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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논문 자료

주월 한국군의 작전개념

by 충실한 해병 2022. 12. 19.
주월 한국군의 작전
 
주월한국군은 베트남군 및 미군을 비록한 자유우방국군과 협력하여
베트남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가평정계획을 적극 지원,
우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전략개념(戰略槪念)하에서
예하부대를 지휘 운용하였다.

1. 분리

번져가는 기름방울식 공산침략을 역이용하여 물과 고기의 관계인
적과 주민을 분리 고립시켜 상호관계를 차단함으로써 적을 무력화한다.

2. 섬멸

고립화 또는 무력화된 적을 유리한 장소와 시간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화력의 집중 및 신속한 기동으로 포위 포착하여 완전 섬멸한다.

3. 지역확대

베트남군, 지방군, 민병대 및 혁명개발단과의 협조하에 최대한의 지원으로
지역을 평정하고 부단한 탐색, 포착, 섬멸작전에 의한 외곽경계의 제공으로
지역의 안전을 보장하는 동시에 평정된 지역을 베트남 정부기관에 인계하고
이미 확보된 지역을 기반으로 평정지역을 축차적으로 확대한다.



한국군의 작전방침

주월한국군은 1965년 10월부터 1개 전투사단이 참전한 이후 최초의 전술
책임지역의 방어로부터 점차 단계적인 전술을 펴 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작전방침을 세웠다.

제1단계 : 작전지역의 인수, 전술책임지역의 확보, 기지방어의 편성,
              전술기지의 구축과 방어를 위한 수색, 정찰, 매복작전.

제2단계 : 지역내 적 소탕, 방어를 위한 공세, 심리전의 강화, 전술기지 확대,
              중대-대대급 소탕작전에 의한 전술책임지역을 완전장악.

제3단계 : 예비대의 투입으로 전술지역을 확대하고 연합작전으로 적의
              대부대를 공격 소탕하며 대민사업을 강화하는 동시에 평정계획을
              적극 지원한다. 또한 전술책임지역 밖으로 원거리를 기동하여
              적의 주력과 근거지를 소멸시킨다.

제4단계 : 전술책임지역내의 소탕작전과 대민사업의 본격지원으로 베트남
              정부와 지방행정력을 완전히 복구하여 정부군과 지방군에게
              평정지역을 인계하고 새로운 목표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한다.

한국군은 이와 같은 단계적인 작전방침하에서 각급 부대 지휘관은 독창력을
발휘하여 작전종료 때마다 작전의 성과를 분석 평가하고 실전에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하여 차기 작전에 임하도록 하였다.



한국군의 주요 작전

한국군 전투부대 상륙후 초기에 수색, 정찰, 매복작전을 위주로 전개하였던
제1단계 작전기간에는 적과의 결정적인 작전계기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66년 초부터 투이호아 평야와 산악지대에서 연대급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적 제95연대를 주력으로하는 지방 게릴라부대를 약2개월여에 걸친
격전 끝에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한국군이 퀴논지역에서도 중대, 대대, 연대급 작전에서 격전을 거듭한 결과
적은 발붙일 곳을 잃고 말았다. 적은 다년간의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도전을 해보았으나 한국군에게는 당해낼 수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게된 것이다.

‘방어를 위한 공세’로 전환한 제2단계 작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1965년 12월부터 66년 2월까지 맹호부대는 빈딩성 안노군에서 실시한 제1연대의
대대급 작전인 비호1호, 2호 및 3호작전, 그리고 푸캇군 푸미지구에서 감행한
재구(在求) 2-1호작전, 비호6호작전 등이다.

기갑연대에서는 빈케지구에서 전진1호, 2호 및 3호작전, 번개66-1호작전,
화랑2호작전, 그밖에 남탕 계곡 기습작전, 빈탄 기습작전 등이 있었다.

한편 청룡부대는 판랑지구에서 까두산전투, 캄란 북부에서 번개1호, 2호, 3호작전,
투이호아 평야에서 청룡1호작전 등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제2단계 작전에서 적 사살만도 1,000여명에 이르렀고 적 수개연대를 섬멸
시켰으니 그들이 자랑해오던 게릴라전도 한국군 앞에서는 무색하게 되고 말았다.

제2단계 작전기간에는 각부대에서 부분적으로 대민지원을 하는데 그쳤고
그 범위도 민간인 치료, 양곡구호, 추수보호 정도에 머물렀으며 작전의 단계로 보아
적극적인 대민활동을 할 수 없는 시기였다.



우수성 평가받은 제3단계 작전

한국군이 베트남인이나 자유우방 원조군에게 우수하다고 평가를 받게된 것은
제3단계작전을 수행하면서 이룩해 놓은 업적에 의해서였다.
이 작전은 전술책임지역의 확장과 다른 지역에서 자유우방 원조군과의 합동작전으로
적군의 주력을 완전히 섬멸하능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 시기부터 한국군은 대민지원사업을 적극 전개하여 베트남의 평정사업을
본궤도에 올리는데 기여하였다.

제3단계 주요작전으로는 66년 3얼부터 실시한 맹호5호작전(66.3.23~26), 번개66-5호,
번개66-7호작전, 그리고 청룡부대의 청룡2호, 재건1호, 2호작전을 들 수 있다.

3단계의 작전 초기에는 격렬한 전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일 계속되었다.
작전계획에 따라 08:00시 이전에 대략 공격작전을 개시하여 주간에 목표지역을 소탕
확보하고 해가 진 후에는 야간 방어기지를 설정하여 적의 야간기습을 대비하였다.

적은 대체로 초저녁에 가벼운 기습공격으로 아군을 안심시킨 후, 야밤에 대부대가
우리의 방어기지를 습격하여 일시에 밀어붙이는 작전을 기도하였으나
우군의 강력한 각종 포지원과 각급 지휘관들의 침착한 부대지휘, 그리고 병사들의
용전분투는 일기당천의 기세로 적의 기습부대를 진전(陣前)에서 제압하고
진내(陣內)에서 육박전으로 물리쳤다.

적이 수시로 감행해 오는 파상 인해전술과 야간기습 공격은 과거 프랑스군과
베트남군 및 기타 외국군을 상대로 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전술이었다.

1966년 1월 30일 구정휴전 약속을 위반하고 청룡부대 제9, 10중대에 대해 야간 기습을
감행한 사건, 맹호부대 기갑연대 제3대대 제9중대에 대한 둑코지구 기습공격, 그리고
추라이지구 짜빈동에서 청룡 제11중대에 가해온 야간 기습공격 등은 모두 한국군의
10배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이러한 기습 공격에 대비하여 온 한국군은 적의 상투적 인해전굴을 맞이하여 밤새도록
격전을 벌여 아군의 손실의 10배를 넘는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격퇴시켰다.



‘한국군 철수 반대’ 데모하는 베트남 주민들

제4단계 작전은 TAOR내의 소탕작전과 대민건설 지원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현지
주민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베트남 정부의 행정력을 복원시킴으로써 자위대가 치안을
유지할 수 있도록 평정계획을 이룩하는데 있었다. 이렇게 자치능력을 부여한 다음
한국군 부대는 다시 새로운 적의 본거지를 찾아 이동하고 작전을 전개하여
새 지역의 평정임무를 반복해서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제4단계 작전을 보면 청룡부대는 캄란기지의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투이호아 평야에서는 적을 몰아내는 대격전을 전개하여 안정지역으로 회복시킨 후
북부 추라이의 새 작전지구로 이동하였다.

맹호부대는 빈딘성 퀴논지역의 여러 고을을 하나하나 평정시켜 베트남 정부군에게
인계하고 험준한 푸캇산을 포함한 작전지역을 계속 넓혀갔다.
이 기간중에 특기할만한 사실은 한국군이 평정사업을 하치고 철수할 때에 주민들이
지휘관에게 한국군의 장기 주둔을 진정하면서 ‘한구군 청수반대’ 데모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주민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소수부대만이라도 남겨 두었다가
서서히 철수시킨 사실이 맹호, 청룡 작전지역에서 여러차례 있었다.
한국군은 베트남정부와 미군이 수립한 작전개념을 토대로 하여 독립 및 합동작전을
수행해 왔으나 작전을 시행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특히 한국군은 전법에서 독창적인 연구를 하여 현지 실정에 적합한 전술로 적을
제압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군 작전의 특성으로서 기본이 되는 것은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창안한 ‘중대전술기지개념’이다.
이것은 자유우방 원조군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졌다.

이 중대전술기지개념은 매복작전, 동굴수색작전과 더불어 베트남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한국군의 3대 전술중의 하나이다. 이 전술의 운용은 지역의 특수성,
전쟁의 성격, 형태 등이 조화되어 거듭 발전하였다.



특수 전법 ‘중대전술기지개념’

중대전술기지개념에 대해서 미군과 베트남군 최고위층에서는 처음에 의아심을
가지고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이 이룩한 전투결과를 보고 그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둑코 전투에서 올린 맹호부대의 놀라운 전과, 짜빈동 전투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수십배의 적을 물리치고 최대한의 전과를 올린 청룡부대의 모범적 전투는
외국의 군사지도자들을 놀라게 했다.

4만여 전투병력을 가진 한국군에게 맡겨진 전술책임지역은 너무 넓고 역부족이어서
그 지역을 확보 유지하고 주민보호아 적의 대규모 기습작전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중대전술기지 개념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이 개념은 약 10㎢ 지역에 1개중대 병력으로 거점 방어를 하다가 지역내에서 수색
소탕전을 전개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전술기지는 200~300m의 다각형 방어진지로서 호를 깊게 이중으로 파고 장애물과
지뢰를 매설하여 진지를 보호하는 동시에 최소한 3일분의 식량과 탄약을 갖추고 있어
연대급 기습에도 48시간 교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외부에서 보면 대병력으로 쉽게 섬멸할 수 있는 취약한 진지로 보이지만
이 전술기지는 아군의 포지원 거리에 있으며 일단 작전이 개시되면
적의 포공격을 받아도 준비된 깊은 호에 의하여 피해를 막아낸다.

또한 인해전술로 단시간에 파상공격을 가해오는 적은 중대화력으로 이를 섬멸시키고
후속부대에 대해서는 포지원으로 차단하여 잠입한 적을 완전 고립시키고
과감한 사격과 진내전으로 격멸시킨다.

한국군은 이 전법으로 전후방이 없는 베트남전선에서 약 700㎢에 이르는 광범위한
전술책임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성과가 널리 알려지게 되자 미군지휘관들은
계속 장병들을 보내어 직접 견학을 하게 하였고 전술학 연구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베트남전에서 적국의 주요 전술은 공격하고 도망치는 Hit and Run 이다.
적은 이쪽의 허점을 발견하는 즉시 지역의 전병력을 집중하여 약 10분동안
맹공격을 가하여 인해전술로 아군을 유린하고 정글지대로 흔적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 기습작전은 약 30분이면 끝난다.

중대병력 주둔기지에서 이러한 기습을 당하면 특히 야간에는 짧은 시간내에
예비대 투입이나 병력지원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군은 전술지역을 인수하면 지체없이 전술기지를 편성하여
적이 기습을 준비하는 것 보다 빠르게 진지 구축을 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대민지원과 심리전의 병행

한국군의 작전이 성공한 것은 앞에 말한 중대전술기지 운용을 비롯한 3대전술과
대민사업, 심리전을 효과적으로 병행하였기 때문이다. 주민과 베트콩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적의 활동 근거를 봉쇄하는데 주력하였고 전장병이 심리전 요원이 되어
적극적으로 대민활동과 심리전을 전개하여 주민들과의 유대가 잘 이루어져
베트콩의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주월 한국군의 각급 지휘관들은 채명신 사령관의 방침에 따라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사람의 양민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 동조자들을 포섭하여 정부를 믿고 지지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여
대민지원과 심리전을 끈질기게 펴나갔다.

대민지원과 심리전은 건설사업과 병행하여 주로 비둘기부대에서 주력해 왔지만
전투부대가 증파된 후에도 계속해서 전투부대나 비전투부대를 가리지 않고
베트남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베트남 사람들에게 깊은 신뢰를 심어주었다.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국군의 대민사업을 지켜보던 베트남 국민도
정부의 평정사업을 돕기 위하여 한국군이 피땀을 흘려가며 일하는 것을 보고
그들도 차츰 진의를 깨닫게 되고 시일이 갈수록 베트남 각지에서 한국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한국군은 우선 같은 피부색을 가진 동양인이고 생활풍습도 유사한 점이 많아서
베트남인과의 융합이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주요 건설사업 이외에 한국군은 자매결연, 경로회 조직, 운동경기, 영화상영,
어머니 잔치, 농촌 일손돕기, 의료지원, 구호사업, 태권도 지도, 종교행사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적극적인 대민 봉사활동을 성의있게 펼쳐나갔다.

이러한 활동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널리 알려지게 되자 한국군 주둔지역에서는
베트콩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차츰 소멸되어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한국군을 믿고
친정부성향으로 돌아가 촌락재건사업이 차츰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한국군의 이와 같은 대민사업과 심리전의 성과는 급속하게 전파되어 외국기자들의
취재가 빈번해졌다. 영국의 선데이 포스트지는 한국군의 활동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만약에 한국군이 보다 일찍이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더라면 베트남은 이미 평정되었을
것이다.”라고 격찬하였다.

한국군의 전술책임지역은 베트남 총면적의 25분의 1을 차지하는 약 700㎢에 달하며
베트남의 동맥인 국도 1번도로만도 400km로서 우리나라의 서울과 부산간 거리와
맞먹는다. 한국군 지역에는 120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것은 베트남 총인구의
13분의 1로서 한국군과 끊을수 없는 유대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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