증가, ② 병력, 장비, 물자를 싣는 수송선의 제한, ③ 피난민 사이에 첩자가 침투할 경우 파괴공작을 벌일 우려 등으로 피난민의 철수에 반대하였다. 다행히 철수작전을 담당한 미 해군 군수참모의 적극적인 건의, 한국군 지휘관의 단호한 설득 등으로 전투장비의 손실을 감내하면서 피난민을 철수시킨 감동을 주었다.
미군은 12월 15일부터 24일 14시 36분 온양호와 호위 전투함이 마지막으로 흥남부두를 떠나는 순간에 항구시설과 물자를 중공군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모두 폭파시켰다. 중공군 27사단은 하루 뒤인 12월 25일 아침이 되어서야 흥남을 점령할 수 있었다. 참고로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한 7,600톤급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피난민 약 14,000명을 수송하여 '단일 선박으로서 가장 큰 규모의 구조작전을 수행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미 해병은 잔인한 혹한과 중공군의 무자비한 야습과 싸우며 이름도 모르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왜 죽어갔을까? 역사를 잊은 국가는 미래가 없다. 은혜를 모르는 국가도 미래가 없다. 주한미군은 한국군과 함께 'We Go Together!'를 신념으로 오늘도 한결같이 한국의 방위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대한민국 안보의 사활적 이익이다. 우리 향군은 한미동맹과 안보의 중요성 제고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박상중 국방대학교 교수 / 정책학박사 / 육군발전정책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