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병대 역사

해병대 역사

by 충실한 해병 2022. 11. 3.

창설기

여수 10.19 사건 결과에 따라 상륙전을 담당할 부대의 필요성을 검토하여 미국 해병대 모방하여 1949 4 15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 위치한 덕산 비행장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5 5, 대통령령 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그들을 지휘할 최초의 해병 사령관은 신현준 중령, 해병 참모장은 김성은 통제부 교육부장이었다. 초기 핵심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 제국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육군의 장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부대원은 해군 장교 26, 부사관 54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8 1 해군에서 장교 부사관 증원받고, 해군 14 중에서 440명을 해병대 1기로 특별모집받아‚ 2 대대 규모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8 15 광복절 4주년 기념식에서 사열하면서 최초로 모습을 대외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같은 9, 신영철과 김행래에 의해 작사·작곡하고 이병걸이 편곡한 〈나가자 해병대〉가 해병참모장 김성은 대령을 위원장으로 군가제정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해병대의 군가로 제정되었다.(추후 "해병대가" 변경되었다.)

8 29, 진주에 전개한 김성은의 대대가 4개월간 지리산 조선인민유격대 토벌하고 같은 , 12 29 제주도 상륙하여 옮겨가 이듬해 1950 7월까지 7개월 동안 제주읍과 모슬포를 근거지로 하고 공비를 토벌하였다.

한국 전쟁

 

한국전쟁 시대의 해병대 군복

1950 8 17 통영 상륙 작전에서 해병대 1 중대는 조선인민군 대대 병력을 격파하고 통영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참고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로 밝혀진 적은 없는데, 1950 8 23 최초의 퓰리처상 여성 수상자인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성과를 보도하는 《귀신잡는 해병》("Ghost-catching Marines")이라는 기사에서 "한국 해병대는 악마조차도 잡을 정도였다."("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 썼고 이를 계기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칭이 붙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으나,[4] 그런 기사가 실제 있었는지가 확인된 바는 없다.

같은해 9 1일에 1연대가 창설되었다. 1연대는 9 15 미국 1해병사단 같이 미국 10(X)군단 편성되어 인천항에 상륙하였다. 9 27 서울로 진격하여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하고 다음날 9 28 조선인민해방군의 잔여병력을 소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수도를 되찾았다이후, 전세가 기울어 국제 연합군이 혜산진까지 진격하자, 대한민국 해병대는 각각 원산 함흥 지역에 상륙하여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0 25 중국 인민해방군 증원되어 한반도로 진입해오자, 지역에 있던 해병대는 일제히 철수하여 진해 집결하였다. 12 20, 5독립대대를 창설하였다.

1951 6 4, 미국 5해병연대가 도솔산을 탈환하는데 실패하자, 1연대는 그들과 임무를 교대하여 중국 인민해방군 5군단 예하 12사단 32사단 상대로 6 20일까지 전투를 지속하여 2 사단을 격파하였다. 1연대는 "무적 해병" 칭호와 8 19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8 30일에는 김일성 고지에서 3군단 예하 1사단을 상대로부터 9 4일까지 4일간 공방전을 벌여 924 "김일성" 고지와 1026 "모택동" 고지를 탈환하였다. 전후, 미국 측에서는 전투를 단장의 능선 전투 명명하였다.

1952 1연대와 5독립대대가 합병하여 1전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1953 한국 전쟁이 휴전되자, 해병대는 조직의 정비를 시작하였다. 1전투단은 경기도 파주군 아동면으로 이동하고 1954 2 1 1여단으로 증편한 , 3 14 미국으로 귀환하는 미국 1해병사단에게서 전술책임지역(TAOR) 작전지휘권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55 1 1여단에서 1사단으로 증편되고, 3 26 사령부가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남산 기슭으로 옮겨졌다.

1959 2 26, 그때까지 경기도 파주군과 김포군에 주둔했던 1사단은 1연대에서 차출한 대원들을 근간으로 1임시여단을 창설한 1임시여단에게 김포 반도 경비를 맡기고 3 12 포항시 이동하였다.

베트남 전쟁

 

베트남 2해병여단의 병사들

1965 9 20 베트남 전쟁 파병을 위해 해병대 2여단 "청룡부대" 창설하고 남베트남으로서 파병하였다. 1965 10 9 깐라인 상륙한 청룡부대는 주월한국군사령부 통제 아래에서 1972 2 24일까지 6 4개월 동안 짜빈동 전투 , 많은 전투를 수행하였다.[7] 1966 11 14 2여단이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어 생긴 전력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신규 병력을 증원하면서 편성된 5연대를 1966 11 23 5해병여단으로 재편하여 김포반도에서 휴전선 경계 임무를 맡고 있던 1임시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김포 경비 임무를 마친 1임시여단은 1사단으로 복귀하여 연대로 되돌아갔다.

1972 1 4, 청룡부대가 귀국하는 즉시 해체되고 명칭만 5해병여단으로 이전할 것이라 밝혔다파리 평화협정 발효됨에 따라 청룡부대도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2 24 베트남 공화국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예정이 바뀌어 1973 7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3야전군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김포에 주둔하고 있던 5해병여단과 김포 경비 임무를 교대하였다.

사령부 해체

효율적인 군대 운영을 위해 재편성하라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마련된 "국방부 훈령 157" 의거하여 해군으로 지휘통제를 통합하게 되어 편성된 해군참모부에 해병대 사령관이 해군 2참모차장으로 취임하면서, 1973 10 10 해병대 사령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1958 창설된 해병 항공대 해체되어 장비와 인원은 모두 해군으로 이관되었다. 해군에는 보병 병과가 신설되었으며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남은 해병대 인원은 전원 해군 보병에 편입되었다.

사령부 재창설 이후

2012 대한민국 해병대 훈련 모습

1987 11 1 14년간 해군에 통합되어 운용되면서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하였다. 그러나, 권한과 책임사상 등이 보완되지 않아, 해병대 인사관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0 8 1 법률이 개정되면서 해병대 사령관의 지휘권한이 회복되었다. 1992 12 1 한미연합군사령부 예비 전력 부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연합 해병대 사령부"(Combined Marine Component Force Command; CMFC) 창설되었다.

2005 노무현 대통령이 제시한 국방개혁 2020 계획이 재정되어 6해병여단 연평부대가 해체되고, 백령부대와 제주부대를 창설하고 정보단과 통신단을 정식으로 편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비용 등의 문제와 조선인민군 4군단 의한 연평도 포격으로 해병대의 신속 대응에 문제가 제기되고 계획이 폐지됨으로써 취소되었다이명박 대통령이 주도하여 기획한 국방개혁 307계획 따라 해병대 사령관 겸임 지휘하는 서해5에서의 조선인민군의 위협에 빠른 대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합동 사령부인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설치하였다. 그리고 국방개혁 2020 일부 계획안인 제주부대, 정보단과 통신단의 창설 계획을 되살리고, 신속대응과 공중, 지상 기동작전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바꾸기 위해 사령부 직할 항공단의 창설을 추가하였다.

2017 도입 예정인 상륙기동헬기 32대를 직접 운용 여부는 김관진 국방장관 주재 군무회의에서 최종 확정예정이다. 해병대는 1973 해병대사령부의 해체 이후 해군에 통합된 이후 44 만에 항공 전력을 갖추게 된다. 해병대는 1973 10 해군에 통합되면서 12대의 헬기와 125명의 운용요원 모두 해군으로 소속이 바뀌었으며 1987 11 해병대 사령부가 재창설되었지만, 항공기는 돌려받지 못했다.

창설기

여수 10.19 사건 결과에 따라 상륙전을 담당할 부대의 필요성을 검토하여 미국 해병대 모방하여 1949 4 15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 위치한 덕산 비행장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5 5, 대통령령 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그들을 지휘할 최초의 해병 사령관은 신현준 중령, 해병 참모장은 김성은 통제부 교육부장이었다. 초기 핵심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 제국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육군의 장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부대원은 해군 장교 26, 부사관 54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8 1 해군에서 장교 부사관 증원받고, 해군 14 중에서 440명을 해병대 1기로 특별모집받아‚ 2 대대 규모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8 15 광복절 4주년 기념식에서 사열하면서 최초로 모습을 대외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같은 9, 신영철과 김행래에 의해 작사·작곡하고 이병걸이 편곡한 〈나가자 해병대〉가 해병참모장 김성은 대령을 위원장으로 군가제정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해병대의 군가로 제정되었다.(추후 "해병대가" 변경되었다.)

8 29, 진주에 전개한 김성은의 대대가 4개월간 지리산 조선인민유격대 토벌하고 같은 , 12 29 제주도 상륙하여 옮겨가 이듬해 1950 7월까지 7개월 동안 제주읍과 모슬포를 근거지로 하고 공비를 토벌하였다.

한국 전쟁

 

한국전쟁 시대의 해병대 군복

1950 8 17 통영 상륙 작전에서 해병대 1 중대는 조선인민군 대대 병력을 격파하고 통영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참고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로 밝혀진 적은 없는데, 1950 8 23 최초의 퓰리처상 여성 수상자인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성과를 보도하는 《귀신잡는 해병》("Ghost-catching Marines")이라는 기사에서 "한국 해병대는 악마조차도 잡을 정도였다."("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 썼고 이를 계기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칭이 붙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으나,[4] 그런 기사가 실제 있었는지가 확인된 바는 없다.

같은해 9 1일에 1연대가 창설되었다. 1연대는 9 15 미국 1해병사단 같이 미국 10(X)군단 편성되어 인천항에 상륙하였다. 9 27 서울로 진격하여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하고 다음날 9 28 조선인민해방군의 잔여병력을 소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수도를 되찾았다이후, 전세가 기울어 국제 연합군이 혜산진까지 진격하자, 대한민국 해병대는 각각 원산 함흥 지역에 상륙하여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0 25 중국 인민해방군 증원되어 한반도로 진입해오자, 지역에 있던 해병대는 일제히 철수하여 진해 집결하였다. 12 20, 5독립대대를 창설하였다.

1951 6 4, 미국 5해병연대가 도솔산을 탈환하는데 실패하자, 1연대는 그들과 임무를 교대하여 중국 인민해방군 5군단 예하 12사단 32사단 상대로 6 20일까지 전투를 지속하여 2 사단을 격파하였다. 1연대는 "무적 해병" 칭호와 8 19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8 30일에는 김일성 고지에서 3군단 예하 1사단을 상대로부터 9 4일까지 4일간 공방전을 벌여 924 "김일성" 고지와 1026 "모택동" 고지를 탈환하였다. 전후, 미국 측에서는 전투를 단장의 능선 전투 명명하였다.

1952 1연대와 5독립대대가 합병하여 1전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1953 한국 전쟁이 휴전되자, 해병대는 조직의 정비를 시작하였다. 1전투단은 경기도 파주군 아동면으로 이동하고 1954 2 1 1여단으로 증편한 , 3 14 미국으로 귀환하는 미국 1해병사단에게서 전술책임지역(TAOR) 작전지휘권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55 1 1여단에서 1사단으로 증편되고, 3 26 사령부가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남산 기슭으로 옮겨졌다.

1959 2 26, 그때까지 경기도 파주군과 김포군에 주둔했던 1사단은 1연대에서 차출한 대원들을 근간으로 1임시여단을 창설한 1임시여단에게 김포 반도 경비를 맡기고 3 12 포항시 이동하였다.

베트남 전쟁

 

베트남 2해병여단의 병사들

1965 9 20 베트남 전쟁 파병을 위해 해병대 2여단 "청룡부대" 창설하고 남베트남으로서 파병하였다. 1965 10 9 깐라인 상륙한 청룡부대는 주월한국군사령부 통제 아래에서 1972 2 24일까지 6 4개월 동안 짜빈동 전투 , 많은 전투를 수행하였다.[7] 1966 11 14 2여단이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어 생긴 전력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신규 병력을 증원하면서 편성된 5연대를 1966 11 23 5해병여단으로 재편하여 김포반도에서 휴전선 경계 임무를 맡고 있던 1임시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김포 경비 임무를 마친 1임시여단은 1사단으로 복귀하여 연대로 되돌아갔다.

1972 1 4, 청룡부대가 귀국하는 즉시 해체되고 명칭만 5해병여단으로 이전할 것이라 밝혔다파리 평화협정 발효됨에 따라 청룡부대도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2 24 베트남 공화국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예정이 바뀌어 1973 7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3야전군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김포에 주둔하고 있던 5해병여단과 김포 경비 임무를 교대하였다.

사령부 해체

효율적인 군대 운영을 위해 재편성하라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마련된 "국방부 훈령 157" 의거하여 해군으로 지휘통제를 통합하게 되어 편성된 해군참모부에 해병대 사령관이 해군 2참모차장으로 취임하면서, 1973 10 10 해병대 사령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1958 창설된 해병 항공대 해체되어 장비와 인원은 모두 해군으로 이관되었다. 해군에는 보병 병과가 신설되었으며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남은 해병대 인원은 전원 해군 보병에 편입되었다.

사령부 재창설 이후

2012 대한민국 해병대 훈련 모습

1987 11 1 14년간 해군에 통합되어 운용되면서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하였다. 그러나, 권한과 책임사상 등이 보완되지 않아, 해병대 인사관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0 8 1 법률이 개정되면서 해병대 사령관의 지휘권한이 회복되었다. 1992 12 1 한미연합군사령부 예비 전력 부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연합 해병대 사령부"(Combined Marine Component Force Command; CMFC) 창설되었다.

2005 노무현 대통령이 제시한 국방개혁 2020 계획이 재정되어 6해병여단 연평부대가 해체되고, 백령부대와 제주부대를 창설하고 정보단과 통신단을 정식으로 편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비용 등의 문제와 조선인민군 4군단 의한 연평도 포격으로 해병대의 신속 대응에 문제가 제기되고 계획이 폐지됨으로써 취소되었다.[11] 이명박 대통령이 주도하여 기획한 국방개혁 307계획 따라 해병대 사령관 겸임 지휘하는 서해5에서의 조선인민군의 위협에 빠른 대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합동 사령부인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설치하였다. 그리고 국방개혁 2020 일부 계획안인 제주부대, 정보단과 통신단의 창설 계획을 되살리고, 신속대응과 공중, 지상 기동작전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바꾸기 위해 사령부 직할 항공단의 창설을 추가하였다.

2017 도입 예정인 상륙기동헬기 32대를 직접 운용 여부는 김관진 국방장관 주재 군무회의에서 최종 확정예정이다. 해병대는 1973 해병대사령부의 해체 이후 해군에 통합된 이후 44 만에 항공 전력을 갖추게 된다. 해병대는 1973 10 해군에 통합되면서 12대의 헬기와 125명의 운용요원 모두 해군으로 소속이 바뀌었으며 1987 11 해병대 사령부가 재창설되었지만, 항공기는 돌려받지 못했다.

창설기

여수 10.19 사건 결과에 따라 상륙전을 담당할 부대의 필요성을 검토하여 미국 해병대 모방하여 1949 4 15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 위치한 덕산 비행장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5 5, 대통령령 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그들을 지휘할 최초의 해병 사령관은 신현준 중령, 해병 참모장은 김성은 통제부 교육부장이었다. 초기 핵심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 제국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육군의 장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부대원은 해군 장교 26, 부사관 54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8 1 해군에서 장교 부사관 증원받고, 해군 14 중에서 440명을 해병대 1기로 특별모집받아‚ 2 대대 규모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8 15 광복절 4주년 기념식에서 사열하면서 최초로 모습을 대외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같은 9, 신영철과 김행래에 의해 작사·작곡하고 이병걸이 편곡한 〈나가자 해병대〉가 해병참모장 김성은 대령을 위원장으로 군가제정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해병대의 군가로 제정되었다.(추후 "해병대가" 변경되었다.)

8 29, 진주에 전개한 김성은의 대대가 4개월간 지리산 조선인민유격대 토벌하고 같은 , 12 29 제주도 상륙하여 옮겨가 이듬해 1950 7월까지 7개월 동안 제주읍과 모슬포를 근거지로 하고 공비를 토벌하였다.

한국 전쟁

 

한국전쟁 시대의 해병대 군복

1950 8 17 통영 상륙 작전에서 해병대 1 중대는 조선인민군 대대 병력을 격파하고 통영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참고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로 밝혀진 적은 없는데, 1950 8 23 최초의 퓰리처상 여성 수상자인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성과를 보도하는 《귀신잡는 해병》("Ghost-catching Marines")이라는 기사에서 "한국 해병대는 악마조차도 잡을 정도였다."("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 썼고 이를 계기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별칭이 붙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으나,[4] 그런 기사가 실제 있었는지가 확인된 바는 없다.

같은해 9 1일에 1연대가 창설되었다. 1연대는 9 15 미국 1해병사단 같이 미국 10(X)군단 편성되어 인천항에 상륙하였다. 9 27 서울로 진격하여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하고 다음날 9 28 조선인민해방군의 잔여병력을 소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수도를 되찾았다이후, 전세가 기울어 국제 연합군이 혜산진까지 진격하자, 대한민국 해병대는 각각 원산 함흥 지역에 상륙하여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0 25 중국 인민해방군 증원되어 한반도로 진입해오자, 지역에 있던 해병대는 일제히 철수하여 진해 집결하였다. 12 20, 5독립대대를 창설하였다.

1951 6 4, 미국 5해병연대가 도솔산을 탈환하는데 실패하자, 1연대는 그들과 임무를 교대하여 중국 인민해방군 5군단 예하 12사단 32사단 상대로 6 20일까지 전투를 지속하여 2 사단을 격파하였다. 1연대는 "무적 해병" 칭호와 8 19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8 30일에는 김일성 고지에서 3군단 예하 1사단을 상대로부터 9 4일까지 4일간 공방전을 벌여 924 "김일성" 고지와 1026 "모택동" 고지를 탈환하였다. 전후, 미국 측에서는 전투를 단장의 능선 전투 명명하였다.

1952 1연대와 5독립대대가 합병하여 1전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1953 한국 전쟁이 휴전되자, 해병대는 조직의 정비를 시작하였다. 1전투단은 경기도 파주군 아동면으로 이동하고 1954 2 1 1여단으로 증편한 , 3 14 미국으로 귀환하는 미국 1해병사단에게서 전술책임지역(TAOR) 작전지휘권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55 1 1여단에서 1사단으로 증편되고, 3 26 사령부가 경상남도 부산시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남산 기슭으로 옮겨졌다.

1959 2 26, 그때까지 경기도 파주군과 김포군에 주둔했던 1사단은 1연대에서 차출한 대원들을 근간으로 1임시여단을 창설한 1임시여단에게 김포 반도 경비를 맡기고 3 12 포항시 이동하였다.

베트남 전쟁

 

베트남 2해병여단의 병사들

1965 9 20 베트남 전쟁 파병을 위해 해병대 2여단 "청룡부대" 창설하고 남베트남으로서 파병하였다. 1965 10 9 깐라인 상륙한 청룡부대는 주월한국군사령부 통제 아래에서 1972 2 24일까지 6 4개월 동안 짜빈동 전투 , 많은 전투를 수행하였다.[7] 1966 11 14 2여단이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어 생긴 전력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신규 병력을 증원하면서 편성된 5연대를 1966 11 23 5해병여단으로 재편하여 김포반도에서 휴전선 경계 임무를 맡고 있던 1임시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김포 경비 임무를 마친 1임시여단은 1사단으로 복귀하여 연대로 되돌아갔다.

1972 1 4, 청룡부대가 귀국하는 즉시 해체되고 명칭만 5해병여단으로 이전할 것이라 밝혔다파리 평화협정 발효됨에 따라 청룡부대도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2 24 베트남 공화국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예정이 바뀌어 1973 7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3야전군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김포에 주둔하고 있던 5해병여단과 김포 경비 임무를 교대하였다.

사령부 해체

효율적인 군대 운영을 위해 재편성하라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마련된 "국방부 훈령 157" 의거하여 해군으로 지휘통제를 통합하게 되어 편성된 해군참모부에 해병대 사령관이 해군 2참모차장으로 취임하면서, 1973 10 10 해병대 사령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1958 창설된 해병 항공대 해체되어 장비와 인원은 모두 해군으로 이관되었다. 해군에는 보병 병과가 신설되었으며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면서 남은 해병대 인원은 전원 해군 보병에 편입되었다.

사령부 재창설 이후

2012 대한민국 해병대 훈련 모습

1987 11 1 14년간 해군에 통합되어 운용되면서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하였다. 그러나, 권한과 책임사상 등이 보완되지 않아, 해병대 인사관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0 8 1 법률이 개정되면서 해병대 사령관의 지휘권한이 회복되었다. 1992 12 1 한미연합군사령부 예비 전력 부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연합 해병대 사령부"(Combined Marine Component Force Command; CMFC) 창설되었다.

2005 노무현 대통령이 제시한 국방개혁 2020 계획이 재정되어 6해병여단 연평부대가 해체되고, 백령부대와 제주부대를 창설하고 정보단과 통신단을 정식으로 편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비용 등의 문제와 조선인민군 4군단 의한 연평도 포격으로 해병대의 신속 대응에 문제가 제기되고 계획이 폐지됨으로써 취소되었다.[11] 이명박 대통령이 주도하여 기획한 국방개혁 307계획 따라 해병대 사령관 겸임 지휘하는 서해5에서의 조선인민군의 위협에 빠른 대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합동 사령부인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설치하였다. 그리고 국방개혁 2020 일부 계획안인 제주부대, 정보단과 통신단의 창설 계획을 되살리고, 신속대응과 공중, 지상 기동작전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바꾸기 위해 사령부 직할 항공단의 창설을 추가하였다.

2017 도입 예정인 상륙기동헬기 32대를 직접 운용 여부는 김관진 국방장관 주재 군무회의에서 최종 확정예정이다. 해병대는 1973 해병대사령부의 해체 이후 해군에 통합된 이후 44 만에 항공 전력을 갖추게 된다. 해병대는 1973 10 해군에 통합되면서 12대의 헬기와 125명의 운용요원 모두 해군으로 소속이 바뀌었으며 1987 11 해병대 사령부가 재창설되었지만, 항공기는 돌려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