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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자료

해병대 회고 - 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20-몽금포 작전2

by 충실한 해병 2023. 1. 23.
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20-몽금포 작전2

특공대가 분승한 보트들이 기세 좋게 몽금포항 내로 접근해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바싹 뒤따라가면서 좌현과 우현에 장착된 중기관총을 쏘아 그들을 엄호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보트들이 막 상륙하려는 순간 5척 가운데 4척이 기관고장을 일으킨 듯, 움직임이 정지됐다. 저러다 전원 몰살이다. 순간적으로 이런 위기감에 휩싸였다. 총격전은 더욱 가열됐다. 그 사이 함명수 소령 보트가 상륙을 감행하다가 멈칫했다. 선수에서 대원들의 상륙을 독려하던 함소령이 적탄을 맞은 것이다.

절체절명 위기 속 예상밖 전과

그냥 내버려 두면 친구는 적진에서 전사하거나 포로가 될 형국이었다. 나는 총열이 터져라 하고 맹렬히 중기관총을 쏘아대면서 함소령이 쓰러진 보트로 달려갔다.그는 양쪽 넓적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보트 위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보트로 뛰어내려 친구를 구출해 충무공함에 태우고 복수하듯 기관총대를 휘둘렀다.

뒤따라 온 동료 함정들과 함께 몽금포항을 뒤집어 놓았다. 우리 정대의 화력이 우월한 덕분이었다.북한 경비정 4척이 침몰됐다. 기세가 오른 302정은 인접한 적선에 돌입해 육탄전으로 적을 제압하고 적 경비정 제18호를 나포하는 데 성공했다. 인민군 해군 군관을 포함한 포로 5명을 생포하는 전과도 올렸다. 그러나 로버트 고문단장 보트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 사이 진남포항으로 옮겨져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가 있었던 것이다.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출돼 충무공함에 오른 함소령은 운이 좋았다. 군의관이 타고 있어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함소령은 직전 충무공함 함장이었기 때문에 그의 혈액형을 아는 승조원들이 헌혈을 해 줘 후송 중 계속 수혈을 받을 수 있었다.

조사 결과 드러난 보트 납북경위는 소설보다 드라마틱했다. 보트를 몰고 올라간 범인은 해군 인천 경비부 소속 안성갑 하사였다. 범행 며칠 전 보트 정장으로 임명된 그에게는 짝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다. 하필이면 남로당 공작원의 여동생에게 눈이 먼 그는 “로버트 장군 보트를 몰고 월북하면 여동생과 결혼시켜주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일을 저질렀다.

재미를 본 북한은 그에게 더 큰 일을 요구했다. 한국 해군 함정을 끌고 오라는 지령을 받고 그는 1950년 봄 서울에 잠입했다. 어리석게도 재범을 위해 지하활동을 하다가 서울역에서 해군 특무대에 붙잡혀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예상 밖의 전과를 거둔 몽금포 작전은 분명 성공이었지만, 사태는 엉뚱하게 번져갔다. 미국이 한국군의 ‘38도선 월북 작전’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주한 미 대사 존 무초의 강력한 항의에 입장이 옹색해진 정부는 공식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 6·25 북침설로 두고두고 악용

이 작전은 김일성이 살아 있는 동안 정치적으로 이용됐다. 6·25전쟁의 도화선이 그 작전이라는 선전·선동을 근거로 중국과 소련은 6·25를 북침전쟁이라고 우겨왔다. 가브리엘 콜코 같은 수정주의 학자들이 이에 동조하기도 했다.그러나 90년대 초 소련 붕괴 이후 당시 소련 외교문서들이 공개돼 6·25가 김일성의 주도, 중국·소련의 적극 지원으로 이루어진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로 밝혀지자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어지게 됐다.

떳떳한 보복작전을 성공시키고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살아온 60여 년 세월이 허무하다. 양 다리에 중상을 입은 함소령은 일본으로 후송돼 수술을 받고 불구 신세를 면했다. 그때의 상처 때문에 그는 아직도 보행이 좀 불편하다. 우리는 평생 동지다. 내가 해병대사령관 시절 그도 해군참모총장으로 조국방위 임무를 어깨에 메고 같이 일했다.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우정은 그렇게 생겨났다.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정리= 문창재·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