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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자료

해병대 전투-연희고지 전투

by 충실한 해병 2023. 1. 5.
● 전투시기 : 1950.9.20-9.24
● 전투지역 : 서울
● 주요지휘관 : 정중철 중위, 스미스(Smith) 중위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상 세 설 명
 
1. 서울 탈환작전 개요

  한국전쟁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이룬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은 제10군단의 공격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해병대에 의해 1950년 9월 15일 감행되었다. 미 해병상륙단이 저항하는 적을 무찌르고 인천 동쪽 외곽에 설정된 교두보로서의 진격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인천시내의 잔적섬멸작전을 담당하고 있었다.
  일단 인천시를 포함한 교두보를 확보한 상륙군은 곧이어 서울탈환작전에 돌입하고 미 해병 제1연대는 경인(京仁)가도의 우측지역을, 그리고 미 해병 제5연대는 동 좌측지역을 각각 담당하고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해병대는 16일 저녁 제2대대를 계속 인천 시내의 잔적섬멸작전에 임하게 하고 자리를 옮겨 미 해병 제5대대의 좌측에 포진한 후 17일 수차에 걸쳐 적의 역습을 물리치면서 김포반도의 잔적(殘賊)을 섬멸하였다.
  미 해병 제1연대가 18일 소사(素砂)를 탈환한 다음 영등포를 향하고 있을 때에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해병 제 1,2 연대 행주(幸州)쪽으로 한강을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고 19일에 그 준비를 서둘렀다. 19일 야간을 이용한 도하작전은 미리 알게된 적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20일에 도하를 강행하는데 성공하여 능곡에서 수색 방향으로 적을 압박하였다.
  17일 뒤늦게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미 제1연대의 남쪽을 차단하고 엄호하는 가운데 미 해병 제1연대는 영등포로 진격을 계속하고 격전을 거듭하였다.
  최초 서울 서측방을 공격하기 시작한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해병대는 서울을 사수하려는 북한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연희고지(延禧高地) 일대의 능선상에서 격전이 전개되어 그 전진 속도는 둔화되었다. 그러나 아군의 선전으로 적의 보루는 무너지고 24일에 이르러 연희고지 일대의 능선을 점령하였다. 또한 많은 고전 끝에 영등포을 점령하고 미 보병 제7사단의 일부가 수원으로 남진하고 있을 24일에 미 해병 제1연대는 마포쪽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미 해병 제5연대 우측에 배치되었는데 이때에 또한 미 해병 제7연대도 21일 사령부와 함께 인천에 상륙한 다음 미 해병 제5연대 좌측방에 배치되었다.
  제 10군단장 알몬드(Almond) 소장은 서울 서측방에서 미 해병대가 고전하자 25일 미 보병 제7사단 예하 32연대와 한국 육군 17연대를 서빙고 쪽으로 도하시켜 서울을 북서쪽과 남동 쪽에서 포위하는 태세를 갖춘 다음 일거에 시내 돌입작전을 전개하였다.
  서울 공략의 주공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해병대는 서울 서측방에서 25일까지는 완전히 능선 일대를 확보하였고 일부 부대는 벌써 서울시에 돌입하였다. 북쪽은 미 해병 제7연대와 한국 해병 제5대대이고, 중앙은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 해병 제1대대인데 이때에 남쪽은 미 해병 제1연대와 한국 해병 제2대대가 배치되어 마치 반원모양의 궁형(弓形) 태세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25일 밤 미 보병 제32연대와 한국 육군 제17연대가 남산을 점령하였을 때 공격을 개시한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대문 방면과 마포 일대에서 공세를 취하였으나 적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진은 불가하였고 26일 아침까지도 변동은 없었다. 다만 원효로와 삼각지 일대를 담당한 한국 해병 제2대대가 국부적인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그 일대를 확보하였을 뿐이다.
  26일 전투는 철수를 위해 시간을 얻기 위한 적의 지연전술을 분쇄하는 전투였다. 적은 수많은 바리케이드와 지뢰를 매설하고 아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아군의 선전으로 저녁에는 서울의 3분의 1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 해병대는 27일 아침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또한 서울시 일원의 잔적을 완전히 섬멸, 29일에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에서 한국군 제17연대는 한국 해병과 임무를 교대하여 서울시 경비에 임하고 미 해병대가 경의가도(京義街道)와 경원(京元)가도를 따라 진격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경춘(京春)가도를 따라 진격하였다. 이것은 서울 탈환 후 내륙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진격이었는데 10월 3일 미 해병대가 의정부에, 한국 해병대가 북한강에 진출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경춘가도를 따라 진격한 한국 해병대는 금곡을 점령하고 북한강에 이르렀다.
  한편 제10군단의 일부 부대인 미 제7사단 31연대는 북상하는 제8군과의 연계작전을 위해 남진하여 서울이 완전 탈환되기 전 26일 수원 남쪽에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2.연희고지 전투

  9월 20일 이른 아침 미 제5해병연대는 행주를 바라보는 개화산 기슭 한강변에서 제3대대를 선두로 도하를 개시했다. 강북에 교두보를 확보하자 제2대대가 건너갔다. 다시 그 뒤를 이어 건너갈 한국 제2해병대대는 오전에 수륙양용 트럭을 타고 대기하고 있다가 다시 LVT로 갈아타고 물을 건넌 다음 정오가 조금 지날 무렵 경의선 철길을 끼고 있는 강매리와 그 가까이에 있는 95고지를 점령했다. 오후에는 개화산 관측소에 나와 선 맥아더 원수가 바라보는 가운데 미 제5해병연대의 제1대대가 마지막으로 강을 건넜으며 제5연대지휘소도 건너와 95고지 동북쪽으로 철길 건너편의 서우물에 자리 잡았다. 또 이날 아침 도하가 개시된 지 두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미 해병사단 공병대대는 도하용 부주를 이용하여 문교를 세우기 시작하여 4시간 만에 첫 번째 것을 완성했는데, 이를 이용하여 전차가 강북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미 공병대대는 다음날과 그 다음날 문교를 더 세워 병력과 물자의 이동을 쉽게 만들어 놓았다.
  한편 한국 제3해병대대는 9월 20일로부터 김포반도의 북서쪽에 대한 방어책임을 홀로 떠맡아 부대를 다시 배치했다. 바로 그 전날인 19일 저녁, 해병대사령부 정보처 소속의장병들이 적정을 수집하기 위하여 작전통제선 밖에 있는 김포읍에 나갔다가 어둠을 틈타 한강을 건너온 북한공산군에게 기습을 받아 4명의 장병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강을 남북으로 넘나드는 적의 움직임이 김포읍 언저리에서 이처럼 활발한데다가 마침내 국군이 피해를 입는 사건마저 일어나, 한국 해병대는 즉시 제3대대를 김포시가에 투입하여 소탕작전을 펴려 했다. 그러나 한강 도하와 서울 입성이라는 주공작전에 전력을 집중하려 했던 미 해병사단에서는 당연하게도 군단통제선 밖으로의 불필요한 공격을 허가하지 않았다.
  한국 제3해병대대는 맨 북쪽의 한강변을 감시하기 위하여 천등고개의 96고지에 제11중대를 두고, 제1대대가 있었던 서해안 검암리 일대에 제10중대를 보냈다. 방어 정면의 한복판에는 김포와 서울을 잇는 도로를 중심으로 하여 김포읍을 서북쪽으로 2km 떨어져서 바라보는 풍무리 일대에 제9중대를 전개시켰다. 대대본부와 화기중대도 제9중대와 함께 풍무리에 자리 잡았다. 무방비상태의 김포읍이 눈앞에 있었지만, 한국 해병대는 사단의 승인 없이는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20일 밤 어둠을 이용하여 북한공산군 제107보안연대는 김포읍에 들어와 본부를 두고 그 예하부대를 국군 제9, 제11중대의 바로 앞까지 전개시켰다. 21일 날이 새자 마을사람이 해병대대 본부에 적의 동향을 알려주었다. 제9, 제11중대는 즉시 출동하여 적을 무찔렀다. 전의를 잃은 적들은 달아나기에만 급급하다가 사살되거나 사로잡혔다. 또한 많은 수의 적들이 벼가 누렇게 익은 논바닥에 엎드려 숨어 있다가 줄줄이 손을 들고 나왔다. 미 해병사단은 국군 제3대대에 배속된 항공연락장교로부터 김포 쪽의 상황을 보고받고 항공지원을 제공하는 한편, 국군의 김포읍에 대한 공격도 승인했다. 한국 해병들은 소대 단위로, 또는 분대 단위로 달아나는 적을 뒤따라 김포읍까지 쳐들어갔다. 천주교회 뒤쪽의 야산 숲속에 있던 적 연대의 지휘본부는 이광수 병조장이 이끄는 로켓포 소대의 급습을 받아 달아날 여유조차 찾지 못하고 모두 사로잡혔다. 제9중대장이 그를 심문하다가 경계를 소홀히 하여 피살되고, 적의 연대장은 다시 해병연락병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 사로잡은 포로만 300여 명에 빼앗은 적의 무기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들은 모두 미 해병사단의 수륙양용 트럭에 실려 후송되었다. 한편 한국 제3해병대대는 제9중대장 정중철 중위를 비롯하여 모두 10여 명이 죽고, 그와 비슷한 숫자의 장병들이 다쳤다. 이날 오후 대대장은 화기중대를 대대본부로 다시 불러들이고 제9중대를 김포읍으로 내보내어 재배치했다. 그날 21일 밤, 적어도 중대규모를 넘는 적이 다시 역습을 개시하여 김포읍의 제9중대를 덮쳐왔으나 국군은 미 함대의 사격지원을 받아 새벽녘까지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한국 해병이 사로잡은 북한공산군 장교는 북한 제107보안연대의 2개 대대가 김포비행장을 공격하기 위해 이미 투입되었고 다시 2개 대대가 추가로 투입될 예정이라고 진술했다. 미 육군의 LVT 부대는 김포비행장 언저리에 배치되었고 이날 21일 인천에 상륙한 미 해병 제7연대도 서둘러 김포비행장 쪽으로 옮겨왔다. 이날 저녁 제10군단 지휘소는 함상에서 인천으로 옮겨 나왔다. 고희의 맥아더 원수는 최전방 작전지역에서의 숙영을 마치고 도쿄로 되돌아갔다.
  미 해병사단이 세워놓은 원래의 계획에 따르면, 미 제5연대가 강북에서 적을 소탕하고 교두보를 넓혀가며 서울로 다가서는 동안 미 제1연대가 남산을 확보하여 서울 외곽을 포위하고, 한국 해병대가 미 제5연대를 앞질러 나아가 서울의 시가지를 공격하며 다시 미 제1연대가 서울 동쪽의 외곽으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또 인천에서 올라올 미 제7연대는 사단의 왼쪽 측방이자 서울시의 맨 북쪽과 북동쪽으로 돌아 나아가 적의 퇴로를 끊기로 되어 있었다. 미 제5해병연대는 사단예비로 둘 것이었다. 이 계획에는 수도탈환작전에 있어서 한국 해병대에 주역을 맡기려는 정책적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이러한 계획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 해병대사령부는 20일 오전을 기해 작전명령 제17호를 하달했다. 이에 따라 제1대대는 책임지역을 제3대대에 넘겨준 다음 사령부와 함께 그날 저녁까지 개화산 아래 정곡리로 옮겨 그 다음날 물을 건너갈 준비를 하였다. 제3대대는 김포반도 쪽에 대한 방어를 제1대대의 뒷받침 없이 단독으로 떠맡았다.
  20일 오전 강을 건너 미 제5해병연대의 북쪽 측방을 떠맡은 국군 제2해병대대는 주력을 95고지에 배치하고 제5중대만을 능곡리에 가까운 51고지에 배치했다. 51고지는 한, 미 해병부대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 가운데 가장 서북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미 제5해병연대의 왼쪽 및 뒤쪽을 지키는 데에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날 밤 자정이 넘어서자 1개 중대를 넘는 적이 역습을 개시하여 제5중대를 덮쳐왔다. 출동 직전에 채워진 신병들이 중대원의 절반을 넘었던 제5중대는 최전방의 독립진지에서 벌어진 야간전투에서 사격이 정확하지 않고 통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그러나 중대원들은 날이 샐 때까지 끊임없이 사격을 계속하여 적에게 달아날 틈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논두렁에 엎드려 숨어 있다가 사로잡힌 적군의 숫자는 약 20명에 이르렀고 그와 비슷한 숫자가 사살되었다. 해병대에서는 한 사람만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21일 아침 한국 제1해병대대는 정곡리의 집결지를 떠나 한강을 건넌 다음 미 제5해병연대에 배속되어 사령부와 함께 수색의 집결지로 이동했다. 스미스 장군은 수도탈환의 선두에 서려는 한국 해병의 열망을 고려하여 제1대대에게 제1선에 나서서 공격할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이날 오후 미 제5해병연대는 한국 제1해병대대로 하여금 수색으로부터 불광천을 가로질러 그 동쪽편의 염산(104고지)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연대의 맨 오른쪽 측방을 맡은 미 제1대대는 경의선 철길과 한강 사이의 전투지대에서 68고지를 공격했고, 연대의 맨 왼쪽을 맡은 미 제3대대는 백련산(216고지)을 목표로 공격했다. 말하자면 국군 제1대대는 미 제5연대 정면의 한복판에서 공격하는 셈이었다. 제1대대는 북가좌동 일대에 왼쪽부터 차례로 3개 중대를 펼쳐서 배치했다. 불광천을 건너 모래내 일대의 메마른 논밭을 100~300m나 달려서 동쪽으로 나아갈 때 적의 박격포와 자동화기 사격을 받고 수많은 장병들이 쓰러졌다. 몸을 가리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군데군데 쌓여 있는 돌무더기뿐이었다. 제3중대에서는 한 사람의 소대장이 이끄는 소규모의 돌격대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전투지역의 맨 오른편으로 돌아가서 104고지 앞쪽의 절벽 위에 있는 적의 자동화기 진지를 폭파했다. 때를 같이 하여 전투지역의 왼쪽으로는 한 사람의 일등병조(현재의 하사)가 이끄는 제3소대가 모래내 한복판의 외딴집까지 달려가 몸을 숨기고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마지막 목표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마침내 적은 고지에서 능선너머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또 일부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죽어 넘어진 적의 시체가 즐비한 가운데 제1해병대대는 저녁 무렵 목표를 탈취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양쪽 옆의 미 해병대대들도 주어진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했다. 제1대대는 이날의 공격에서 8명이 죽고 20명이 다쳤는데 이러한 피해의 대부분은 모래내의 개활지를 건널 때 발생한 것이었다. 미 제5해병연대의 측방과 후방을 경계하고 있던 한국 제2해병대대는 이날 인천에서 뒤늦게 올라온 제7중대를 맞아들였다.
  미 제1해병연대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 동안 격전을 치른 다음 영등포를 장악했고 23일에는 끊어진 한강다리가 내려다보이는 노량진 언덕위에 올라섰다. 한편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내려간 미 제7보병사단 예하의 제32보병연대는 22일 새벽 수원비행장을 점령하여 유엔군의 항공작전을 위한 또 하나의 기지를 마련했다. 또한 인천~수원 사이의 도로를 따라 곧장 수원으로 내려간 제31보병연대는 수원에서 그 이남으로의 진출을 떠맡고 나섰다. 미 제32보병연대는 내려간 길을 되짚어 올라와 안양에서 과천을 거쳐 23일에는 다시 동북쪽으로 4km를 올라가 우면산을 점령했다
  9월 21일 서울 북서쪽 외곽에서 발판을 마련한 한, 미 해병대는 22일 아침 동쪽 고지군을 향하여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미 제5해병연대의 맨 북쪽을 맡은 미 제3대대의 목표는 동북쪽의 안산(296고지)이었다. 맨 남쪽의 미 제1대대는 수색에서 서강으로 내려가는 용산선 철길의 남쪽에 솟아 있는 와우산(105고지)을 목표로 삼았다. 한국 제1해병대대는 미 제5해병연대의 한복판에서 곧장 앞으로 나아가 연희 터널과 그 터널 위의 56고지(연희고지), 다시 그 동북쪽의 88고지, 다시 동쪽으로 신촌역을 거쳐 의령 터널위에 솟아 있는 105고지를 차례로 점령해야 했다. 이 무렵 미 제5해병연대는 적의 주저항선이 안산, 의령 터널의 105고지~와우산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잘못알고, 각 대대의 목표를 이렇게 떼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은 그들의 주력을 훨씬 앞으로 밀어내어, 한국 제1해병대대가 맨 처음에 공격하기로 되어 있던 56고지와 88고지 일대에 주저항선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 전날 점령한 104고지 염산 뒤쪽에서 부대를 정비한 한국 해병은, 공격이 개시되자 제1 및 제2중대를 궁동 일대에 전개하여 폭이 300~500m나 되는 드넓은 개활지를 뛰어 건너려 했다. 그러나 앞쪽의 연희 터널과 56고지, 그리고 여기서 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일대에서 빗발치듯 날아오는 적의 자동화기, 중화기, 박격포, 야포 등의 집중사격으로 말미암아 공격이 좌절되었다. 아군의 포병사격과 항공폭격도 적의 저항을 크게 누그러뜨리지 못하였다. 특히 안산 쪽 높은 곳에서 한국 해병들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오는 측방사격이 국군에게 많은 출혈을 강요했다. 한국 제1해병대대는 담당지역의 오른쪽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경의선 철길 둑을 따라 제3중대의 1개 소대를 투입했다. 5대의 미 해병전차가 이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따라 나섰다. 그러나 56고지와 연희능선에서 날아오는 적의 집중사격이 보병과 전차를 멈춰 세웠다. 다른 소대들은 개활지를 건너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날이 어두워진 다음 제1대대는 부대를 수습하여 104고지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하루 동안 11명이 죽고 45명이 다치는 손실을 입었다. 이날 북쪽에서 공격했던 미 제3대대는 안산의 주봉우리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이 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고 곳곳에서 적과 맞선 가운데 다음날까지 격전을 치렀다. 남쪽의 미 제1대대는 하루 종일 적지 않은 병력이 죽고 다치는 손실을 입어가며 고전한 끝에 저녁 무렵 목표인 와우산을 점령했다.
  23일 아침 국군은 3개 중대를 옆으로 나란히 벌려 세운 다음 앞으로 나갔다. 앞쪽 연희고지 능선에는 북한공산군이 터널과 참호 속에 약 2,000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필사적인 저항을 꾀하였다. 한국 해병의 공격은 적의 극심한 사격으로 다시 좌절되었고 각 중대마다 적어도 한두 명씩의 장교를 비롯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대대의 인사부관 이홍빈 소위는 각 중대의 공격을 독촉하기 위해 나갔다가 적의 사격을 받아 전사했다. 해병대사령부에서는 헌병과 정보대 등 후방요원들 가운데서 62명을 급히 뽑아 제1대대를 증원했다. 일선 중대들은 적의 사격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가려 했으나 몇몇 병사들이 개활지 한복판의 개울을 뛰어 건넌 것이 고작이었다. 미 제5해병연대장은 마침내 연대의 예비대로 있던 미 제2대대를 앞으로 불러내어 한국 해병대의 앞으로 나서서 공격을 계속하게 했다. 15:00시에 공격을 개시한 미 제2해병대대의 F중대와 D중대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전차의 근접지원을 받아 56고지에 올라서서 적과 혼전을 벌이며 그날 밤을 새웠다. 오후에 갑자기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은 한국 제1해병대대는 미 해병대대가 전선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설 때까지 전선을 지키고 있다가 104고지 뒤편으로 물러나왔다. 이날 하루 제1대대는 32명이 죽고 68명이 다치고 1명이 간 곳을 알 수 없는 손실을 입었다. 24일 날이 새자 56고지의 미 제5해병연대 제2대대 D중대는 짙은 안개 속에서 적과 혼전을 벌이다가 중대장 스미스 중위를 선두로 결사적인 돌격을 감행하여 마침내 정상에 올라섰다. 한, 미 해병대가 안산 일대의 주요한 봉우리들을 모두 점령한 것은 9월 25일에 이르러서였다. “연희고지 전투”로 알려진 이 혈전을 고비로 하여 수도 서울의 관문은 마침내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