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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원산-함흥지구 전투

by 충실한 해병 2022. 12. 23.
● 전투시기 : 1950.12.3-12.15
● 전투지역 : 함남 함흥, 원산
● 주요지휘관 : 신현준 준장, 고길훈 소령, 염봉생 소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상 세 설 명
 
1. 원산-함흥지구 전투의 개요

  국경에까지 진격하던 아군이 중공군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인해 철수하면서, 함흥과 원산은 철수를 위한 교두보가 되었다.
  동부전선의 미군과 한국군은 원산과 함흥을 통해 철수하기 위하여 이동하였으며, 적은 이를 포위 공격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 있었으나, 한국군 해병대(사령관 준장 신현준)는 원산과 함흥의 최종 방어부대로써 철수하는 아군을 방어하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마침내 원산과 함흥을 통한 철수작전이 끝나고 한국군 해병대 역시 선박과 항공기를 이용하여 철수함으로써 철수작전은 끝나게 되었으며, 이후 해병대는 후방에서 차후의 작전을 도모하였다.


2. 원산-함흥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해병대 사령관 준장 신현준
제 1대대장 소령 고길훈
제 1중대장 중위 정만진
제 2중대장 중위 김광식
제 3중대장 중위 이봉출
화기중대장 중위 고상하
제 2대대장 소령 염봉생
제 5중대장 중위 심포학
제 6중대장 중위 박성철
제 7중대장 중위 정광호
화기중대장 중위 서정남
제 3대대장 소령 김윤근
제 9중대장 중위 황 영
제 10중대장 중위 종덕원
제 11중대장 중위 박동열
화기중대장 중위 임동근
제 5대대장 중령 김대식
제 21중대장 중위 안창관
제 22중대장 중위 한예택
제 23중대장 중위 권석기
화기중대장 중위 민용식

*적군
북한군 및 중공군 혼성부대 1개 사단


3. 원산-함흥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가. 전투 전의 개황

  1950년 11월 21일, 미 제 10군단 예하의 미 제 7사단이 혜산진을 점령하고, 미 해병 제 1사단이 장진호까지 전진하여 압록강을 목표로 진격할 태세를 갖춤으로써, 조국통일을 눈앞에 보는 듯 하였으나 중공군의 불법침략에, 12월 2일부터 미 해병 제 1사단이 철수를 시작하였고, 동부전선의 전한국군 및 UN군도 함흥과 원산일대의 교두보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해병대(사령관 준장 신현준)는 미 제 10군단(군단장 소장 아몬드(Edward M. Almond))에 배속되어, 주력으로써 원산을 방어하고, 제 3대대(대대장 소령 김윤근)로써 동양(원산 서쪽 45km)까지 전진하였으나, 급변하는 전황에 대처하여 12월 2일, 사령부와 제 2, 제 5대대는 함흥으로 이동하였고, 제 3대대는 12월 3일, 마전리(원산 서쪽 26km)로 이동한 다음, 다시 원산으로 전진하여 제 1대대와 합세하게 되었다.
  한편 원산부근의 적정은 북공군 3,000명이 덕원군 일대에서 원산을 위협하였고, 1개 사단 규모의 북한군과 중공군의 혼성부대가 내륙산악지대로부터 마식령(원산 서쪽 25km)에 근박하였으며, 이러한 적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증강되었다.

  나. 작전계획

  12월 3일 현재, 해병대는 함흥에 사령부와 제 2, 제 5대대, 원산에 제 1대대, 마전리에 제 3대대가 각각 배치되어 있었고, 이때 미 제 3사단은 미 제 10군단의 예비대로써 일선에 이르는 주보급로와 군단의 후방지역을 방어하고 있었으므로, 해병대는 미 제 3사단의 작전통제 아래에 있었다.
  함흥에 전진한 해병대의 임무는 미 제 3사단의 작명 제 38호에 따라, 함흥교두보의 남쪽을 방어하고, 미 제 3사단 예하인 제 7연대의 이동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이때 함흥으로 이동중인 미 제 7연대는 이미 흑수리(함흥 서북쪽 25km) 근방에서 중공군과 교전상태에 있었으며, 내륙으로부터 동진한 중공군은 지경-흑수리 간의 도로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사령관 신현준 준장은 부여된 임무와 상황을 검토한 다음, 교전중인 미 제 7연대를 우선 1개 대대로 증원하는 한편, 1개 대대는 지경(함흥 서남쪽 10km)에 배치하여 지경-흑수리 간 남쪽 기동로를 방어키로 하고, 12월 3일, 작명 제 44호를 하달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작전명령 제 44호
『① 부대는 미 제 7연대를 증원하고, 미 제 3사단과 합동으로 지경-흑수리 간의 남쪽 기동로를 방어하려 한다.
② 제 2대대는 지경에 이동하여 부여된 지역을 방어하라.
③ 제 5대대는 흑수리에 이동하여 미 제 7연대장의 지휘를 받으라.
④ 사령부는 지경국민학교에 위치한다.』


  다. 원산-함흥지구의 전투

  12월 3일
  작명 제 44호에 따라, 제 5대대(대대장 중령 김대식)는 이날 04:00에 함흥에 도착하여 부대를 정비할 여유도 없이 다시 흑수리로 전진하여 미 제 7연대에 배속되었다. 이어서 이날 13:00에 사령부와 제 2대대(대대장 소령 염봉생)는 지경(함흥 서남쪽 10km)으로 출발하여, 사령부는 지경국민학교에 설치하고, 제 2대대는 제 5중대(중대장 중위 심포학)를 지경 남쪽 신흥리에 배치하여 남쪽에 대한 적정을 수색케 하고, 대대(-)는 추하리(지경 서쪽 3km)에 배치하여 서북쪽을 방어하였다.

  12월 4일
  이날 제 7중대(중대장 중위 정광호)의 정만수 소위는 남쪽으로부터 소수의 북한군이 침습하고 있다는 첩보에 따라, 대원 5명을 지휘하여 남쪽고지 일대를 수색하였으나 접적치 못하였다.
  한편 사령관 신현준 준장은 연포(함흥 남쪽 12km)로 침습하는 적을 저지하라는 미 제 3사단의 작명에 따라 사령부를 다시 구만리(연포 서북쪽 6km)로 이동하고, 제 2대대의 재배치를 명령하였다. 따라서 제 2대대는 16:30에 CP를 구만리로 이동하고, 제 5중대를 포항리(연포 서쪽 6km)에 배치하여 연포를 방어토록 하였으며 제 6중대(중대장 중위 박성철)는 향중리(지경 남쪽 6km)에, 제 7중대는 그 동쪽인 장문리에 각각 배치하여 서쪽의 미 제 3사단 15연대와 연결토록 하였다.

  12월 5일
  미 제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이날 함흥지역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작명 제 9-50호를 하달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함흥과 흥남을 중심으로, 그 동북쪽은 제 1군단이, 그 서쪽은 미 제 7사단이, 그리고 그 서남쪽은 미 제 3사단과 미 해병 제 1사단이 각각 방어토록 되었고, 해병대는 미 제 3사단의 작전통제아래, 지경남쪽의 방어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 제 3사단을 제외한 일선 부대들은 중공군과 격전을 치루면서 함흥을 향하여 철퇴 중이었으므로 이러한 방어진지는 아직 구축되지 않고 있었다.

  12월 6일
  원산의 제 3대대는 이날 새벽, 제 9중대(중대장 중위 황 영)로 하여금 장덕리(원산 서남쪽 3km)와 방하산리(원산 서쪽 2km) 일대를 수색케 하였던바 적은 아직 원산시내에 공격을 개시하지는 않고 있었다.
  한편, 지난 12월 3일, 미 제 7연대를 증원하기 위하여 흑수리에 출동하였던 제 5대대는 임무를 완수하고 이날 함흥에 도착 즉시로 시내의 경계임무를 맡았으며, 사령부는 서흥리(연포 남쪽 2km)로 이동하였다.

  12월 7일
  원산을 위협하던 적은 이날 덕원의 외곽고지를 모두 점령하고 원산시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또한 마식령을 넘은 중공군도 이미 원산의 동측에 육박하였으며, 더욱이 원산시내에서는 적 패잔병으로 구성된 듯한 게릴라까지 출몰하기 시작하여 시민들은 아군진지에 모여서 부대의 동세만을 주시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전화아래에서 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제 3대대는 이날 원산 북방방어선에서 원산부두에 철수하여 이동할 준비를 하라는 미 제 3사단의 작명에 따라, 제 10중대, 대대본부, 제 11중대 및 화기중대 순으로 이동을 시작하였고, 제 9중대는 대대의 이동을 엄호하기 위하여 시내로 침입하는 적을 저지하고 있던 중, 11:00에 이르러, 박격포로 무장된 1,000명 규모의 적이 중대의 진지에 침공함으로써, 중대원 111명은 중대장 황 영 중위의 지휘아래 14:00까지 4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적을 격퇴하고 적 사살 15명, 부상 40명을 내게 하는 동시에 소총 20정, 실탄 30발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중대도 부상 8명의 손실을 입었다.

  12월 8일
  전날 밤과 이날 새벽 사이에 적의 전쇄부대는 원산 서북쪽으로 침입하여 시내 일원을 점령하였고, 10:00에는 주력이 원산 서측 고지를 모두 점령함으로써, 원산은 완전히 적의 장악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제 1대대(대대장 소령 고길훈)는 비행장을 중심으로 적의 침공을 저지하면서 우군부대의 이륙을 엄호하는 한편, 비행장 시설을 반출하는 작업을 지원하였고, 이날 18:00에 각 중대의 수색분대와 제 3중대(중대장 중위 이봉출)의 1개 소대는 이미 적이 점령한 원산시내에 돌입하여 적을 교란하는 과감한 위력수색전을 전개하였다.

  12월 9일
  북한군의 도당부를 비롯한 행정기관은 원산에서 이미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제 1대대는 이날 갈마반도의 비행장에서 마지막 우군부대가 떠남으로써 방어임무를 끝마치고, 16:00에 갈마반도의 이른 바, 명사십리 해안에 집결하여, 20:00부터 제 1중대는 LST 898함에, 제 2, 제 3, 화기중대 및 대대본부는 LST 973함에 각각 탑승하여 20:30에 최종적으로 원산만을 출항하였다.
  한편 함흥지역에서는, 미 해병 제 1사단이 장진호로부터 격전을 거듭하면서 중공군의 포위를 돌파하고 함흥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미 제 10군단의 함흥방어 계획에 따라 예하의 제 1연대는 지경에, 제 5, 제 7연대는 연포비행장부근에 각각 배치하였다.

  12월 10일
  함흥에 근박하고 있는 중공군은 수적으로는 우세하다 할지라도 장비는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해병대는 이러한 적의 약점을 이용하여 야간에는 가급적 적을 근접시킨 다음, 집중사격을 가함으로써 적을 섬멸하는 방식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날 제 2대대는 방어진지를 보강키 위하여 전방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유선을 가설하여 적의 인해전술에 대비하였다.

  12월 11일
  미 제 10군단의 명령에 따라, 이날부터 한국군 제 3사단과 미 해병 제 1사단은 탑재를 개시하였으며, 이동계획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제 2대대의 정보수색대는 이날 14:00에 초원(지경 남쪽 30km) 일대를 수색 중에, 적의 정찰대와 불시에 교전하여 3명을 사살하고, 2명을 사로잡았으며, 경기 1정과 소총 1정을 노획하였다.

  12월 12일
  해병대는 제 2대대가 지경 남쪽의 방어선에서, 제 5대대가 함흥에서 각각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12월 13일
  이날 해병대는 미 제 3사단으로부터 부대 이동을 위한 준비명령을 받고, 사령관 신현준 준장은 곧 작명 제 46호를 하달하여 이동준비에 착수토록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작전명령 제 46호
『① 부대는 현 방어진지를 미 제 7연대에 인계하고, 연포부근으로 이동하여, 부대의 후방 기동을 준비하려한다.
② 제 2대대는 12월 14일 12:00를 기하여 연포 서쪽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항공이동을 위한 준비를 하라.
③ 사령부는 12월 14일 12:00 이후, 연포비행장에 위치한다.』

  12월 14일
  제 2대대는 미 제 7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이날 14:00에 서흥리(연포 서쪽 2km)에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하였고, 사령부 역시 연포비행장으로 이동하여 기동을 준비하였다.
  또한 16:00에는 선발대로 편성된 사령부 군수참모실의 황영식 소위 이하 21명이 먼서 선편으로 진해를 향하여 출항하였다.

  12월 15일
  이날 12:00를 기하여 함흥에 있던 제 5대대는 미 제 3사단의 지휘를 떠나 해병대에 복귀되어 연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4. 원산-함흥지구 전투의 결과

  원산철수작전은 최종방어부대였던 해병대의 제 3대대가 12월 7일에, 제 1대대가 12월 9일에 각각 원산만을 떠남으로써 끝을 맺었고, 양개 대대는 12월 12일 부산에 입항하였다. 그러나 원산을 떠날 때, 장병들은 함흥의 부대주력과 합세하기 위하여 흥남으로 이동하는 줄 알았으나, 예상과는 달리 함수는 남쪽을 향하였으니, 장병들의 가슴은 안타까움에 가득 찬 듯,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겼던 것이다.
  한편 함흥지역에서는, 해병대의 주력이 12월 15일 연포비행장을 이륙한 다음, 잔여부대의 탑재도 계획대로 진행되어, 12월 24일에 미 제 3사단의 마지막 해안방어부대가 흥남해안을 떠남으로써, 109척의 수송함정이 동원되어 105,000명의 병력과, 17,500대의 차량, 350,000톤의 화물, 그리고 91,000명의 피난민을 철수시킨 흥남철수작전은 그 막을 내렸고, 흥남 하늘에는 잔치된 화물을 폭파하는 폭음과, 화염만이 치솟고 있었다.
  연포비행장을 이륙한 사령부와 제 2, 제 5대대는 같은 날인 12월 15일 부산의 수영비행장에 도착하여 제 1, 제 3대대와 합세한 다음, 12월 16일 16:00에 함정 편으로 다시 부산을 떠나 18:00에 진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부 병력을 실은 비행기는 수영비행장의 활주로가 능력을 초과하므로, 멀리 일본 구주의 비행장에 착륙하여 다시 함정 편으로 진해에 집결하였다.
  이리하여 진해에서는 월여에 걸쳐 부대를 정비하고, 교육과 훈련을 쌓으면서 차기작전에 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