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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준 초대사령관

낙동강 방어선 구축한「무적 海兵」창설자

by 충실한 해병 2022. 11. 8.

申鉉俊 초대 해병대 사령관 (1915~2007)

낙동강 방어선 구축한「무적 海兵」창설자
『전쟁포로·부역자 죽이지 말라』고 엄명

 

 

申鉉俊
1915년 경북 금릉 출생. 봉천군관학교 졸업. 1946년 귀국 후 조선해안경비대 입대해 인천기지사령관·진해특설기지 참모장 역임. 해병대 창설 초대 사령관(1949~1953), 해병 제1여단 창설(여단장·1953), 해병 중장으로 예편(1961). 駐모로코 대사,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 駐바티칸 대사 역임.

孔正植 前 해병대사령관·성우회 부회장
1925년 경남 밀양 출생. 마산공립商高, 해군사관학교 1기 졸업. 미국 해병지휘참모대 졸업. 해군 경주함 함장, 해병대 제3 전투단장, 韓美 해병 연합상륙 여단장, 해병 제1여단장, 해병 제1사단장, 해병대사령부 참모장, 제6代 해병대 사령관, 제7代 공화당 국회의원, 성우회 부회장.

 

80만 해병 가족의 아버지

 

지난 10월15일 오전 3시15분, 해병대를 만든 申鉉俊(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이 미국 플로리다州 나이스빌市에서 별세했다. 享年(향년) 92세.
 
  1949년 해병대 초대 사령관에 임명된 申사령관은 그해 4월15일 병력 380명을 모아 해병대를 창설했다. 그 해병대를 거쳐간 해병가족이 80만을 넘었다.
 
  지난 10월18일 인천공항,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고인의 유해가 빈소인 국군수도병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해병전우회의 후배 해병들이 도열해 申鉉俊 사령관을 경건하게 맞이했다. 머나먼 이국에서 고국이 그립고 후배 해병들이 보고 싶어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申鉉俊 사령관과 나의 인연은 60년 전인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조선해안경비대 진해특설기지의 참모장(중령)이었고, 나는 해군사관학교 훈육관(중위)이었다.
 
  1949년 10월1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조선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정식 발족됐다. 20일 만에 여수·순천지역에 주둔해 있던 육군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300t급 302정장으로서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 두 척을 나포해 여수세관에 인계하다 여순반란사건을 맞았다.
 
  해군진해통제부 사령관 金一秉(김일병) 대령은 申鉉俊 진해특설기지 참모장에게 반란군 진압임무를 맡겼다. 내가 이끄는 302함도 申鉉俊 참모장 휘하에 들어갔다.
 
  孫元一(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申鉉俊 참모장이 旗艦(기함)인 충무공함을 타고 여수로 달려왔다. 해상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던 나는 孫元一 참모총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申鉉俊 참모장에게 브리핑을 했다.
 
  『반란사건 당일부터 여수항을 순찰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육군 5연대 1대대를 상륙시켰다. 하지만, 일본의 陸戰隊(육전대)나 미국의 해병대와 같은 부대가 있었다면 반란은 훨씬 더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孫元一 참모총장이 『원자폭탄에 의해 일본의 항복이 앞당겨지긴 했지만 美 해병대가 본토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서둘러 항복한 것』이라고 동의했다.
 
  여순반란사건이 진압된 후, 나는 申鉉俊 참모장과 함께 해군의 상륙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 즉 「해병대」의 창설필요성을 附記(부기)한 「戰鬪詳報(전투상보)」를 제출했다.
 
  孫元一 총장은 申鉉俊 참모장을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에게 천거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병, 申鉉俊
 

  해병대 창설이란 중책을 맡게 된 申鉉俊 참모장은 즉시 해군 진해통제부 참모장직을 후임자인 金錫範(김석범) 중령에게 인계한 다음, 부대창설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뜻을 같이하는 동지간부를 규합하러 나섰다.
 
  申사령관은 먼저 준하사관 교육대에서 함께 일했던 金聖恩(김성은) 중령에게 도움을 청했다. 만주 하얼빈 農大(농대)를 졸업한 金聖恩 중령은 滿軍(만군)출신으로 판단력이 뛰어났다. 신설하는 해병대에 비전이 없어 보였는지 金聖恩 중령은 쉽게 수락하지 않았다. 申사령관은 부인 咸惠龍(함혜룡) 여사와 함께 三顧草廬(삼고초려) 끝에 金중령의 승낙을 받아 냈다. 「두 번째 해병」이 탄생한 순간이다.
 
  신바람이 난 申鉉俊 사령관은 신병 교육요원으로 일할 하사관 모집에 나섰다. 진해에 주둔하고 있던 해군 각 부대들은 모범적인 하사관들을 제쳐 놓고, 정의감이 강하고 용감하지만 가끔 부대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하사관들을 차출해 보내 주었다. 이들이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 됐고, 오늘날 해병대 특유의 기질과 전통을 만들어 냈다.
 
  1949년 장교와 하사관 80여 명을 확보했고, 4월 초 해군 신병 제13기 중에서 300명을 선발해 총 380명으로 해병대가 창설됐다. 申鉉俊 사령관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바로 해병대의 전통이 될 수 있으므로 어떤 일이든 신중하게 처리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해병대가 대한민국의 체면 살렸다』
 
  申鉉俊 사령관이 지휘하는 해병대는 6·25 전쟁을 맞아 진가를 발휘했다. 1950년 8월 해병대가 마산의 진동리 지구전투에서 4개대대 병력으로 인민군 제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공격을 감행해 敵(적) 6사단의 예봉을 꺾자 「뉴욕 타임스」 기자는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대서특필했다.
 
  「낙동강 방어선 구축」이라는 戰功(전공)을 세운 해병대 全장병은 1계급 특진했다. 한국 해병대의 戰功에 놀란 美해병 1사단장 제럴드 토머스 소장은 한국 해병대 4개 대대를 美 해병대에 배속해 인천상륙작전에 선발대로 투입시켰다.
 
  한국 해병대는 서울 탈환의 선봉에 서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렸다. 한국 해병대가 美 해병대와 함께 수도 서울을 탈환하자 李承晩 대통령은 『해병대가 대한민국의 체면을 살렸다』며 기뻐했다.
 
  나는 인천상륙작전 기간 중 704함 함장으로 해병대를 지원했다. 한국군이 보유한 15척의 소형함정(PC함)이 월미도 300m 전방까지 접근해 함포사격을 했다. 인천상륙작전을 마치고 귀대하던 중 해병대 참모장 金聖恩 대령을 진해에서 만났다.
 
  그가 『孔소령, 내가 해병대 1연대장이 됐으니 같이 싸우자』고 했다. 나는 즉석에서 승낙했고 곧바로 해병대 1연대 1대대장으로 발령이 났다. 대한민국 해병의 전설적 인물인 申鉉俊·金聖恩 두 분과 나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申鉉俊 사령관은 1936년 봉천군관학교 5기생으로 軍과 인연을 맺었다. 丁一權(정일권) 前 국무총리, 金錫範 前 해병대사령관, 宋錫夏(송석하) 예비역 소장, 金白一(김백일) 1군단장(중장) 등이 동기생이다.
 
  申鉉俊 사령관은 『공산주의 군대인 八路軍(팔로군)에게서라도 우리가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면서 滿軍 시절 팔로군과 싸우던 경험을 막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 해병대에 접목시키려고 애썼다. 오늘날 해병대가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장교·사병 가릴 것 없이 선·후배로 연결되는 전통을 만든 사람이 申사령관이다.
 
  申鉉俊 사령관이 1944년 9월 滿軍 보병 제8團(단) 6連長(연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河北省(하북성) 遵化縣(준화현)에 위치한 그의 부대가 好女塔(호녀탑) 고지를 점령하다 전사자 3명, 행방불명자 2명이 생겼다. 팔로군은 행방불명자 2명을 붙잡아 치료해 준 뒤, 인근 농민들을 시켜 申鉉俊의 부대까지 데려다 주도록 했다고 한다.
  

  『포로와 부역자를 함부로 다루지 말라』
 
  1950년 8월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으로 통영을 되찾은 申鉉俊 사령관은 통영경찰서를 지휘본부로 사용했다. 그때 인민군에 부역한 사람들이 잡혀 왔다. 申鉉俊 사령관은 『절대 포로를 사형시키지 말라. 부역자를 함부로 다루지 말라』, 『行刑(행형)은 경찰에 맡기고 우리는 전투에만 열중하자』고 지시했다. 해병대가 포로나 부역자들을 즉결처분한 사실이 없는 것은 申사령관의 이런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육군 3군단이 영월로 패퇴했을 때, 내가 지휘하고 있던 해병 1연대 1대대는 경북 안동에 진출해 있었다. 1대대장이었던 내게 申鉉俊 사령관은 『절대 民家(민가)에 가지 말고 제방둑에 壕(호)를 파고 야영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대대병력을 전부 강둑에 배치해 호를 파게 하고 개인천막을 치게 했다. 대대장인 나도 개인호를 팠다.
 
  申사령관의 愛民(애민)정신은 「人民은 물이고, 軍은 물고기」라는 八路軍의 정신에서 배운 것이 틀림없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지역의 제주農高·한림高·오현高 3학년생과 교사 등 3000여 명이 자원입대했다. 이들 1개 연대 규모의 해병 3·4기생 해병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주력부대가 됐다. 특히 대한민국 최초의 女軍(여군)인 윤연숙을 비롯한 여학생 126명이 해병대에 입대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申鉉俊 사령관을 몹시 아꼈다. 李대통령은 1951년 6월 敵 2개 사단을 격퇴한 도솔산 전적지를 방문해 「無敵海兵(무적해병)」이란 친필휘호를 써주었다. 휴전이 되자 申鉉俊 사령관은 봉천군관학교 동기생인 金錫範 부사령관에게 사령관직을 인계했다. 申사령관은 경무대에서 李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났다.
 
  李대통령은 『자네가 해병대 사령관직을 내놓겠다고 하는데, 시기적으로 이른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申사령관은 『해병대 사령관에 임명돼 해병대를 창설한 지 4년7개월이 지났습니다. 해병대는 전방 제일선에 나가 있는 전투부대를 강화해야 합니다. 제 나이 서른여덟이라 아직 退役(퇴역)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기회에 해병전투단을 旅團(여단)급으로 키워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申鉉俊 사령관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1954년 2월 해병1여단을 창설할 때, 李承晩 대통령은 여단사령부인 경기도 金村(금촌)을 방문해 申鉉俊 신임 해병1여단장에게 부대기를 수여하고, 은성무공훈장과 함께 친필 휘호를 써주셨다.
 
  1960년 申鉉俊 사령관이 진해교육기지 사령관으로 재직할 때 3·15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국내정세가 선거를 둘러싸고 몹시 혼란스러웠고, 그 영향이 軍 내부에까지 미쳤다.
 
  申사령관은 3월1일 진해교육기지 사령부 광장에서 장병들을 모아 놓고 『정권이라는 것은 필요에 따라서는 교체될 수도 있는 것이다』라는 소위 「문제 발언」을 했다. 그 뒤 申사령관에 대한 정권의 감시가 뒤따랐다.
 
  『절대 부하들에게 양심에 반하는 투표행위를 강요하지 말라』고 하는 申사령관을 보면서 불의를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申鉉俊 사령관은 말수가 없는 분이셨다. 화술이 좋은 金聖恩 장군이 우스갯소리를 하면 옆에서 듣다가 껄껄 웃는 정도였다. 그분은 전장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결코 부하장교들에게 「해라」를 하지 않았다. 부하를 존중하고 아꼈다. 그는 내게 늘 『이렇게 해줘요』라고 말씀하셨다.
 
 
 

 

6·25와 함께 밀어닥친 가족의 비극
 

  한국전쟁은 申사령관 가족에게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나도 그의 참모를 통해 겨우 귀동냥을 해 아는 정도였다.
 
  申사령관은 광복 직후인 1946년 차남 「優(우)」를 잃었다. 두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차남은 홍역에 걸려 엄마 등에 업힌 채 숨을 거두었다. 咸惠龍 여사가 회령역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벌어진 일이었다.
 
  申사령관이 북진을 계속해 함흥지구 戰線(전선)까지 진출했을 때 부인 咸여사는 자녀들을 데리고 수복된 서울의 장충동에서 피란살이를 하고 있었다.
 
  申사령관 집에는 해군경비병이 파견을 나와 있었다. 집안에서 오발사고가 났다. 장녀 순희는 머리에 한 발의 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16세의 처제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지고 말았다. 申사령관은 순희에게 「마리아」, 처제에게 「루시아」라는 이름으로 사후영세를 하고 천주교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申사령관은 자서전 「노해병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웬만한 일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며 매사를 냉정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장녀 순희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마음이 많이 약해졌는지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아졌다』
 
  비슷한 시기 申사령관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동서 朴吉龍(박길룡) 소령이 우군의 誤爆(오폭)으로 전사했다. 가족을 끔찍이 사랑한 申사령관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시기였다.
 
  申鉉俊 사령관의 가톨릭 代父가 張勉(장면) 박사다.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張勉 총리는 申사령관을 불러 해군참모총장직을 제의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張勉 총리가 『申장군처럼 벼슬을 주려고 하는데 마다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고 한다. 해군에서 해병대로 轉科(전과)한 이상 申사령관은 해병대로서 명예롭게 軍생활을 마감하려고 했던 것이다.
 
  장남 옹목씨는 해군간부 37기로 임관해 소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공수교육을 이수하고 해병대 1사단 수색중대장으로 베트남戰에 참전했다. 차남 옹인씨는 고려大를 졸업하고 해병 228기로 軍생활을 마쳤다. 申사령관이 2남4녀의 자녀 중 두 아들을 해병으로 보낸 것은, 그가 우리 해병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朴대통령, 申사령관을 「형님」으로 호칭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申鉉俊 사령관을 軍선배로서 존경했다.
 
  1944년 7월 申鉉俊 사령관은 열하성 三道河(삼도하)에서 당시 8단장의 부관으로 있던 朴正熙 중위를 만났다. 朴중위는 신경군관학교 2기 출신으로 만주군에 근무하고 있었다. 申사령관은 8단 6연장으로 대위였다.
 
  당시 8단內의 한국인 장교는 신경군관학교 1기 출신의 李周一(이주일) 중위가 제1영 부관으로 근무 중이었다. 申鉉俊 대위는 朴正熙 중위에 대해 매우 믿음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두 사람은 광복군 제3지대 평진대대에서 각각 대대장과 제2중대장으로 있다가, 광복을 맞아 1946년 5월 부산으로 함께 귀국했다.
 
  모로코 대사 시절 이야기다. 朴대통령은 『형님, 오랫동안 모로코에서 수고가 많았습니다. 형님은 본래 중국 사정을 잘 알고 중국어에 능통하니 한번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라며 자유중국 대사를 권했다.
 
  申사령관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럼, 고향인 金泉(김천)에서 출마해 보시지요』 했다. 申사령관은 『정치에는 적임자가 아니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계속 申鉉俊 사령관을 챙겼다. 1970년 모로코 주재 대사직을 마치고 외무부에서 퇴임하자, 그해 9월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으로 밀어 주었다.
 
  1974년 申사령관이 초대 바티칸 대사로 부임한 것은 朴대통령의 배려였다. 그해 8월 하순, 申사령관은 청와대 공관장 회의에서 朴正熙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를 가졌다. 申사령관은 비록 私的(사적) 만남이지만, 유신체제下 교회에 대한 査察(사찰)과 박해에 대한 바티칸 당국의 유감을 들려 주면서 『앞으로 이러한 일들은 조속히 시정돼야 할 것 같다』고 했다. 申사령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朴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朴대통령은 한동안 묵묵부답인 상태로 있다가 조용히 일어나 거실로 올라갔다고 한다.
 
 
 

 

재산 1억원 해병에 기탁
 

  봉천군관학교 2년 후배인 白善燁(백선엽·88) 예비역 대장은 申鉉俊 사령관을 깍듯이 예우했다. 白장군이 육군참모총장 시절, 대구 육군본부 관사로 申사령관을 모신 적이 있다.
 
  1943년, 申鉉俊 대위와 白善燁 소위는 간도특설대의 기관총박격포 부대인 「機迫連(기박연)」에 근무하고 있었다. 白善燁 소위는 팔로군 토벌을 앞두고 申사령관의 부인 咸惠龍 여사에게 『제 처가 아직 어리니 제가 戰線에 출정하고 있는 동안 잘 보살펴 주십시오』라며 신부를 의탁했다고 한다.
 
  미국에 거주하는 申사령관이 한국에 왔을 때, 서울의 한 호텔 중식당에서 金壽煥(김수환) 추기경, 丁一權 前 참모총장과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봉천군관학교 동기생인 丁 前 총장이 『申장군은 봉천군관학교 시절, 하도 중국말을 잘해서 반년이 다 되도록 중국사람인 줄 알았다』고 농담을 했다.
 
  하얼빈보통학교에서 4년간 일본어를 배워 일본어에도 능통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申사령관은 배움에 열심이었다.
 
  申鉉俊 사령관은 2004년 4월, 『해병대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해병대 창설 55주년 기념일에 맞춰 1억여원을 발전기금으로 전달했다. 현재 그 자금으로 「신현준 장학회」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대방동 해군회관에서 전·현직 해군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 軍 원로들이 모인 가운데 발전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 金聖恩 前 국방장관과 함께 즉석에서 1억원씩을 출연키로 약속했다.
 
  부인 咸惠龍 여사가 2001년 9월, 돌아가시자 申鉉俊 사령관은 수원에서 플로리다州 나이스빌에 있는 차남(신옹인)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현지 해병대 전우회로부터 들은 바로는, 申사령관은 매일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세수하고 응접실에서 독서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한 달에 두 번 인근 「나이스빌성당」 성경공부 모임에 나갔다. 산보를 할 때면 사탕을 바지주머니에 잔뜩 넣어 이웃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申사령관을 「사탕 할아버지」로 불렀다고 한다.
 
 
  『휴일에 죽으면 민폐가 된다』고 걱정
 

  3년 전부터 30~40代 이민자들과 함께 ESL영어학원에 다녔다고 한다. 선생은 네덜란드계 마리아였다. 申사령관은 그녀가 가르쳐 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16절지에 구멍이 날 정도로 새카맣게 단어적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申사령관을 찾은 해병대전우회원들이 기념으로 한두 장씩 가져갔다고 한다.
 
  申鉉俊 사령관은 알레르기성 비염 외에는 잔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지난 5월15일, 申鉉俊 사령관은 金聖恩 前 국방부 장관이 돌아가시자 해병대전우회 앞으로 엽서를 보냈다.
 
  「내가 먼저 가야 하는데 왜 참모장이 먼저 갔는가」
 
  굵은 사인펜으로 쓰인 엽서에는 이 말이 전부였다. 金聖恩 장관은 최근까지 申鉉俊 사령관에게 말끝마다 『사령관님, 저는 사령관님의 영원한 참모장입니다』라고 했다.
 
  둘째 며느리 金英蘭(김영란)씨는 『지난여름 가장 아끼던 처제 咸惠玉씨가 대장암으로 세상을 뜨고, 영어선생님 마리아가 떠나가자 그 충격으로 식사를 줄이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어학원도 중단하고 산보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들이 병원에 모시고 갔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했다. 가족들은 죽음을 「선택」하신 것 같다고 했다.
 
  둘째 며느리에 의하면, 申鉉俊 사령관은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 화장실을 출입하며 『휴일에 죽으면 민폐가 된다』면서 걱정했다고 한다.
 
 
  「성모경」들으며 永眠
 
  지난 10월15일 새벽 3시, 申鉉俊 사령관은 「성모경」을 들으며 永眠(영면)했다. 국립대전현충원 제1묘역에는 살아 생전처럼 申鉉俊 사령관과 金聖恩 참모장이 나란히 자리를 함께 했다. 해병대사령부에 묻히고자 한 故人의 유지는 받들지 못했지만, 저승에서 두 분이 이승처럼 좋은 동무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美 해병대의 제임스 콘웨이 사령관은 弔辭(조사)를 보내 申鉉俊 사령관의 죽음을 애도했다.
 
  「대한민국 해병대 초기 시절에 보여준 故人의 지도력과 영웅적인 헌신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지휘는 해병대에 높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친구들과 동맹국들은 고인을 크게 그리워할 것이며, 당신의 빈 자리는 美 해병대 전우들에게 더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