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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우

서울 수복 직전 전우 살리고 장렬히 산화한 19세 美 해병 유진 오브레곤 일병

by 충실한 해병 2022. 11. 1.

낙동강 방어, 인천 상륙에 투입된 오브레곤 일병 1950년 9월 26일 서울 탈환 위한 전투 도중 전사 자기 몸으로 부상병 덮어 살려… '명예훈장' 추서

오는 28일은 6·25전쟁 초반 북괴군에 빼앗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되찾은 지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유엔군사령부는 당시 서울 수복을 위한 전투 도중 동료 병사를 구하고 장렬히 전사한 19세 미국 해병대원을 추모했다.

 

26일 유엔사에 따르면 멕시코계 이민 후손인 유진 오브레곤 일병은 1930년 11월 미국 캘리포이나주(州)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1948년 6월 불과 17세 나이에 해병대에 입대했다. 신병훈련 부대와 군수 부대 등을 거친 오브레곤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 뒤 해병 1사단으로 옮겼다.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선봉에 선 부대다.

 

6·25전쟁 당시 서울 탈환을 위한 전투 도중 19세 나이에 전사한 유진 오브레곤(1930∼1950) 미국 해병대 일병. 유엔사 SNS 캡처

기관총 탄약 운반·공급 등 임무를 맡고 있던 오브레곤이 속한 부대에 “한국으로 출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950년 7월14일 미국을 떠난 그는 약 20일 만인 그해 8월3일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는 북괴가 한국 영토 거의 대부분을 점령한 가운데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던 때였다. 오브레곤도 당장 낙동강 전선에 투입돼 북괴군 남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해병 1사단에 부여된 진짜 임무는 따로 있었다.

 

1950년 9월15일 미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 그리고 한국 해병대 등을 실은 대규모 함대가 인천 앞바다에 출현했다. 저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다. 함포 사격, 그리고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전투기의 공습 속에 인천에 상륙한 군인들은 곧장 시가전에 돌입했고 북괴군은 속속 사살되거나 제압을 당했다. 오브레곤이 인천을 탈환하고 서울로 진격하는 해병 1사단의 선두에 선 것은 물론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인천상륙작전 직후 패닉에 빠진 북괴군이 겁을 먹고 도주하는 바람에 서울을 쉽게 수복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인천에서 김포를 거쳐 서울까지 진격하는 과정에서 곳곳에 매복한 북괴군의 역습 탓에 수많은 유엔군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인천 상륙 이후 서울을 완전히 점령하기까지 13일이나 걸린 점이 이를 보여준다.

 

72년 전인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벌어진 치열했던 서울 시가전 모습. 유엔사 SNS 캡처

오브레곤이 속한 해병 1사단도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가까스로 서울 시내에 진입한 뒤에도 폐허가 된 건물들 곳곳에 숨은 북괴군과의 시가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9월26일 오브레곤은 서울을 되찾기 위한 전투에서 사력을 다해 싸우는 중이었다. 동료 해병대원이 적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었다. 오브레곤은 재빨리 전우 곁으로 달려갔다. 피를 흘리는 동료를 일으켜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옮기고 몸에 지니고 있던 붕대를 꺼내 응급조치를 했다. 하지만 북괴군이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리 없었다. 적의 기관총 사격이 집중되자 오브레곤도 대응 사격을 했고 이 과정에서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오브레곤의 몸에 가려진 부상병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이후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은 뒤 전선에 복귀했다. 하지만 오브레곤 본인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20번째 생일을 1개월여 앞두고 19살 나이에 이역만리 서울 땅에 뜨거운 붉은 피를 쏟은 채 하늘의 별이 된 것이다.

 

해리 S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은 고인의 용맹함을 기려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했다. 이는 미국에서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에 해당한다. 오브레곤의 훈장 공적서에는 “동료 부상자를 구출하고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며 “용감하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