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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통영 원문고개 방어전

by 충실한 해병 2023. 1. 16.
● 전투시기 : 1950.8.19-9.11
● 전투지역 : 경남 통영
● 주요지휘관 : 김성은 중령, 김광식 대위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상 세 설 명
 
1. 통영 원문고개 방어전의 개요

  통영시가지를 탈환한 해병대가 통영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곳이 통영 원문고개이다. 이곳을 다시 차지하기 위한 적의 공격에 다시 한 번 통영을 사수한 전투이다.


2. 통영 원문고개 방어전의 주요 지휘관

*아군
해병대장 중령 김성은
제 2중대장 대위 김광식
제 3중대장 대위 이봉출
제 7중대장 대위 안창관
해군방위대장 소령 백남표
병력 약 300명

*적군
북괴군 제 104치안연대장 미상
병력 약 1,000명


3. 통영 원문고개 방어전의 진행과정

  가. 전투전의 상황

  제 2중대가 원문 고개에서 방어진을 쳤던 것인데 그 좌측에는 시가지에 잠복 중인 적의 포착전을 끝낸 제 7중대가 증원하기 위하여 추가 배치되었다.
  당시의 통신 수단은 통영-고성 사이의 체신부 유선 통신을 이용하여 EE-8 전화기를 사용하였다.
  2개 중대의 지휘소는 협소한 지역을 고려하여 제 2중대와 제 7중대의 지휘소가 한 곳에 위치하였으며 적의 침입과 기타 필요할 때의 신호는 싸이렌을 이용하기로 약속하였다.

  나. 통영 원문고개의 방어전

  8월 19일
  15:40경 고성 쪽에서 사격하는 적의 포탄이 원문 고개의 아군 방어 지역에 떨어지기 시작하여 3시간 동안에 걸쳐 580발이 작열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리 중대장들은 즉시 지원사격을 요청하였고 이 연락을 받은 부대장도 지체없이 진해 통제부 사령관(김성삼 대령)에게 공중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 요청을 받은 진해 기지에서는 T-6기 4대의 편대가 출격하여 원문 고개 서북쪽에 있는 제석봉 뒷면에 위치한 적의 포진지를 공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한편 해상의 해군 함정들도 이에 호응하여 동시에 포격하였으므로 적과 우리 사이에는 치열한 포격전이 계속되었다. 적의 포사격이 중단되면서부터 약 1,000명의 적 병력이 제 2중대와 제 7중대 진지 정면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왔다.
  우리 두 개 중대는 적이 300m의 사격권에 들어오기까지 자중하면서 기다리다가 일제히 사격을 시작하였고 박격포와 PC703함에서도 동시에 포문을 열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적은 희생을 무릅쓰면서 근접하여 왔으며 서로 간의 사격전은 4시간이나 계속되었고 적의 공격은 23:50쯤 되어서야 겨우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김부대장은 원문 고개전황을 알 수는 없었으나 계속되는 상황으로 미루어 해군 본부에 항공 지원을 요청하였다. 날이 밝은 뒤 공군의 T-6기 편대가 출격하여 적의 주력과 포진지를 공격하여 혼란과 피해를 입혔고 20일 아침 08:20에는 이 근방의 적이 모두 시체를 남긴 채 퇴각하고 말았다. 이날 21:00부터 적은 10분간에 걸쳐 포 사격을 가해왔고 또 다시 공격을 해왔으나 약 2시간의 교전 끝에 이를 격퇴시켰다.

  8월 21일
  제 3중대와 해군 방위대 1중대가 원문 고개의 제 2선에 배치되어 종심을 증강하였는데 이때에 해군의 김석근 중위는 중대장 조정우 소령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적은 예상한대로 22:00경에 야간 공격을 또 다시 시작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 해병대는 그간에 치른 야간전투의 경험을 살릴 수 있었음으로 적의 반복되는 공격에 대하여서도 침착하게 진전에서 적을 격퇴하는 것을 되풀이하였다. 이때에 이러한 치열한 야간전투에 좀 더 사기를 올리기 위하여 진지 안에서 “나가자! 해병대”라는 군가를 높이 부르면서 적을 맞아 잘 싸웠고 이번에도 적의 공격은 실패도 돌아가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기관총 사수는 250발이 들어있는 탄총 25개를 모조리 소모하는 그러한 치열한 싸움이었다.

  8월 22일
  아침에 보니 전지 앞에는 적의 시체 62구가 흩어져 있었으며 그 위에 적의 중대장과 병사 3명을 동시에 포로로 잡았던 것이다. 우리 해병대에서는 2명의 전사자와 6명의 부상자가 있었다.
  이 당시 제주도에 있는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대령은 연전연승의 성과를 축하하는 축하를 보내왔다.
  낮에는 진지 보수와 탄약 보급 그리고 사계정리 등으로 다음 전투에 대비하던 중 적은 21:00 쯤에는 또 다시 공격을 감행하여 왔지만 우리 해군 PC702와 704함이 지원사격을 집중하여 적의 포진지와 공격부대를 강타하자 여기에 견디지 못하게 된 적은 한 시간 뒤에 드디어 퇴각하고 말았다.

  8월 23일
  해군 방위대 1중대장 조정우 소령을 염봉생 소령과 교대하였다. 저녁 20:00에는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소장은 통영 부두에 도착하여 김성은 부대 지휘소를 방문하여 부대 이하의 모든 장병들에게 승리를 축하하고 더욱 분투해 줄 것을 당부한 다음 21:00에 부산으로 돌아갔다.

  8월 24일
  원문 고개에 포진한지 1주일이 되는 날 처음으로 대인 지뢰가 보급되자 이 지뢰를 진지 앞 적의 접근로에 매설하여 방어진을 한층 더 강화토록 하였다.

  8월 26일
  퇴각할 기회를 놓치고 잠복 중이던 적의 장교 1명을 10:00에 수색대가 포로로 하였다. 이날 김성은 부대는 사령부로부터 해병대 제 161부대 1대대라는 건제 부대 서열 통보를 받았다. 이제까지 제 7중대로 불리운 안창관 대위의 중대는 제 1중대로 개칭되고 제 1중대는 제 4중대로 개편되었다.
  또한 통영을 탈환한 다음 이 지구의 청년 방위대원 33명이 참전하기를 지원해 왔는데 방위군 중위 전모가 지휘하는 이들은 부대장의 쾌락을 받고 이 지역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8월 27일
  17:00에 이들 청년 방위대원은 처음으로 월문 고개 서쪽 8km 지점에 있는 수월리 양지동과 그리고 거기에서 1.5km 북쪽 해안에 있는 가오치에서 적과의 사격전을 전개하였다. 이 기습대를 지원한 PC 704함은 이에 호응하여 동시에 포격을 시작하여 적을 북쪽으로 격퇴시킨 다음 기습대는 지방 공산분자 7명을 체포하였으며 이 싸움에서 몇 명의 적도 사살하고 말았다. 이날 밤 23:30쯤 적은 원문 고개 진지를 중대 병력으로 공격하였으나 진전에 묻어 놓은 지뢰와 사격으로 또 다시 격퇴를 당하였을 뿐이다.

  8월 28일
  15:30에 부대장은 PC 704함을 타고 계속 수월리 방면의 북쪽 고지대에 대한 포격을 직접 지휘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청년방위대 전원은 PC 704함의 엄호사격을 받으면서 범선으로 적전상륙을 감행하여 중대 병력의 적과 교전 끝에 14명을 사살하고 포로 1명을 잡았다. 이날 밤에는 적의 공격은 없었으나 적은 24:00부터 죽림리의 광산 갱도에 확성기를 걸어놓고 아군에 대하여 귀순하라고 방송함으로써 심리전 공세를 펴 왔는데 우리 병사들의 냉소만을 사는 결과가 되었을 뿐이다.

  8월 29일
  14:00에는 다시 청년 방위대가 범선 몇 척으로 적지에 상륙하여 적을 교란시키고 돌아 왔으며 또한 수월리 뒷산 325고지(봉화산)와 300고지(매봉산)를 좌우에서 동시에 공격한 다음 어둠을 이용하여 철수하였다. 이렇게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은 적은 전 중위부대가 은밀히 철수한 것을 모르고 좌우 고지에서 그들끼리 서로 치열한 사격전을 계속하면서 밤을 세웠다. 후일 주민들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끼리 교전에서 서로 쏘아 죽인 시체가 60구나 있었다고 한다.

  8월 30일
  미 항공기 6대는 적이 원문 고개의 해병대 진지를 계속 돌파하려고 기도하여 제석봉과 죽림리 일대에 집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결과 곧 이 적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는데 이때에 적의 시체가 허공으로 치솟는 것을 육안으로 능히 볼 수 있었다.

  8월 31일
  아침 부대장은 수월리 뒷산의 능선 일대에서 움직이는 적을 격멸하기 위하여 방위대의 전 중위로 하여금 부하를 이끌고 10:00에 수월리에 다시 상륙했는데 이 부대는 20분 동안에 걸쳐 적과 교전하였다. 이날 밤에도 적은 소수의 병력으로 원문 고개를 또다시 공격하여 왔으나 아군의 화력으로 말미암아 곧 격퇴하고 말았다.

  9월 1일
  적은 계속 병력을 집결 중이었으며 적의 관측소인 제석봉 정상에서는 장교들이 통영 반도를 손짓하면서 무엇을 계획하는 듯이 보였다. 부대장은 필연코 적이 최후의 공세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전대원에게 경계심을 고취시키고 또 우리 해군 303정장 신영철 소령에게는 망자도와 장구도를 연결하는 해상선을 봉쇄한 다음 적의 동향을 샅샅이 살펴보라고 명령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방위대로 하여금 발동선을 타고 망자도에 상륙하여 303정과 연결을 유지토록 조치하였다.

  9월 2일
  01:00에 예상한대로 적은 약 1개 소대로 공격하여 왔으나 곧 격퇴되었다. 18:40쯤 미군 전폭기 8대가 제석봉 서남쪽의 적을 공격한 다음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이어서 해상의 PC 704함은 공중유도 사격 때보다도 심하게 폭격을 하여 적은 공중과 해상공격을 동시에 받고 200명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이날은 해군 방위대의 염봉생 소령이 지휘하는 제 1중대가 김동준 소령이 지휘하는 제 2중대와 서로 임무를 교대하였다

  9월 3일
  새벽 03:00 청년 방위대 양 소위는 대원을 지휘, 원문 고개 서쪽 5km 해안에 있는 법송포에 기습 상륙하여 포로 6명과 적 5명을 사살 하였고 한편 같은 시각에 적은 원문 고개를 대대 미만으로 추산되는 병력으로 공격해 왔으나 역시 우리 진지를 감히 돌파하지 못하고 05:00까지 모두 퇴각하고 말았다.
  적의 공격은 밤마다 원문 고개의 해병대 진지를 돌파하려 하였으나 한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지치게 된 적은 공격의 뜻을 포기해서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다만 그들의 현 위치를 고수하기만 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이날, 진해에서 1개 중대의 보충 병력이 증원되어 각 중대에 각각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

  9월 4일
  해군 총참모장으로부터 전문을 받았는데 그 요지에 이르기를 “통영군 용남면 승방 부근에 적의 소수병력이 상륙하였으니 이를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이 전명에 따라서 김부대장은 곧 해군 방위대 제 2중대의 1개 소대를 출동시켰으며 PC 702함은 위험을 무릅쓰고 원문만 깊숙이 들어가 죽림리 광산 일대에 있는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서도 적진지를 격파하였다.

  9월 5일
  해군 방위대 2중대는 진해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아 용남면 승방리에 출동한 1개 소대는 제 3중대의 1개 소대와 교대하였으며 제 3중대는 적정이 없기 때문에 원대에 복귀하였다.
  이날(9월 5일) 새벽 05:00에 적은 원문 고개의 우리 진지에 대하여 여전히 공격을 가하여 왔으며 수류탄전을 벌였으나 모조리 진전에서 격퇴되었다. 또 이날 11:00경 적정이 비교적 잔잔해지자 백남표 소령은 해군방위대의 제 2중대와 진동리 전선에서 지원 받은 병력 155명을 합하여 270명을 지휘하고 진해항으로 귀항하였다.

  9월 6일
  10:00 부대장은 PC 702함을 타고 통영 북쪽의 고성 동쪽 해안을 초계하면서 죽림리 해안과 거제면 해안 일대에 숨겨져 있는 적의 소형 선박을 모조리 격침시키고 15:00쯤 통영만으로 귀항하였다.

  9월 7일
  이날도 부대장은 PC 702함에 승선하여 저녁때 자전포와 그 동쪽에 있는 고지 능선일대의 적진에 대하여 포격을 반복하였다.
  적은 8일 새벽 05:00에도 또다시 최후 발악적인 공격을 가해 왔는데 적은 약 1개 대대 병력으로 보였으나 매설해 놓은 지뢰와 함포의 집중사격, 그리고 박격포의 탄막사격으로 막심한 손실만 내었을 뿐이므로 09:00에는 전면에 걸쳐 퇴각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생포된 적의 병사는 이 부대가 북한군 제 104 연대 21대대와 22대대라고 말하였으며 이들은 남한 점령지에서 강제로 징집된 학생들로 이루어진 의용군이라고 하였다.

  9월 9일
  이날 하루만은 교전이 없었다.

  9월 10일
  07:00에 민용식 중위와 김문상 중위가 지휘하는 2개 중대가 원문 고개의 제 2중대 및 제 3중대와 각각 임무를 교대하였으며 제 2중대와 제 3중대는 함정에 탑승하여 부산으로 회항하였다 원문 고개의 새 임무를 맡은 민 중대와 김 중대는 이 전투에 참전한 첫날밤에 곧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9월 11일
  22:30부터 적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것을 잘 막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적은 이번 공격에서도 또다시 피해만 입고 분산 철수를 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제 까지 적은 온갖 방법을 다하여 해병대의 진지를 9회에 걸쳐 공격해 왔으며 기어코 통영을 다시 탈환하여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으나 끝내 그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해병대의 감투정신은 그 이름 충무와 더불어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4. 통영 원문고개 방어전의 결과

  9월 23일 11:30 해병 1중대는 김부대장 지휘 밑에 LST 단양호에 실려 통영 읍민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면서 이미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한 다음 서울을 탈환하기 위하여 수색에서 서울에 돌입하고 있던 우리 해병대 주력을 증원하고 서울 탈환전에 참전하기 위하여 인천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