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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진주지구 전투

by 충실한 해병 2022. 11. 27.

 

● 전투시기 : 1950.7.25-7.31
● 전투지역 : 경남 진주
● 주요지휘관 : 민기식 대령, 김용주 중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1. 진주지구 전투의 개요

  하동지구 전투는 진주지구 전투와 함께 영남지구 편성관구 사령부(사령관 소장 채병덕) 미 제 24사단(사단장 소장 존 처치(John H. Church))의 일부병력과 협동하여, 호남의 남안선을 거쳐 하동의 우회 침공하는 북한군 제 6사단(사단장 소장 방호산)을 요격하여 진주를 잃기까지의 7일간의 지연전을 일컫는다.

 

2. 진주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영남 편성관구사령부 사령관 소장 채병덕
민부대장 대령 민기식
제 3연대장 중령 박현주
제 9연대장 중령 유해준
제 30연대장 중령 김용주
배속부대
이부대장 중령 이영규
해병대장 중령 김성은
미 제 24사단장 소장 존 처치(John H. Church)
제 19연대장 대령 네드 무어(Ned D. Moore)
제 1대대장 중령 로버트 리(Robert Rhea)
제 2대대장 중령 토마스 맥그레일(Thomas M Megrail)
배속부대
미 제 29연대 1대대장 중령 위즐리 윌슨(Wesley E. Wilson)
제 3대대장 중령 헤럴드 모트(Harold W. Mott)0
미 제 13포병대대장 중령 찰스 스트래튼(Charles W. Stratton)
우 인접부대
미 제 1기갑사단장 소장 허버트 게이(Hobart R. Gay)

*적군
북한군 제 4사단장 소장 이권무
제 6사단장 소장 방호산
제 13연대장 대좌 김후진
북한군 제 14연대장 대좌 한일래
제 15연대장 대좌 김현기
포병연대장 중좌 박해민

 

3. 진주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가. 전투전의 개황

  육군본부는 작명 제 79호(50.7.25)로써 전임 참모총장이던 채병덕 소장으로 하여금 남원-하동선에서 이응준 부대와 민기식 부대를 통합지휘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통신수단이 두절된 상황 하에서 이응준 부대는 순천으로 여수로 철수중이며, 민기식 부대는 운봉으로부터 함양으로 지연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하동지구에서는 신편 제 5사단 제 15연대의 일부 병력(연대장 중령 이영규) 100명만이 분산된 상태에서 삼삼오오로 집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미 제 8군 사령관 위커(Walker) 준장은 23일에 호남방면으로 우회한 적이 시속 3.2km로 전진하여, 그 선두가 한의 및 진주에 도달(이는 착오이며, 이날 적은 전주 및 광주 에 집결 중) 하였을 것이라는 정보보고에 접하고 전날 김천 부근에 집결하여 정비 중에 있던 미 제24사단(사단장 소장 존 처치(John H. Church))을 급히 진주로 전진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해 사단의 제 19연대(-1)는 24일 밤에 진주로 이동하고, 이어서 25일 저녁에는 충승을 떠난 제 29연대(-1)가 해지로 진출하여 제 19연대(연대장 대령 네드 무어(Ned D. Moore))에 배속되었다.
  이를 양 연대의 전력을 일별하면, 제 19연대(-1)의 실전 전투 병력은 600명이고, 장비는 T/E 35%이며, 연대장 무어 대령은 25일에 부임하였으므로 아직 연대의 실정도 익숙치 못하였다.
  또한, 제 29연대(-1)는 7월 14일에 충승에서 출동명령을 받았는데, 연대장 및 연대본부는 새로운 연대 편성을 위하여 기간요원으로 잔류하고, 제 1 및 3 양 대대만이 25일에 진주에 도착하였으며, 병력 및 장비는 100%에 가까왔다.

  나. 작전계획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7월 24일에 영남 편성관구 사령관으로 보직된 채병덕 소장의 신고를 받고, 『하동은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요역이며, 진주 및 사천으로 이르는 통로이니 필히 방수하여야 한다.』라고 재삼 역설하였다.
  채병덕 소장은 한때 패전의 책무를 통감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으나, 이처럼 막중한 작전임무가 부여되자 생기를 되찾은 듯이 기뻐하고 다음날 아침에 정래혁 중령을 대동하고 하동으로 달려갔다.
  여기서 현지를 정찰한 그는 동 지구의 중요성을 재인식 하였으나 이에 비추어 자연방비 태세가 되어있지 않음을 비로소 알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그의 고충을 알아챈 정래혁 중령은 『제가 이곳에 남아 정보를 수집하면서 밀려 내려오는 부대를 수습하여 방어하겠습니다.』라고 보고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쾌히 승인하고 그를 남긴 채 진주로 돌아갔다.
그는 그 길로 미 제 19연대장 무어 대령을 방문하여『호남지구로부터 동침중인 적을 하동에서 막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하고 자신도 하동으로 갈 것이라고 표명하였다.
  이리하여 양자 간에는 하동을 고수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채병덕 소장은 공격제대의 고문으로 수행하기로 하였다.
  이 무렵 육군본부로부터 작명 제 72호(50. 7. 25 23:00)가 하달되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육본작명 제 72호

『①하동방면으로 남하한 적은 1개 대대 규모이며 약간의 장갑차를 동반하고 있음.
②영남편성관구 사령관은 지체 없이 하동으로 약진하여 동침하는 적을 격퇴하라.
③행정사항: 장갑차 공격 시에는 휘발유병(휘발유 충전)을 사용할 것.
④전투지휘소의 위치를 보고하라.』


  그러나 채병덕 소장에게는 수하병력이 전혀 없었으며, 때 마침 그의 곁에 있던 박현주 중령(신편 제 3연대장)과 부관 이상국 소령 및 김영혁 대위를 수행시켰을 뿐이다.

  다. 진주지구의 전투

  7월 28일
  미 제 8군 정보보고는 군의 서측방, 즉 거창 및 진주 쪽으로 각각 1개사단 규모의 적이 침공하고 있다는 징후를 잡았음에도 이에 대한 신빙성을 굳히지 못하고 다만 북괴의 제 4사이 진주로 동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미 제 8군은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력이 반감된 미 제 24사단의 주력을 해지로 급파하는 미봉책을 썼는데 실은 북괴 중 가장 정예를 자랑하는 이른바 제 4및 제 6 양사단은 한 · 미 양군이 대구정면에 주력을 두고 힘겨운 방어전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서측방의 엷은 막을 뚫기 위하여 선발대는 원전(진주 서쪽 12km)에 이르므로써 진주의 위기는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이 무렵 진주를 둘러싼 방어태새를 일별하면 미 제 19연대 지휘부는 읍내에 있었고 동 연대 제 2대대 G 중대는 완전동에서 진주가도를 차장하고 있는 한편 연대의 주력은 진주로 전진하고 있었다.
  제 19연대장 무어 대령은 28일 정오에 연대의 주력이 진주로 집결하자 무풍지대와 다름없는 진주가도로 침공하고 있는 적에 대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명령을 구두로 하달하였다.

『① 연대는 하동으로부터 침공하는 적을 요격하여 이를 저지격파하려함.
② 제 1대대는 구호리(진주 남쪽 10km)로 진출하여 곤양으로부터 침공하는 적을 저지격멸하라.
③ 제 2대대는 완전동(진주 남서쪽 16km)으로 진출하여 진주로 오는 적을 저지격멸하라.
④ 제 29연대 제 1대대는 안의에서 계속 적을 격멸하고 명에 의하여 철수 하라.
⑤ 제 29연대 제 3대대는 계속 현 위치(진주읍내)서 재편하고 명에 의하여 출격할 준비를 갖추라.
⑥ 제 13포병대대(-1)는 제 19연대 제 1및 제 2 양대대에 화력의 우선권을 두라.』


  이리하여 7월 28일 13.00에 연대는 진지를 점령하였는데 제 19연대 제 2대대는 현지 정찰결과에 따라 연대장 무어 대령의 양해 밑에 1개 중대를 원전으로 진출시켜 전진진지로 삼고, 주력은 유성리에 포진함으로써 좌 제 1선의 제 1대대와 연계가 이루어졌다.

  7월 29일
  10:00에 모터 싸이클 3대를 앞세운 1개 대대규모의 적이 진주가도를 따라 원전동을 거쳐 제 2대대(대대장 중령 토마스 맥그레일(Tomas H. McGrail))의 전진진지인 속칭 면소땀(원전 동쪽 0.6km)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동진지를 액수하고 있던 F중대는 중화기중대와의 협동 요격으로 교전수합에 그들을 궤퇴시켰다.
  F 중대장은 적을 격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 전개하도록 강요하고 대대장 맥그레일 중령에게 교전 상황을 보고 한 뒤에 그의 명령에 따라 가도와 병행한 남쪽 능선으로 철수하여 유수리(완전동 동쪽 7km)에서 본대와 합세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상공에 나타난 항공기는 유수리 이서에서 활동하는 적의 차량과 행동종대를 맹타하여 200명을 사살하고 차량 25개를 파괴함으로써 그들 침공속도를 얼마간 지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날 새벽 개전 이래 최초로 파울러 중위가 이끄는 M.26 퍼싱(Pershing) 전차 3대가 진주에 도착하였으나, 이는 동경으로부터 급수되었던 것인데, 팬벨트(fanbelt)가 오래된 일제들이라서 과열되기 일쑤였고 이에 장거리 이동은 곤란하여, 전력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하였다.

  7월 30일
  민 부대(부대장 대령 민기식)는 축차 지연전을 대행하여 산청에 이르렀을때 육군본부 작명 제 86호(50. 7. 27 21:00)에 의거 한국군 제 17연대 (연대장 대령 김희준)가 해지구로 약진함으로써 동 부대는 이날 늦게 진주로 진출하여 사촌리-우수리 간을 점령하였고, 나머지병력(제 1 및 3 대대)은 동 대대의 좌우에 포진하였다.
  어쨌든 이날부터 민 부대는 미 제 19연대장 무어 대령의 작전통제하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는데 병사들은 각 지구에서 모병한 까닭에 거개가 비무장이었고 계속된 전투와 행군, 그리고 보급의 불량으로 사기는 극도로 저하하고 있었다.
  또한 해병대(부대장 중령 김성은)는 이날 01:00부에 의거 민 부대로부터 미 제 19연대에 배속이 변경됨과 동시에 동 연대장 Moore 대령으로부터 신속리-망진산간의 방어를 명령받았다
  해병대는 13:40에 진주 교를 건너 진주역에 이르자 대장 김성은 중령은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미 제 19연대장으로부터 받은 방어 명령을 공격명령(실체로는 명령에 준수)으로 바꾸어 하달하여 공격명령으로 15:40에 각각 진지를 점령하였다.
  미 제 19연대 제 2대대(대대장 중령 토마스 맥그레일(Tomas M. McGrail))는 내평리-유수리간을 사수하면서 새벽부터 진지를 보강하던 중 이날 08:00에 연대로부터 일군의 적이 동 대대를 우회하여 율화리(진주 서북쪽 8km) 앞에 나가 있던 G 중대장으로부터 1개 연대규모의 적이 정곡리(유수리 서쪽 3km)로 접근하고 있다고 보고되었다.
  이리하여 대대는 초긴장 상태로 요격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 연대장 무어 대령으로부터 『귀대는 주력을 남강 북안의 평거동으로 뽑아 급편진지를 갖추고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적과 접촉시키면서 이탈하라.』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대장 무어 대령은 산청으로 이르는 통로가 막혔다는 첩보를 중시하고 서 및 남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양 대대를 뒤로 물러서게 하여 좀 더 밀도 있는 진주 방어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한편 미 제 19연대 제 1대대(대대장 중령 로버트 리(Robert L. Rhea))는 08:00부터 적의 집중포화를 받았는데 아 제 13포병대대가 즉각 대포대 사격을 퍼부어 전장의 열기는 한층 더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08:20에 1개 연대규모의 적은 판에 박은 듯이 공격준비 사격이 연신되면서 검정리-속칭 탑골 간에 전개하여 파상을 이루고 야지를 횡단하여 달려들었다.
  대대의 엉성한 산병대는 그들의 우주하는 포격으로 매몰하고, 여기에 호마다는 빗물로 가득 차 뒤범벅이 되었는데도 결전을 금강방어선에서 겪은 바 있는 병사들은 침착하게 광파를 궤멸하고 또 궤멸하였다.
  그러나 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여 계속적인 충격을 가하여 대대의 사상자는 누증하였다.
  이 무렵 연대장 무어 대령으로부터 『개장동-신속리선으로 철수하여 해선에서 적을 조지 격쇄하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리하여 대대는 지체 없이 달라붙는 적에게 일격을 가하고 그들과 이탈하여 질서있게 교외 진지를 점령하였다.

  7월 31일
  이날은 오전 한때 비가 내리고 오후부터는 개었으나 저운이 중천에 깔려 항공지원은 곤란하였다.
  적은 진지를 향하여 그들의 주력을 아의 서측으로, 그리고 일부의 병력은 북쪽과 남쪽에서 삼면으로 포위망을 압연하여 옴으로써 이날 미명부터 격전이 전개되었으나 아군은 세불리하여 진주를 추적에게 넘겨주기에 이른다.
  이에 이르자 미 제 24사단장 처치 소장은 새로히 배속(7월 30일부터) 받은 미 제 25사단 27연대(연대장 대령 존 마이클리스(John H. Michaelis))를 진동리에 배치하는 한편 진주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군북에서 일단 수습하여 급편진지를 펴기에 이른다.

 

4. 진주지구 전투의 결과

  진주에서의 공방전을 마치고 7월 31일 전후하여 삼삼오오 군북에 집결하던 한국군의 각 부대의 실태는 연결된 이합집산과 전투 및 현지에서 편법으로 주달보급 할 수밖에 없었던 부족한 식량, 그리고 병력의 20%에도 미달한 소총뿐인 장비 등으로 말미암아 이미 전력으로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처참하였다.
  그러나 잠시도 유여할 수 없었던 육군본부에서는 조속히 이들 분산된 각 부대를 단일 지휘관 밑에 통합하여 활기를 되찾고 한·미군 연합작전으로 동침하는 적에 대비하기로 결정하고 이응준 소장을 초치하여 이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진용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민 부대는 미 제 24사단 19연대와 군북선에, 그리고 해병대는 미 제 25사단 27연대와 진동리선에서 각각 협동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오부대, 이부대, 김부대는 후방지역 경계에 임하였다.
  한편 미 제 24사단장 처치 소장은 31일 밤에 중리(마산 서북쪽 5km)에서 동 사단 예하의 제 19연대장 무어 대령과 동 사단에 새로이 배속된 미 제 25사단 27연대장 마이클리스 대령을 초치하여 개방된 마산 가도로 침공하는 적을 현선에서 요격 격파하라고 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