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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자료

해병대 회고 - 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19-몽금포 작전1

by 충실한 해병 2023. 1. 20.
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19-몽금포 작전1

몽금포는 북한 땅 황해도 서쪽 끝에서 황해로 길게 돌출한 작은 어항이다. 1949년 8월 이곳에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전용보트가 납북돼, 이를 찾아오기 위한 작전이 있었다. 공산진영이 이 작전을 내세워 6·25가 ‘북침’이라고 주장해 온 정치적 연유로 이 사건은 한동안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금기처럼 여겨져 왔다.

또 이 사건과 내 친구 함명수 제독(제7대 해군참모총장 역임)이 깊은 관계가 있어 말을 아껴왔지만 이제는 입을 열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초기 대한민국과 해군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언제까지나 덮어둘 수는 없다. 나도 이 사건의 중요한 관계자다.

미 군사고문단장 전용 보트 납북

정부수립 1주년을 맞은 49년 여름, 해군은 멋진 관함식(觀艦式)으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행사 닷새 앞인 8월 10일 불길한 사건이 터졌다.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G-Boat)가 하룻밤 사이에 행방불명된 것이다. 인천경비부에 관리책임이 있는 이 보트가 없어진 것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미 국방성에서 보내준 이 보트를 로버트 장군은 늘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랑하면서 “대통령께서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빌려드리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낚시를 좋아하는 이대통령은 꼭 한번 이 배를 타보고 싶어 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해군이 발칵 뒤집힌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인천경비부는 산하 제1정대 함정들을 이용해 연평도·덕적도·백령도 등등 배가 닿을 수 있는 서해 항구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허사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버트 장군이 즉시 이대통령에게 알려 해군에 비상이 걸렸다. 손원일 총참모장이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로 불려갔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육군과 해군 총참모장들이 김일성만 도와주니 말이야. 동해에서는 태극기 단 함정이 올라가고, 서해에서는 성조기 단 보트가 올라가고…. 이래서 되겠는가?”이대통령은 앉으라는 말도 없이 역정을 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던 손제독은 사표낼 각오를 굳혔다.

손제독을 보좌해 경무대에 갔던 해군본부 정보감 함명수 소령은 더 자책감을 느꼈다.경무대를 나오면서 함소령은 보복작전을 제안했다. 자신이 직접 특공대를 지휘해 보트를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손제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즉각 작전계획 입안이 착수됐다. 서해 첩보부대장 이태영 소령의 활동으로 보트가 황해도 몽금포 항에 계류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트를 빼앗아오는 방법은 야음을 틈탄 기습작전뿐이라는 결론이 났다. 함소령이 20여 명의 정보대원을 지휘해 극비작전을 감행하고, 충무공함 등 이용운 중령 예하 인천 제1정대 함정 6척이 엄호하기로 결정됐다.

보트 회수 위한 극비작전 감행

나는 302정 책임자로서 이 작전에 참여했다. 정부수립 1주년 경축 관함식이 아직 끝나지 않은 49년 8월 16일 새벽 2시, 작전부대는 인천항을 떠났다.적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백령도 남쪽과 몽금포 서쪽을 멀찌감치 돌아 17일 미명 작전 현장에 도착했다. 작전 목적은 보트를 찾아내 끌어오는 것이고, 그게 안 되면 폭파시키기로 돼 있었다.

먼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 6시, 정대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아직 잠이 덜 깬 몽금포 항구로 접근해 들어갔다. 이를 목격한 적진에서 집중사격이 시작됐다. 육지 초소와 부두에 정박했던 적 함정들이 일제히 외항 쪽으로 총열을 맞췄다.

함소령은 적탄을 헤치고 부두에 접근하더니 5척의 보트에 대원들을 분승시켜 항 내로 돌입했다. 모두가 함께 엄호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이상하게 따라 들어가는 함정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친구 안전이 걱정돼 무작정 항 내로 302정을 몰고 들어갔다.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정리= 문창재·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