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통 피난길에 나를 잉태한 어머니는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 경찰관인 아버지의 신분을 속이고 누님 셋과 형님 둘을 데리고 무사히 피난을 마치고 돌아와 날 낳으셨으니 말이다. 당시의 생활상은 말할 수 없이 피폐했다.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요즘 아이들은 ‘먹을것이 없으면 라면이라도 끓여먹지’ 라고 서슴없이 말하지만 난 지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라서 남보다 키가 작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키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랐다.
지금도 정정하신 둘째 형님은 어려운 집안 사정을 고려해 육군 이기자 부대에서 근무하다 월남전에 자원했다.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형님은 병장 봉급을 받아 매달 집으로 보내주곤 했다. 지금 기억에 형은 무사히 입무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큰 나무박스에 일제 그릇과 커피, 설탕, 군대 통조림을 가지고 와서 우리도 먹고 이웃에 나눠 주기도 했다. 나는 그때 커피를 처음 먹어봤고 그 커피 맛을 지금도 못 잊는다. 난 영장을 받고 나보다 한살어린 친구들의 꼬임에 빠져 해병대에 지원했다. 형들은 나보고 ‘너 거기 제대하면 취직도 못한다’며 만류했지만 고집대로 대한민국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다. 난 대부분의 군 생활을 백령도 바다와 싸우면서 초병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지금도 장상곶 앞바다 두무진을 생각하면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청정해역이다. 해병 팬티를 입고 바다에 들어서서 발로 비비면 손바닥만한 해삼이 잡히고, 당나귀 귀만한 홍합을 딸 수 있었다. 군대 식판에 홍합과 마늘잎을 넣고 된장을 풀어서 끓이면 냄새가 구미를 돋우고, 당시 와룡소주 반 수통컵 정도 한잔을 홍합 안주로 먹으면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 지경이다. 청운의 꿈은 국사 선생이었다. 가난한 우리집은 대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난 전역 후 강원도에서 실시한 지방 5급 공채에 합격해 홍천군 내면에 첫 발령을 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읍에서 가장 거리가 먼 오지면이었다. 3공화국 시절 한수이북 도로권 가꾸기사업이 확정돼서 제일 먼저 착수한 사업이 지붕개량이었다. 국가에서 지붕 개량에 필요한 함석과 슬레아트를 현물로 제공해서 집의 형태를 바꾸는 사업이다. 그때는 출근만 하면 지붕 철거작업에 투입됐다. 주민 스스로 작업을 완료해야 했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상부에서 매일 매일 보고를 받고 추진상황을 점검했다. 그때 나는 초임 면서기로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토 달지 않고 해병정신으로 업무에 임했다. 박봉에 여유가 없어서 담배는 노란색 갑의 개나리를 피우고 신발은 워커를 신고 다녔다. 상사 한분이 공무원 신분에 담배는 좋은걸 피우라고 핀잔을 줬지만, 쉽게 바꾸지 못했다. 그 해 내면사무소는 주민과 직원들의 합심노력으로 한수이북 도로권 가꾸기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다른 지역보다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표창도 받았다. 지금은 퇴직을 하고 금년부터 (재)대한걷기연맹에서 걷기를 통한 시민의 건강증진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걷기운동 사업을 장려하고 있지만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간절하다. 요즘 해병대 모임과 퇴직 모임에서 내가 한창때는 개나리 담배를 피우고 워커를 신고 공무원 생활을 했다고 하면 ‘너는 해병대니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말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곤 한다. 김동현 대한걷기연맹 사무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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