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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인천상륙작전

by 충실한 해병 2022. 12. 23.
● 전투시기 : 1950.9.15
● 전투지역 : 인천
● 주요지휘관 : 신현준 대령, 김성은 중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상 세 설 명
 
1. 한국 해병대의 편성

  한국군으로서 역사적인 인천 상류작전에 참가한 지상군은 해병대 제1연대와 육군 제17연대였다.
  통영지구에서 수훈을 세운 해병 제1연대는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의 직접 지휘하에 제주도에서 약 3,000명의 신병을 모집하고 또한 김성은 부대의 장병 2개중대로서 보강하여 1개연대를 편성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9월 6일 부산에 집결한 다음 미 제5해병연대와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위한 단기간의 특수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9월 11일까지는 모든 출동준비를 완료하였다.


2. 해병대 인천 상륙작전의 진행과정


  9월 3일 미 극동군사령부는 한국 해병대를 미 해병사단에 배속하기로 결정했다. 낙동강 돌출부에서 북한공산군의 진출을 막아낸 미 제5해병연대가 9월 5일 밤 부산으로 나오는 것과 때를 맞추어 한국 해병대도 같은 시각에 부산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고 해군함정으로 이동했다. 9월 5일 밤 자정을 넘긴 다음 비를 맞으며 전선을 빠져나온 미 제5해병연대는 6일부터 부산에 닿기 시작하여 7일까지 모두 이동을 마쳤다. 지난 8월 6일 마산 서쪽의 진동리 전투에서 첫 접촉이 있었던 한·미 해병들은 이 두 번째의 만남으로부터 전우의 관계를 다지게 되었으며, 출동의 시각이 다가오는 가운데 미 해병대는 각 대대에서 우수한 하사관들을 뽑아 한국 해병대의 편성과 사격훈련을 지도했다.
  해병대는 이때부터 미 해병대와 비슷한 편제와 장비를 갖추었다. 보병은 M1소총과 BAR 자동소총, 그리고 카빈 소총을 받았고, 소총중대는 공용화기로서 구경 30경기관총과 60mm 박격포를, 그리고 그때가지 이름뿐이었던 각 대대의 화기중대(제4·제8·제12중대)는 81mm 박격포, 2.36? 또는 3.5?대전차 로켓포, 구경 50중기관총 등을 갖추었다. 또 3개 기동 및 1개 화력조를 갖는 미 해병대식의 분대편성을 처음으로 채택했으며, 이러한 전술편성의 기본원칙에 따라 각급 제대가 편성되었다. 그러나 해병대대는 기본 전술편성에 덧붙여 헌병, 식량과 탄약보급을 맡은 “작업소대”가 있었을 뿐 전투 및 근무지원을 떠맡을 부대가 전혀 편성되어 있지 않았다. 3개 대대를 거느릴 연대 단위의 지휘 기구를 대신하여 해병대사령부가 그 역할과 기능을 수행했고, 그리하여 미 해병대는 한국 해병대를 “한국 해병연대” 또는 “한국 제1해병연대”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다.
  한국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서 떠맡을 임무는 “최초 미 제1해병사단의 예비가 되며, 적색해안에 상륙하여 미 제5해병연대와의 협조 아래 인천시가지 점령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상륙을 개시하는 날 아침 미 제5해병연대는 월미도에 맨 먼저 1개 대대를 상륙시킨 다음 나머지 2개 대대만으로 저녁 무렵에 적색해안으로 상륙해야 했다. 따라서 첫날의 선봉격인 미 제5해병연대는 한국 해병대로부터 1개 대대를 받아들여 예비대대의 임무를 맡기도록 한다. 한국 해병대는 나머지 2개 대대만으로 해병사단의 예비대가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한국 해병대는 이러한 계획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명령과 지시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는 일정에 맞추어 움직여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군사기밀의 보완을 위해 작전의 목적과 계획 등 구체적인 명령의 하달이 최대한 늦추어진 것은 미 해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상륙용 주정을 운전하는 기관병은 공격개시 하루 전인 9월 14일에도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미 해병사단에서 파견된 연락장교 해그너 중령은 사실상 한국 해병대 사령부의 수석고문관과도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그는 한국 해병 3개 대대들 가운데 사격성적이 뛰어났던 제3대대를 미 제5해병연대의 예비대로 뽑아 첫날에 상륙하도록 하였다.
  한국 해병대와 미 제5해병연대는 부산항에서 APD 3척, LSD 1척, APA 4척, 그리고 LST 12척에 올라 출항할 예정이었다. APD와 LSD는 월미도에 상륙할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를 실어 선견부대를 구성할 함선들이었다. 한국 해병대의 출동병력은 2,786명이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APA "파카웨이“호에 올랐다. 이 함선은 중장비를 뺀 1개 대대 상륙단(BLT)을 싣고 자체 보유 상륙주정(LCVP)으로 적전상륙을 감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병력수송용 상륙함선이었다. 원래의 수송능력은 1,600~2,000명이었으나 한국 해병을 위하여 2,412명의 수용공간이 마련되었다. 그 밖에 장교 6명을 비롯한 220명이 LST 1척에, 장교 1명과 사병 50명으로 편성된 3개의 탑승조는 미 제5해병연대가 타기로 된 3척의 APA에 나누어 타기로 했다. 이들은 모두 제2대대였는데 한국 해병대에 할당될 보급품의 양륙을 떠맡았다.
  9월 11일 한·미 해병부대는 첫 작전회의를 미 제5해병연대본부에서 열었는데, 미 해병여단장 크레이그(Edward A. Kraig) 준장과 한국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이 제한된 수의 참모와 예하 지휘관들만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이 작전의 의의를 강조하고 선전을 당부하는 크레이그 준장의 인사말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장인 머리 중령이 회의를 이끄는 가운데 작전의 대강과 함께 그 가운데에서 한국 해병대가 맡을 임무를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회의가 끝나자, 한국 해병의 선두로 상륙하게 된 제3대대장 김윤근 소령은 머리 중령에게 “인천에 가서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며 손을 잡았다. 이때 머리 중령은 그의 손가락을 다문 입술 위에 대 보이며 보안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부산출항 이후 바다 위에서 세 번째 밤을 보낸 해병들은 함내와 갑판 위를 쓸데없이 왕래하지 말라는 주의사항과 수많은 통행제한으로 대부분 침실에서 지냈으나 일부 병사들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여 간간히 갑판 위를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공격함대의 함정들이 인천수로의 입구에 모여든 9월 15일 이른 새벽, 요란한 포성과 비행기의 소음에 잠을 깬 병사들은 비로소 상륙이 개시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윽고 손제독은 함내의 방송을 통해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었음을 알려주면서 이제부터 장병들이 용감히 싸워줄 것을 당부했다. 이른 아침 미 해병대의 월미도 상륙에 이어 14.45시 미 제5해병연대의 주력 2개 대대가 APA 헨리코호와 캐벌리어 호에서 하선망을 타고 내려와 LCVP로 옮겨 탔다. 이 연대의 예비대가 된 한국 제3해병대대도 파카웨이호에서 LCVP에 옮겨 탔다. 바다를 뒤덮다시피 한 수백 척의 상륙용 주정들이 공격개시선을 차례로 넘어섰다. 이날 인천 앞바다에 모인 유엔군의 함대는 모두 8개국에서 나온 26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한국 해군은 15척의 함정을 참가시켰다. 그 가운데 9척은 덕적도에, 6척은 청도에 집결했다.
  미 제5해병연대의 예비대인 한국 제3해병대대는 15일 저녁 미 해병 2개 대대의 뒤를 이어 적색해안에 상륙한 다음 대한제분 쪽으로 철길을 건너 응봉산 서쪽 발치에서 밤을 새울 준비에 들어갔다. 한국 해병대의 나머지 부대들은 어둠이 짙어질 무렵에 뭍에 올라 공동묘지에 가까운 북쪽 바닷가에 모여 밤을 새웠다. 손원일 소장도 한국 해군과 해병대 상륙이 개시되는 단계에서 직접 이 부대들을 지휘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수도탈환의 제1선에 나선 병사들과 잠시나마 호흡을 같이하기 위하여 뭍에 올랐다. 상륙 다음날인 16일 미 제5해병연대와 제7해병연대가 동쪽으로 나란히 밀고 나가면서 교두보를 넓히고 있을 때, 한국 해병대사령부는 인천시가의 소탕작전을 맡았다. 시가지에 동서로 가로놓인 철길을 경계로 하여 남쪽의 응봉산 일대와 도심지역을 제3대대가, 북쪽의 공장지대를 제1대대가 각각 떠맡았다. 살아남은 공산군은 대부분 인천을 벗어나 달아난 듯했으나, 더러는 민간인으로 모습을 바꾸어 시가지에 숨어 있다가 소탕작전을 편 국군에게 손을 들어 투항하기도 하고 더욱 많은 숫자는 서투르게 저항하거나 달아나다가 사살되었다.
  철길 남쪽을 맡은 제3대대는 다시 맨 북쪽의 철길 언저리를 제9중대가, 맨 남쪽의 도심으로 뻗어 있는 주택가를 제10중대가, 그리고 한복판의 응봉산 공원 일대를 제11 및 제12중대가 맡아서 소탕작전을 벌였다. 제10중대는 하인천역으로부터 중국인 거리, 홍예문에 이르는 지역을 훑어 나아갔는데 그 무렵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중국인들 가운데에는 끝까지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으레 집안에 모택동의 사진을 걸어놓고 있었다고 한다. 경찰서를 점령한 해병들은 공산집단이 수많은 시민들을 참혹하게 죽여 놓은 광경을 보고 치를 떨었다.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 숨어있던 시민들은 국군이 들어오자 밖으로 뛰쳐나와 저마다의 맺힌 한과 설움을 터뜨렸다. 어느 새인지 시가지 곳곳에 태극기의 물결이 불어나고 시민들은 스스로 반역자들을 찾고 가려내면서 국군의 소탕작전과 치안을 도왔다. 지하에 숨어 있었던 청년들은 하얀 얼굴에 머리가 길었고, 적의 무리들은 사투리를 쓰거나 짧은 머리칼 또는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어서 쉽게 구별이 되었다고 한다. 이날 오후 도심지역에서 소탕을 마친 제3대대는 배다리 시장 부근으로 빠져 경인국도를 따라 나아가다가 공설운동장 옆의 도원공원에 집결했다.
  한편 한국 제1해병대대는 주택이 적고 공장이 많이 모여 있는 철길 북쪽에서 비교적 순조롭게 소탕작전을 폈다. 철길을 따라 만석동·화수동 일대를 거쳐 오전 중에 중림동까지 나아갔으며 제3대대와 거의 같은 시각에 임무를 마쳤다. 제1대대는 인천시가의 동쪽으로 좀 더 나아가서 동산공원(오늘의 선인학원) 일대에 방어진지를 파고 밤을 새울 준비에 들어갔다. 교외로 피난했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오는 시민들 속에 적군이 섞여 잠입하는 것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해병대사령부와 제2대대는 오후 늦게 인천상업중학교로 자리를 이동했다. 제3대대는 도원공원에 모였다가 저녁 늦게 경인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서 도화동에 이르러 밤을 지낼 숙영지를 잡았다. 이것은 미 제5해병연대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미 해병연대의 진출에 맞추어 다음날의 작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해병대는 시내의 주요 공공시설을 장악하고 중요한 지점에 대하여 경비와 순찰을 강화했다. 하루빨리 민생이 안정되고 치안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시민들은 국군의 작전에 자발적으로 호응하여 적극 협조했다. 국군은 하루의 소탕에서 181명의 적군을 사로잡고 그밖에 많은 수의 적을 사살했으며 상당한 분량의 무기를 빼앗았다.
  상륙부대가 해두보선을 확보하고 국군 해병대가 인천시내의 안정을 회복하자, 크레이그 준장이 지휘하는 해병사단의 전방지휘소는 월미도로부터 인천 남동쪽 교외로 옮겨 나왔다. 16일 오후 스미스 소장은 맥아더 원수와 도일 제독에게 작별을 고한 다음 마운트 매킨리호를 떠나 인천 내항의 부두로 상륙하여 지상 작전에 관한 모든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3. 인천에서 한강으로

  미 제5해병연대는 김포비행장을 공격하기에 앞서 16일 밤 자정이 가까울 무렵 작전 명령19-50호를 하달했다. 미 해병연대에서 연락장교로 나와 있던 데이비스 대위를 통하여 대대장 김윤근(金潤根) 소령에게 전달된 작전명령에 따르면 한국 제3해병대대는 부평 시가 서쪽의 조병창 일대와 그 언저리의 주택가를 수색 소탕하고, 부평시가 북쪽의 계산동(桂山洞:옛날의 부평)과 다시 그 서북쪽에 둘러선 계양산 일대를 점령한 다음 계속하여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미 해병 연대의 북쪽 측방을 맡아 지키게 되어 있었다.
  17일 04:00시 제3해병대대는 도화동 숙영지에서 도로행군을 개시했다. 며칠째 우중충한 날씨였으나 경인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가는 사이 어느덧 날이 밝아왔다. 석바위〔石岩里〕를 지나면서 병사들은 질기에 부서져 있는 적 전차를 보았다. 이들이 6킬로미터쯤을 걸어나와 미 제5해병연대 제22대대가 배치되어 있을 “ 원통이고개” 에 이른 것은 06:00 시쯤이었다. 때 마침 미군들은 북한공산군의 T-34 전차 6대와 그 옆을 따라오던 적 보병 200명쯤을 방어진지 가까이로 끌어들인 다음 2.36인치 및 3.5인치 로켓포, 75밀리 무반동총 등으로 통렬한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한국 해병의 종대(縱隊)를 이끌며 선두에 나섰던 제10중대 2소개 첨병들은 겹겹이 배치된 미군의 대전차방어선에 다다랐다. 바로 그때 4명의 첨병조는 우연스럽게도 약 150미터 앞쪽의 도로와 콩밭 사이에 우람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직감적으로 그것이 적의 전차임을 깨달았다. 이들을 바짝 뒤따르던 소대선임하사관이자 제1분대장인 임경섭(林炅燮) 삼등병조(三等兵曹)는 중대 로켓포 사수를 찾아 사역을 하도록 명령했으나 장탄(裝彈)이 더딘 것을 참지 못하고 그 스스로 2.36인치 포를 조준하여 1발을 쏘았다. 포탄이 날아가는 것은 보았으나 어수선한 가운데 이내 정신을 빼앗겨 그 결과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윽고 적의 전차들이 1대도 남김없이 부서지고 전국 200여 명의 시채가 원통이고개에 즐비하게 쌓인 가운데 전투는 끝이 나고 말았다. 이곳에 나타났던 적의 T-34 전차는 9월초 신의주에서 서울로 내려온 북한 제43기계화 또는 전차연대 소속으로서, 이 연대는 북한 제 18사단에 배속되어 있었고 모두 18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미 해병대가 북한공산군의 역습을 무찌르고 난 다음, 한국 재3해병대대는 07:00시부터 다시 원통이고개에서 북쪽을 향해 행군을 개시하여 부평 시가로 향했다. 미 해병들의 진출에 앞서 부평 일대를 탐색할 임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제3대대는 제9중대를 왼쪽 제1선에, 제11중대를 오른쪽 제1선에, 그리고 제10중대를 예비로 하여 한복판에서 조금 뒤처져 따라오게 하는 대형을 갖추어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제 11중대 2소대는 맨 앞에서 철길을 따라 부평역을 향해 나아가다가 바로 앞 북쪽에 있는 37고지로부터 적의 자동화기 공격을 받았다. 소대장 육동욱(陸東旭) 소위는 화차 뒤에 몸을 숨긴 다음 소대원들과 함께 화차를 밀고 전지하다가 카빈 소총을 쥐고 있던 왼손에 적의 사격을 받아 경상을 입었다. 적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가운데 국군은 철길을 따라 퍼지며 전개했다. 지형적으로 불리한데가가 화력을 제대로 집중시키지도 못한 채 국군은 1명이 죽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적을 제대로 몰아내지도 못하였다.
  부평역 북쪽에서 적의 사격소리가 나자 이를 신호로 삼은 듯 조병창의 서쪽 46고지에서도 적의 자동화기가 불을 뿜으며 제9중대를 멈춰 세웠다. 제9중대는 이대 탁 트인 평지에 있었으나 적으로부터 300미터쯤 떨어져 있어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길둑 뒤에 몸을 가리고 경기관총을 설치한 다음 침착하게 응사했다. 그러나 별다른 전술훈련을 미리 받지 못한 채 싸움터에 나선 해병들은 미숙한 점이 많아서 사격하는 적군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진출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미 제5해병연대의 예비대인 미 제3대대가 군군 제3대대를 도와 적을 몰아냈다. 특히 미군 G중대는 국군 제9중대의 서쪽에서 137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46고지의 서쪽 옆구리를 공격하여 미군 3명이 다치는 손실을 입어가며 적 46명을 죽이는 전과를 거두었다. 남은 적들은 달아났다.
  한편 미 제5해병연대 제2대대는 한국해병보다 1시간 늦게 원통이고개를 넘어 부평역의 동쪽을 향해 밀고 나아갔다. 이들을 돕던 미군 전차가 부평역 일대로 쳐들어가자 그 언저리에서 저항을 계속하던 적들은 황급히 도망하거나 주택갈 숨어들었다. 이날 오전 한국 제3해별대대는 미군이 부평시가를 벗어날 때 까지 기다리면서 미군 전차와 함께 시가지에 남은 적들을 소탕하다가, 오후 늦게 부평시가를 벗어나 북쪽에 있는 효성리(曉星里)와 그 마을의 뒷산인 130고지까지 나아가 그날 밤을 보냈다.
  스미스 소장은 인천시의 시정(市政)을 빨리 복구하라는 성부의 지시를 받고 시장적임자를 몰색하던 끝에 손원일 제독의 추천에 따라 표양문(表良文)씨를 임시시장으로 임명했다. 표씨는 북한공산군에세 붙잡혀 갇혀 있다가 풀려난 지명(知名)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9월 18일 오전 인천시장의 취임식이 시청의 좁은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인천시가의 치안과 경비를 맡고 있던 한국 제2해병대대에서 뽑은 의장대가 경비를 겸하여 식장 주변에 도열했다. 애국가 봉창에 이어 국문과 영문으로 된 상륙군사령과 명의(名儀)의 임시시장 임명장이 낭독되었다. 표시장, 스미스장군, 손제독이 차례로 짧은 인사말을 한 다음 손제독의 선창으로 대한민곡의 번영와 유엔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하는 두 차례의 만세 삼창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 조촐한 행사의 마지막 식순이었다. 미 제2공병특수여단의 통제 아래 항만시설을 복구하고 양륙작전을 일원화하여 18일부터는 전술적 상황을 고려한 필요없이 물자의 일방양륙(一般揚陸)과 제 10군단의 후속부대인 미 제8보병사간의 행정상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미 제5해병연대가 부평 거리를 기나 곧장 김포비행장을 공격하기 시작할 즈음. 미 제1해병연대는 경인국도와 철길을 따라 영등포 족을 향하여 밀고 나아갔다. 이때 미 제 5해병연대장인 머리 대령은 자신이 이끄는 제5연대의 왼쪽 측방이자 해병사단의 맨 왼쪽 측방이기도 한 김포반도 쪽의 드넓은 개활지에 신경을 쓰면서, 자신이 제5연대가 김포비행장을 공격하고 이어서 한강나루에서 도하작전을 펴는 동안 이곳 개활지 쪽의 경계를 사단에서 맡아달라고 사단장에게 건의했다. 제5연대가 김포비행장 쪽으로 주력을 모우고 나면 이 넒은 지역을 한국 제 3해병대개가 맡아야 하는데, 자신이 계속하여 이를 작전통제하기가 어려우리라는 것이었다. 인천 상륙을 계획할 무렵부터 미군의 고위 지휘관들은 북한공산군이 남쪽으로부터 올라와 상륙부대에 대항해 올 가능성을 경계한 반면 적의 증원부대가 북쪽에서부터 내려올 가능성은 별로 중시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한·미 해병대가 부평시가에서 적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고 있을 무렵부터 유엔 정찰기들은 김포반도 쪽 한강 하류의 남과 북 양쪽 강가에서 적의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던 것이다. 얼마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무렵 북한공산군은 황급히 서울의 방어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북한 제107보안연대를 김포반도에 전개시키려 했던 것이다. 미 해병사단장은 머리 대령의 건의를 받아드려 제5연대로 하여금 김포비행장을 점령하고 한강 도하지점을 확보하는 데에만 모든 힘을 기울이도록 하는 동시에 한국 해병대가 드넓은 김포반도의 평야지대에 대한 경계책임을 맡도록 했다.
  17일 오후 한국 해병대사령부는 작정명령 제16호를 하달했다. 이에 따르면 9월 17일 17:00시까지 인천시가의 소탕작전을 일단 마무리한 한국 제2해병대대는 앞으로도 얼마 동안 미 제2공병특수여단의 작전통제 아래 인천시가의 경비와 치안을 떠맡기로 하였다. 한편 제1대대는 해병대사령부와 함께 부평시가의 북쪽에 있는 계산동으로 진출하기로 하였다. 때를 맞추어 미 제5해병연대에 배속되어 있던 제3대대가 배속에서 풀려나 되돌아오기로 되어있었다. 해병대사령부는 제1대대와 제3대대를 통합하여 지휘하면서, 미 해병사단의 왼쪽 측방을 방어한다는 것이었다. 미 해병사단은 제5연대에서 2개의 해안사격 통제반을 구성하여. 이제부터 단독으로 작전하게 되는 한국 해병의 2개 전방대대에 각각 1개 반씩 배치했다. 특별한 교육을 받은 미 해병의 탄착수정조(彈着修正組)와 미 해군의 해안사격 통제반은 지원받는 부대의 제1선에 나아가 지원해주는 부대와 직접 통신망으로 교신하면서 함포사격지원을 통제했다.
  9월 18일 오전, 미 제5해병연대에의 배속에서 풀려난 한국 해병 제3대대는 효성리에서 공격을 재개하여 고성산(古城山)을 점령한 다음 박촌리(朴村里)쪽으로 올라갔다. 제3대대에 나와 있던 미 제5해병연대의 연락장교는 되돌아가고 그에 대신하여 미 해병사단에서 해리슨 중령이 새로이 파견되어 나왔다. 당시 한국 해병대대의 참모편성을 보면 인사장교는 보직되어 있었으나 작전장교는 그렇지를 못했다. 다만 제2대대에는 작전장교가 보직되어 있었는데, 그마나 작전출동에 바로 앞서 해군으로부터 받아들인 경우였다. 작전담당 참모가 비어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 무렵 한국해병의 작전태세가 얼마나 미비했었는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해병연대나 해병사단에서 나온 연락장교들은 국군부대의 작전고문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날 해병대사령부는 제1대대와 함께 인천을 떠나 전진하면서 주안(朱安)으로부터 부평까지의 사이에서 수색작전을 벌였다. 적은 남은 무리들이 이따금 저격 도는 교란작전을 벌여 아군의 후발병참선을 위협하고 있어서 이들을 찾아내어 소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 이다.이날 해병대사령부는 이미 제3대대가 거쳐 간 계산동으로 이동했고. 제1대대는 십정동(十井洞)과 청천리(淸川里)를 거쳐 북으로 훑어 올라가면서 계산동의 서쪽으로 4킬로미터쯤 떨어진 연희리(連憙里) 일대에 전개했다. 이날 저녁까지 한국 해병대는 제10군단 작전지역의 맨 북쪽 통제선으로 진출하여 측방지역에 대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상륙부대의 맨 앞장에 서서 서울을 향해 밀고 나아가는 제1선 전투부대는 미 해병사단 예하 제5연대의 2개 연대뿐이었다. 9월 19일에는 이들 두 연대에 더하여 미 제7보병사단 예하의 제7보병연대가 비로소 전선에 투입되었다. 19일 미 제5해병연대는 김포비행장의 북쪽으로 올라가 한강의 남쪽 둑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벌여 개화산(開化山)언저리의 마을과 고지들을 확보한 다음 물을 건너갈 준비를 하기 위하여 한곳으로 집결했다. 한편 미 제1해병연대는 경인국도와 철길을 따라 오류리(梧柳里)를 지난 다음 그 동쪽의 덕고개〔德峴〕에서 밤을 지낼 준비에 들어갔는데, 이곳에서는 그 앞에 펼쳐진 안양천(安養川) 하류와 그 너머로 영등포 시가를 굽어 볼 수 있었다. 이날 처음으로 제1선에 나선 미제32보병연대는 미 제1해병연대의 오른쪽 측방으로 전개했다. 이 연대의 병력은 모두 5,114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1,873명이 “크로마이트” 작전을 위해 미군부대에 편입된 국군장병이었다. 이날 저녁부터 미 제7보병사단은 경인국도를 경계로 하여 그 남쪽지역에서의 작전책임을 떠맡았다.
  같은 날인 19일 한국 해병대는 미 제5해병연대의 서쪽에서 그 연대와 나란하게 한강선까지 올라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말하자면 미 해병대의 주력이 한강을 건너기로 되어 있는 지점을 엄호하기 위해 그 왼쪽 측방으로 전개하게 된 것이다. 해병대사령부는 무엇보다도 먼저 전방의 한강선과 후방의 부평·인천지역을 잇는 병참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제1대대로 하여금 전날에 점령한 맨 서쪽의 연희리 일대에 머물러 경계를 계속하도록 하였다. 제3대대는 도성간과 박촌리 일대에서 다시 북쪽으로 3킬러미터쯤 밀고 올라가 장기리(場基里)에 제10중대를 펴놓고 다시 고촌(孤村) 일대로 올라갔다. 이날 오후 제3대대는 서울~김포를 잇는 도로의 요지인 천등고개와 한강을 굽어보는 96고지를 손에 넣음으로써 도하지점을 엄호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음은 물론, 김포반도 쪽으로는 약 12킬로미터의 방어 정면을 떠맡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제2대대는 이날 오후 인천시가지의 경비책임에서 풀려나 그때까지 하역작업을 하고 있던 제7중대만을 인천에 남겨놓은 채 대대의 나머지 주력을 이끌고 김포비행장으로 옮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