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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논문 자료

건군 이후 국군의 성장과 발전과정

by 충실한 해병 2022. 11. 24.

건군 이후 국군의 성장과 발전과정

 

박순찬 - 국방군사연구소장

 

   서 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군]이 창설된 지 어언 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우리의 국군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안으로는 조국을 지키는
파수꾼일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군대로 성장하였다.

 

   원래 국군의 모체는 미 군정청이 설립한 [경비대]였다. 일본이
물러간 후에 이 땅에는 정상적인 국방기구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한에 진주한
미 군정청이 [국방사령부]를 설립하면서 그 예하에 [군무국]을 두고 [육군부]와 [해군부]를
편성하는 한편 경비대를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건군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경찰예비대(Constabulary Reserve)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부대가 오늘날 이처럼 막강한 국군으로 성장·발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조선경비대]가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때 부대의 편성과 함께 국군조직법(48.11.30)과
국방부직제(48.12.7)가 공포되어 국방부 산하에 육군본부와 해군본부가 설치됨으로써
법적·제도적인 체제도 완성되었다.

 

   이어서 1년 남짓한 기간동안에 육군은 8개 사단 22개 연대를
보유하는 전력을 갖추었으며, 해군은 인천,목포,묵호,부산,포항,군산,제주 등에 기지를
확대 설치하는 한편, 해군 내에 해병대를 창설하였고, 육군내에 있던 공군이 분리·독립하는
등 명실공히 육·해·공 3군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현재의 국군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던 바, 그 이후 국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건군 50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일이 될 것이며, 또한 과거를 살펴서 미래를 열어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Ⅰ. 건군 초기의 시련과 극복 (1948∼’53)

 

   국군은 건군 초기부터 괄목할만한 외형을 갖추긴 했으나, 사실은
현대전을 수행하기에 미흡한 전투력일 뿐이어서 이를 보완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부터 38도선에서의 분쟁이라든가 후방지역 공비의 준동, 군 반란사건
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여순반란과 대구반란 사건은 대단히 큰 충격이었다. 국군은
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숙군이라는 큰 홍역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공비소탕이 거의 완료되고, 숙군으로 군 내부가 정돈된
것은 불행중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창기에 우리 군이 겪었던 가장 큰 시련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이었다. 건군한지 3년이 되지 못한 때에 전쟁을 맞게 된 국군은
북한에 비해 병력면에서는 1:2, 장비상으로는 1:4정도로 열세한 상태였다. 특히 전차를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도 국군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침략자를 응징하고 적화통일의 야욕을 꺾었다.

 

   ‘아픈 만큼 큰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했던가. 전쟁
초기 10여만 명에 지나지 않았던 병력은 종전시에 72만 명으로 확장되었다. 동시에
전투장비의 확충은 물론, 장병들의 전투경험이 축적되고 지휘관들의 지휘능력도 향상되어
전쟁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요컨대 국군은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증강되고 성숙한 군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마치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Ⅱ. 전후의 정비 (1953∼’61)

 

   휴전이 되자 전시의 군대운영이 평시수준으로 되면서 양적으로
규모가 축소되는 대신 질적인 향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병력 삭감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9만 명을 감축하였다. 이 감군은 전쟁 동안에 팽창했던 군을 재정비하는
일대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투력 유지와 국가경제문제, 미국의 대한원조와 군 규모와의
관련성을 종합해서 고찰하고, 특히 장기적인 자주국방의 터전을 마련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감축과 정비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날로 변모하는 현대전의
양상에 부응하기 위한 새로운 장비의 도입과 군구조의 정비, 부대의 통폐합 및 재배치
등이 추진되었다. 국가경제와 군원의 테두리 안에서 그 편성과 장비를 현대화한다는
방향으로 전투력 강화가 추진되었던 것이다.

 

   1959년에 들어서 행정기구 개편이 단행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각군 본부의 [참모부장제(參謀副長制)]였다. 또 교육총본부에 예속되어 있던
각종 병과학교중 행정 및 기술병과학교, 여군훈련소 등이 육본에 예속되면서 상무대에
[전투병과교육사령부]가 창설되었고 보·포·기갑 등 3개 전투병과학교와 화학 및
항공학교가 이 사령부에 예속되었다. 이같은 조치는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방책일 뿐만 아니라, 기술학교의 교육책임을 해당 병과장이 직접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교육운영상의 균형 유지, 부대실정에 맞는 교육 실시, 전문적인 분야에서
새로운 교리와 신장비 도입에 따르는 교육 실시에 도움이 되었다.

 

   Ⅲ. 국방체제의 확립 (1961∼’72)

 

   5.16혁명이 일어난 후 혁명정부는 국방정책면에서 일대 혁신을
도모하기로 하고 우선 국방기구 정비·개선에 착수하였다. 또한 전력의 강화책으로
전투장비를 현대화하는데 주력하여 신형장비를 도입·교체해 나갔다. 교육훈련의
질적인 향상에 치중하는 한편, 신병훈련소에서의 각종 기술교육과 전역 병사에 대한
영농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농촌진흥의 역군을 양성하는데 기여토록 하였다. 또한 장병의
정신무장 강화, 군수관리의 합리화, 급양향상에도 주력하였다. 이 시기 군은 정부
각 기관의 행정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현역장병을 지원하는 한편, 기동수단을 제공하였고,
혁명재판소 설치, 거리의 폭력배 일소, 병력기피자를 적발하여 국토건설사업에 동원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이 기간인 1966년 북한은 소위 4대군사노선을 채택하고, 무력수단에
의한 통일을 부르짖으면서 1968년을 전쟁준비의 해로 설정하더니 1·21청와대 기습사건과
[프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의 도발적인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국군은 무장공비에
대비한 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휴전선 침투로를 봉쇄하기 위해 대간첩작전용 장비와
중요군사시설 보호기재 등을 일선부대에 배치하였다. 또 휴전선의 철조망과 방책시설을
보강하는 한편 주요 예상침투로에는 자동전자방책을 설치하였다.

 

   특히 향토방위에 주안을 둔 게릴라전 대비와 전시동원을 통한
전면전 대비라는 2대 사명을 띠고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전면전에 있어서는
방위전략의 방향이 기동방어로부터 고수방어로 변경되었으며, 군의 전력강화를 위해
현대적인 장비가 도입되고 2개 기갑여단이 창설되었다. 북한이 저지른 사건은 결국
전쟁방지를 위한 한·미간의 비상한 조치를 자극하고, 북한 도발에 대비한 전면전
태세를 갖추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70년 한·미 국방각료회의에서 주한미군의 감축과 한국군
장비현대화 방안이 논의되어 한국군 장비현대화 5개년계획과 미군 1개 사단 감축이
타결되었다. 주한 미 제7사단이 철수하고 휴전선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던 미 제2사단은
후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휴전후 처음으로 휴전선 전체의 방어를 한국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있었던 월남전 파병은 우리 국군사(國軍史)의 한
획을 긋는 일이다. 월남 정부의 요청에 의거 우리 나라는 1964년부터 인력을 월남에
파견하기 시작하여 수도사단(맹호부대), 해병 제2여단, 군수지원사령부, 보병 제9사단(백마부대)
등 연인원 31만여 명을 파병하였다. 이들 주월 한국군은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을
격멸 또는 축출하여 월남국민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대민지원 및 민사심리전을
수행하여 한·월간의 친선유대를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월남전 참전이 국군의
전투경험 축적 및 군 현대화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피지원국이었던
우리의 위상이 지원국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4. 자주국방의 기반 조성 (1972~'80)

 

   1970년대에 들어서 한국은 닉슨의 [괌독트린]으로 표현된 미국의
전략 변화에 따라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냉혹하고
절박한 현실에 직면하였다.

 

   국군은 이에 부응하여 1970년부터 1975년까지를 대상기간으로
한 독자적인 방위전략 개념을 구상하였다. 창군 이래 처음으로 작성된 국군방위전략의
기초가 되는 기본군사정책은 ‘한국의 자주적인 국방태세를 확립하고 북한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견지하여 북한의 도발행위에 대처하는 한편, 자유우방과의 군사적 유대를
공고히 하여 국토를 통일할 태세를 굳건히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군 당국은 주변정세의 변화에 부응하여 1974년부터
자주적 [전력증강(율곡)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전력증강계획은
세 가지 기본요소를 전제로하여 작성되었는데, 첫째는 앞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전략개념에
기초한 전략적 요소, 둘째는 가용자원, 셋째는 장비 및 물자의 획득 가능성이었다.

 

   제1차 전력증강계획은 ‘방위전력증강’을 위주로 추진한 데
비해, 제2차 계획은 방위전력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자주적 억제전력건설’에
중점을 두었다.

 

   1978년에는 [한·미연합사령부(Combined Forces Command :
CFC)]가 정식으로 발족됨으로써 30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미 안보협력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연합사령부의 설치는 양국이 장차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와
관련하여 작전지휘체제를 효율화하기 위해 마련한 조치로서 양국군의 방위노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합함으로써 한국의 방위력을 증진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군은 서부지역의 방어력을 보강하고 한·미 제1군단의 임무
종료에 대비한 지휘체제를 조정하기 위하여 주월군 철수 시기인 1973년에 [제3군사령부]를
창설하였다. 또 1968년 무장공비의 대량 침투사건 이후 보다 효율적인 대침투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태별·지역별로 지휘 및 협조체제를 단일화하고
국가 주요시설 및 주요 취약지역을 특정경비지역으로 설정하여 지역내의 대비정규전
작전요소를 통합하여 지휘체제를 일원화하였다. 또한 GP 및 GOP와 해안경계 전담부대를
창설·운용함으로써 지상, 해상 및 공중침투에 대비한 고도의 경계태세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동해안의 방어를 위해 1975년에 [동경사]를 증편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Ⅴ. 현대전을 위한 도약 (1980∼’90)

 

   1980년대 초는 10·26사건 이후 학원소요, 전국비상계엄, 광주사태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던 때였다. 이 시기에 북한은 지상군 전력의 65%를 전선으로
전진배치하여 남한에 대한 기습공격태세를 갖추는 한편, 전격전 능력을 지닌 부대로써
속도전을 전개할 양상을 보여주었다.

 

   군은 이렇게 증대된 위협에 대비하는 한편 공세적 방어개념의
구현에 중점을 두어 지휘체제를 개선하고 부대운용개념을 발전시키는 등 작전계획을
보완하였다. 즉, 전방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서부지역과 동해안 방어체제를 보완하고
종심방어선을 강화하는 한편, 반격작전계획을 시행할 기동군단을 편성하였다.

 

   또한 주요거점에 부대를 상주시키고 선단거점에는 장벽을 설치하며
탄약을 진지로 추진하고 진지투입시간을 단축하는 등 초전대비태세를 갖추었다. 동시에,
야간전투장비와 조명탄 등을 확보하고 훈련을 강화하여 야간전투에도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개최된 ASTA, IPU, IMF, 86아시아경기대회,
88서울 올림픽대회 등 국제행사에 대한 북한의 방해책동을 예상하고 그 대비책을
갖추었다. 아울러 취약한 국가중요시설에 대한 방호태세를 강화하고 대비정규전 훈련을
내실화하는 등 대비정규전 작전태세를 확립하였다.

 

   월남이 공산화된 이후 북한의 군사력 증강의 가속화, 소련극동군의
군비확장 등 한반도의 주변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한·미 양측은 이에 대처하기 위한
전쟁억지력 확보방안의 일환으로 연합훈련과 연습을 강화하였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북한의 위협이 더욱 증가됨에 따라 한국방어계획과 연관시켜 공격위주의 훈련에 주력하고
그 규모와 참가부대를 확대함으로써 이 훈련은 한국방어를 위한 전력증강과 한반도에
있어서의 전쟁 억지력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주요 훈련은 [을지/포커스렌즈 지휘소연습],
[독수리훈련], [팀스피리트훈련] 등이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국제적 안보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자주적
군사전략을 구현할 수 있는 군사력 건설이 요구되어 1988년부터 [장기국방태세 발전방향(818계획)]의
연구에 착수하였고, 그 결과 1990년 국군의 조직이 [자문형]에서 [통제형 합참의장제]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합참의장은 육군의 3개 사령부 등 10개 독립작전부대와 국군정보사령부
등 3개 직할 합동부대의 작전지휘 감독권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장차 작전통제권
인수시에도 공백없이 원할한 통합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조성하게 되었다.

 

   군은 지휘계통을 단순화하고 유사기구 통폐합, 고급사령부의
소수정예화, 행정부서 병력수준의 최소화를 단행하는 한편, 병과별로 운용하던 학교기관을
전투·기술·행정기능으로 구분하여 지역별로 통합관리하도록 개선하였다. 이와같은
조정으로 절감되는 병력은 ‘초전대응전력’을 건설하는데 충당하도록 함으로써 기간중
많은 부대의 증·창설이 이루어졌다.

 

   또한 적의 기습공격을 격파하고 역습 또는 공세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기동전력의 증강이 요구되었는데, 군은 북한에 비하여 수적으로 열세한
기갑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세계적으로 성능이 우수한 한국형전차, 한국형장갑차를
개발하고 헬기도 대폭 증강시켰다.

 

   이 밖에도 화포의 성능 개선, 기동성 높은 자주포 증가 배치,
다연장 로케트 및 중거리 지대지유도탄 개발을 추진하였다. 방공전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호크의 성능을 개량하고 발칸포와 휴대용 유도무기 증강에도 중점을 두었다.

 

   Ⅵ.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국군 (1990∼현재)

 

   1990년대에 이르러 완벽한 영공방위를 위해 1991년에 육군방공포병을
공군으로 전환한데 이어 그 다음해에는 합동참모본부 조직을 기존 4명의 [본부장중심제]에서
7명의 [참모형부장제]로 개선하는 등 군 상부조직과 기능을 재조정하였다. 이와함께
국방부 본부의 기구도 국방정책실, 기획관리실, 제1차관보, 제2차관보 등 4명의 차관보제로
개편하였다.

 

   이 시기에 획기적인 일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에 이양했던
작전통제권 중에서 [평시작전통제권]을 1994년에 환수한 것이다. 이로써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회복한다는 측면과 우리의 국방을 스스로가 책임진다는 원칙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위기관리 능력 제고와 자주적인 합동군사기획
및 통합군사력 운용체제의 조기완비를 위해 1995년 국방부·합참·각군 본부의 조직
및 기능체계를 보완하였다. 또 1997년에는 방위력 개선사업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방부에 방위사업실, 합참에는 전력평가참모본부를 신설하였다.

 

   1993년에는 해군본부가 [계룡대]로 이전함으로써 육·해·공군
본부가 단일 지휘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연차적으로 해병대사령부가 신청사로
이전하였고, 각기 분산되어 있던 각군 대학들과 국군 군의학교와 국군 간호사관학교
등이 [자운대]로 이전하였다.

 

   제2차 율곡사업에 이어 방위력 개선사업 추진 결과, 지상군은
공세적 기동전 수행이 가능하도록 수 개의 보병사단을 기계화사단으로 개편하면서
한국형전차·장갑차와 신형화기로 보강함으로써 전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해상전력은 국내기술로 건조한 잠수함과 구축함을 보유하는
한편, 해상작전 헬기를 확보함으로써 해상작전 수행의 효율성을 증대시켰다. 또한
해병대에 상륙돌격장갑차를 장비케함으로써 작전임무 수행이 원할하게 되었다.

 

   항공전력은 [한국형 전투기사업(KFP)]에 의해 F-16전투기 총
120대를 확보한다는 목표 아래 사업을 추진하여 1997년에는 국산기 제1호가 출고되었다.

 

   한편 우리 군은 1995년부터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해
왔다. 그리하여 유엔평화유지군(PKF) 및 군 감시단(MO) 활동을 소말리아, 서부사하라,
앙골라, 그루지아, 인도·파키스탄에서 펼쳤다. 특히 인도·파키스탄 PKO단장에 한국군
장군이 파견되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러한 군의 활동이 국제사회에서
우리 나라와 국군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결 어 : 21세기를 향한 국군

 

   창군 이후 50년이 경과하는 동안 우리의 국군은 이처럼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결과, 이제 국군은 ‘대한민국의 군대’일 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군’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국군은 [국토방위의 보루], [국가안보의 전위]로서,
그리고 [국민의 군대]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통일의 주역]으로서 우리의 주적(主敵)인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여 계속적인 전력증강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미래를 열어갈
세계적인 군대로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그 힘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