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뉴스피플
金然翔장군의 비망록'은 그동안 해병가족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최장기 연재(15회)의 기록을 세우고 이번호로 막을 내린다. 金장군은 마지막회라는것이 아쉬운 듯 평소의 안보철학과 군에 대한 식견등을 독자들께 되도록 많이 전해 주기를 원했다. 10여년전 세계 주요국가의 역사학자들이 일본에 모여 회의를 열었을 때 결론은 적어도 5천년 역사중에 태평성대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전쟁과살륙으로 점철된 역사였다는것. 金장군은 후대의 자손들을 생각할 때 현재를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엄연한 역사의 진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안보개념은 당장의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훗날 우리 후손들이 약육강식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앞날을 대비한 '포석'이 깔려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金장군은 일본잡지 '문예춘추'에서 읽은 내용을 이야기했다. 일본 자위대사관학교 졸업식때에는 유명한 문인을 불러다가 졸업축사를 시킨다는 것이다.이는 신선한 자극과 함께 젊은이들에게 확고한 '철학관'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金장군은 설명했다.
金장군은 "우리군은 통일후의 군조직을 어떻게 편성할 것이냐에 대해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면서 "특히 통일후 내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대비책도 세워놓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공수부대의 개편론을 제기했다. 현체제의 공수단을 각 사단에 1개 대대씩 분산배치시킴과 동시에 사단전투력을 공수단수준으로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것.공수단은 12.12와 5.18 등에투입돼 본연의 임무와는 다른 일에 많이 활용된 만큼 그동안의 정치색을 없애고 순수 야전사단에 배치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金장군의 논리다.
金장군은 "공수단은 5.16이후 확장일로를 치달았다"면서 "반면 해병대는한반도지형의 특성상 증강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한때 해체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해병대 해체와 관련된 비화를 언급했다. 金장군은 5.16을 성공시킨 것은 결국 해병대였다고 서두를 꺼냈다.그리고당시 가담했던 해병대장교들은 5.16후 민정이양 등을 내세우며 과감히 전역하는 용기를 보였다고 했다. 5.16을 성공시키고도 해병대는 공수단에 비해 점점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金장군은 64년 해병사령부 작전교육국장시절 유능한 대령 10여명과 함께 해병대의 필요성을 역설한 '붉은 책자'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이 100만명이 넘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도 200년동안 군사쿠데타가 한번도 없었던 것은 해병대를 워싱턴 주변에 포진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대통령관저까지 굳건히 지키고 있는 미해병대는 그 자체만으로 쿠데타억제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金장군은 풀이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해병대사령관 출신인 金聖恩장군이 7년동안 국방부장관에 재임했던 것도 군사정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어떤 불순행동을 억제하려는데서 비롯됐다고 했다. 70년대들어 공수단은 계속 신설되는 반면 해병대는 없애야 한다는 여건이은연중 조성되기 시작했다.심지어는 해병대 내부에 출처불명의 유언비어 등이 나돌며 와해 움직임이 퍼지기 시작했다. 다시말해 외부여건은 여건대로 내부조직은 조직대로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73년 7월초였다.해병1사단장직을 마치고다음 해병대사령관 부임을 위해 서울 종로구 교남동 자택에서 잠시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국방책임자와 해군 고위장성 한명이 예고도 없이 金장군댁을 방문했다.이들의 표정은 매우 굳어 있었다.더욱 놀란것은 방문목적이 '해병대 해체'를 사전통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천벽력을 맞은 金장군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떻게 해병대를 해체할 수 있느냐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국방책임자는 "각하의 명령이니 어떻게 합니까.협조해주시지요"하고 간곡히 설득했다. 그렇게 둘은 돌아갔다.金장군은 하늘만 쳐다보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며칠후 金장군은 무거운 발길을 겨우 움직여 서울 후암동 해병대사령부로출근했다.입구부터 이삿짐을 싸느라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金장군은 사령관실로 곧장 직행했다.
李丙文사령관(대장)과 단둘이 마주앉았다.그러나 李사령관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이렇게 전격적으로 해병대를해체하게 된 내막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둘은 눈물만 흘릴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특히 金장군은 창설당시 380명으로 출발한 해병대가 6.25와 월남전에서 가장 많은 공훈을 세웠던 점을 상기시키며 "해병대가 어떤 부대인데..."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해병대 해체와 관련된 당시 정부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정부는 73년 9월14일 국군조직법중 개정법률안을 의결,지난 49년 4월14일에 창설된 해병대사령부와 지원부대를 해체하고 잔여부대및 병력을 해군에 통합시켰다. 정부는 자주국방태세의 조속한 확립과 경제적인 군운영을 위해 7월초부터해병대기구 개편작업에 착수,2개월만에 해병대의 기능을 해군에 흡수시키는통합방안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해병대사령부와 해군교육기지사령부 포항기지사령부가 해체되고 잔여해병대에 대한 지원은 육군과 해군이 담당하게 됐으며 해군참모총장이 해상작전권과 상륙작전권을 통할하게 됐다. 또한 해군의 전투병과로 통합된 해병대가 그 고유의 상륙전 임무를 수행할수 있도록 해군에 제2참모차장(상륙전담당)과 예하에 해병참모부가 신설됐으며 초대 제2참모차장에는 金然翔소장이 10월23일 중장으로 진급되어 임명됐다.
한편 기구개편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군조직법중 개정법률안과 8개 관계법안이 9월28일 국회를 통과했으며 해병대사령부 해체식및 제9대 사령관 李丙文대장의 전역식은 10월10일 상오 10시 해병대사령부 연병장에서 거행됐다. 정부는 이날 국방부 일반명령 제29호와 인사명령을 통해 해병대사령부와 2개 지원부대의 해체를 정식 전달하고 창설 24년만에 해체되는 해병대사령부에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여했다....) 이로부터 17년후인 지난 90년 2월 대통령선거공약에 따라 임시국회에서 국군조직법개정안이 통과됨으로써 해병대는 우여곡절끝에 법적 독립부대의 지위를 찾게 됐다. 그러나 "국군은 육군 해군및 공군으로 조직하며 해군에 해병대사령부를 둔다"고 규정한 뒤,제14조 각군 본부의 설치에 관한 조항 제4호에 "해군예하에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해병대사령부를 두며 해병대사령부에 해병대사령관과 필요한 작전참모부서를 둔다"고 명시돼 있어 73년 해체되기 이전처럼명실상부한 법적 지위권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金장군의 회고. "...해병대 해체작업은 73년 7월초 전격적으로 단행됐다.그것은 완전히 쿠데타였다.김포와 대구 등지의 길목에 육군병력 1개 사단씩 배치해놓고 만약에 있을지 모를 해병대의 반발을 사전 봉쇄했다.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해병대사령부에 달려갔으나 모두들 이삿짐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李사령관한테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졸지에 집을 빼앗긴 가장의 심정이었다.식솔들이 다른 집으로 뿔뿔이 흩어진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내막이라도 알고싶어 동부서주 뛰었다.해군본부와 국방부 합참 그리고 청와대 등의 관계자를 만났다.그러나 모두들 피할 뿐 누구 한사람 나서서자초지종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부대에 돌아오니 몇몇 장교가 "가만히 당할 수만 없습니다.뒤엎어야 합니다.조직은 완벽합니다.명령만 내리십시오"하는 것이었다.마음이 무거웠다.뒤엎기에는 많은 희생이 따르고... 이때 金載圭장군이 위로의전화와 함께 朴正熙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전해주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대통령 신임이 각별하니 해군총장이나 국방부장관 등 요직을맡을 것이라는 말로 위로했다..." 해체작업 당시 군요직에 있던 인물은 劉載興국방부장관 韓信합참의장 金圭燮해군참모총장 徐鐘喆대통령안보보좌관등이었다. 73년 10월23일 중장 진급과 함께 해군제2참모차장 발령장을 받은 金장군은그야말로 절름발이 해병대사령관 임무를 수행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金장군은 해병대사령관 공관에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밀착감시가 시작된 것이다.조금만 자리를 옮겨도 누군가 미행하곤 했다. 스스로 할일을 찾지 않으면 안됐다.육군과 해군에서 해병병력들을 마구잡이로 빼내간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金장군은 우선 한.미의정서에 의거한 병력 '실링'을 유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또한 졸지에 보직잃은 대령급 이상의 간부만 전역시키고 나머지는 계급구조의 문제 등을 해결하면서 장차 정상화를 위해 내부결속을 다지도록 했다. 그다음 해병기념회관을 세우기 위해 해병대사령부일대의 부지 1만평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일에 앞장섰다.
金장군의 회고. "...해병대 원상회복을 위한 작전을 전개해보려 했으나 조용히 훈령이나따를 것이지 혼나고 싶으냐는 상부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또 일부에서는 한번 정해진 일을 금방 회복이 가능하겠느냐면서 만류했다. 어쨌든 내가 할 일은 해병대사령관 공관을 존속시키고 해병기념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다.당시 해병대사령부 소유의 토지는 모두 1만여평이었다.이곳을빼앗기지 않으려고 고집을 피우자 劉載興국방부장관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느냐면서 1천여평만을 사용토록하고 나머지는 국방부재산으로 등기이전해버렸다.
결국 75년 4월15일 해병 장사병의 기금 2천400만원을 들여 조촐한 해병기념관을 마련,서울 후암동 옛해병대사령부 자리에서 개관식을 보게 됐다..." 계속되는 金장군의 회고. "...나는 전역식도 없었다.당시 상부에서 훈장을 준다고 나오라고 했다.그러나 나는 해병대 해체한 것이 무슨 잘한 일이라고 훈장을 받느냐고 호통을쳤다.또 전역식은 무슨 전역식이냐면서 정 해주고 싶거든 우리집에 와서 나팔이나 실컷 불라고 했다..."
金장군은 "지금 생각해도 해병대 해체당시 朴대통령도 내심 불안에 떨었을만큼 위기감이 팽배했었다"면서 해병대 해체는 쿠데타식으로 단행된 '사건'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또 "해병대 해체는 5.16후 공수단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해병대가위축되는 등 안팎의 분위기를 오랫동안 방치해놓은 결과에서 비롯됐다"면서"나중에 해체훈령을 몰래 봤더니 단지 국방부장관과 대통령의 결재사인만 있었을 뿐이었다"고 묘한 여운을 남겼다.
75년 7월 그 흔한 전역식도 없이 군복을 벗은 金장군은 우선 먹고 살 일이걱정이었다. 하루는 柳陽洙장군을 만났다.柳장군은 한.미합작회사인 동서석유화학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마침 柳장군은 주사우디한국대사 부임을 앞두고 있어 金장군에게 "경영은 전문가가 따로 있기 때문에 편히 쉰다는 마음으로 내자리를맡아주시오"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金장군은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金載圭중앙정보부장이 불렀다. 중정부장실에 앉자마자 金부장은 서류뭉치를 앞에 놓으며 "金장군,편하게있을 생각말고 이번 국회(10대)에 출마해보는 것이 어떻소"하는 것이었다.서류뭉치는 金장군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에서 올라온 조사자료인 것 같았다.그러나 金장군은 절대 정치를 안하겠다는 평소 주장을 굽히지 않고 물러나왔다.
이런 유혹은 5공 출범후에도 모정당으로부터 한번 더 받았으나 역시 뜻을굽히지 않았다.대신 다른 사람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뒤 한 실력자가 찾아와 미8군용역회사인 '아리랑택시'를 운영해보면 어떠냐고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아리랑택시는 김재규의 동생이 맡고 있었으며 5공정부에서 경영권을 압수했음을 알고는 단호히 거절했다.
金장군은 '뉴스피플'과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두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해병대 원상복귀를 검토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미국의 정치가 오랫동안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강한 해병대를 키웠기 때문이라는점을 인식,통일후 한반도의 안보를 위해서도 해병대의 원상복구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해체될 때 빼앗긴 1만여평의 해병대부지를 되돌려받아 육.해.공군회관처럼 일반인들도 이용할 수 있는 '해병회관'을 하루속히 건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100만 해병전우들의 숙원이며 그렇게 되면 최소한 10만여명의예비역 해병전우를 불러모아 한바탕 시가행진을 벌이겠다고 金장군은 웃었다. 金장군은 또 인터뷰 대미를 손자병법 '시계편'에 있는 말로 장식해 달라고당부했다.
'將者智信仁勇嚴也'(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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