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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 - 제 5중대의 불운

by 충실한 해병 2022. 11. 28.

제 5중대의 불운 

                                                                          - 목차 -
                                                              1.  개 요
                                                              2.  제5중대의 임무
                                                              (1)  방어진지 구축
                                                              3.  제5중대 진지에 적의 포탄 낙하
                                                              (1)  구원의 손길
                                                              4.  韓美 步,戰 연합정찰
                                                              (1)  87m고지
                                                              (2)  전투 중의 지휘관의 책임
                                                                1)  구원의 손길
                                                              (3)  공격 시 소대장의 위치
                                                              5.  두 중대장(해간 3기)의 전사
                                                                         - 끝 -   
한국전쟁 중 중동부전선에서 북한군과 전투, 소탕전 중에 있던 해병 제1연대는 1952년3월17일을 기해 서부전선, '임진강'너머의 경기, 개풍군의 '장단, 사천강'지역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이때 이 지역에는 중동부전선에서 우리와 대치한 바 있는 중공군이 배치되어 한국 육군 제1사단과 조용한 가운데 대치하고 있었다. 
                             
위의 상황도는 한국전쟁 중 1952년3월18일부터 휴전 시(1953.7.27)까지 해병 제1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장단, 사천강'지역 방어배치도이며 이때 제5중대(중대장 이근식 중위 해간 3기)는 좌일선대대(제2대대)의 좌일선중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87m고지'는 좌일선대대 전방 멀리에 보이는 전초표식으로 위치 표식이 되어 있음.
                       
오늘 날의 좌일선대대 전면의 사진으로서 전쟁 당시의 흔적은 보기 힘드나 북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임진강'과 중앙 좌측편으로 '사천강'이 북에서 남쪽, '임진강'으로 합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음. 오른쪽으로 '임진강'철교(자유의 다리)를 京義線이 통과하여 '도라산'역(155m고지)으로 연결되어 있음. 좌측대대 전방의 '87m고지'는 초록색 지역의 전방의 '사천강'으로 가까히 돌출한 오른쪽 돌출부분에 위치하고 있음.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 노란선은 휴전선임.
 
1.   개 요
 
중동부전선에서 우리 해간 3기생들은 전부 일선소대장들이었는데 이곳 서부전선('잔단, 사천강'지역)에서는 대부분이 일선중대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간부후보생과정을 마치자 곧 중동부전선에서 전투 중인 해병 제1연대로 배치되어 1951년2월23일 이후 줄곧 제1대대제2중대3소대장으로서 각종 전투(6개 전투)에 참전했었다.
 
특히 해병대 5대전투의 하나인 "도솔산 전투(1951년6월7일)"에서는 공격 중 왼쪽 무릎관절에 파편창으로 부상당하여 鎭海의 해군병원에 1개월 간 입원했다 퇴원 후 당시 鎭海에서 신편된 4.2"중포중대에 배치되어 같은 해인 1951년9월 하순에 다시 중동부전선의 제1연대로 출동하였다.
 
나는 뜻밖에 "도솔산 전투" 시의 전공으로 미국정부로부터 미국 은성훈장(U.S. Silver Star Medal)을 수여받았다. 이때 "도솔산 전투" 시의 전공으로 해간 3기생, 소대장 3명에게 '미국 은성훈장'(US Silver Star Medal)이 수여되었다. 수상자는 제11중대의 선임장교인 金益泰 소위, 제9중대의 화기소대장인 吳定根 소위와 나, 제2중대 3소대장 등이었다.    
                                         
 
나는 해병 제1연대가 서부전선으로 이동(1952년3월18일) 후 같은 해 5월 하순에 4.2"중포중대 선임장교에서 제2대대 제5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제2대대장은 朴成哲 소령, 부대장에 金洛天 대위. 작전장교에 朴正模 대위였으며 이때의 제2대대의 중대장들은 제5중대장, 河鏞守 중위, 제6중대장, 金景山 중위 및 제7중대장에 安澈煥 중위 등으로 전부 나의 동기생들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제5중대장직을 인계한 하용수 중위는 이상한 인연으로 1962년 11월에 제1연대 제2대대장직을 나에게 다시 인계한 일이 있다.
                                       
                                        제5중대 중대장(우측) 이근식 중위  선임장교 김을상 소위 - 1952.8.7 - 
 
제5중대 선임장교는 金乙祥 소위, 1소대장에 尹紀泂 소위, 2소대장에 朴揆淡 소위, 3소대장에 左炳玉 소위였고 박격포소대장은 鄭時俊 소위 및 화기소대장에 姜商煥 소위 등이었다. 얼마 후 3소대장은 전출하고 吳一水 소위가 임명되었다.
 
소대장들은 3소대장을 제외하고 전원이 온순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는데 3소대장은 경상도 사나이 기질이 있어서 성격이 좀 강한 면이 있었다. 이 좌병옥 소위는 '5.16 군사 구테타' 당시 김포반도에 배치되어 있던 해병 제2여단(여단장 金潤根 준장)소속에서 5.16 '구테타'에 가담하여 주체세력이 되었다. 당시 여단 참모장은 朴成哲 대령, 연대장은 朴承道 대령이었다.   
 
                         50년 세월의 변화 ( 좌측 선임장교 金乙祥 소위, 우측 중대장 李根植 중위)
                            
                                 2002.11 서울에서 (좌측이 당시의 선임장교  중앙이 당시의 중대장)
 
2.   제5중대의 임무                                                      
 
제5중대의 임무는 해병 제1연대 좌일선대대(제2 대대)의 좌측방, 즉 좌일선대대의 노출된 측방에 배치되어 '장단면' 건곡리일대의 漢江과 臨津江이 합류되는 넓은 지역(개활지)을 적의 침투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었다.
 
 (1)   방어진지구축
제5중대의 방어진지는 50m 높이의 암석으로 구성된 낮은 지대여서 방어진지 구축에 꽤 어려움이 있었다. 더욱이 지형이 암석으로 구성돼 있어서 교통호를 팔 수 없기 때문에 주변일대에 산재해있는 돌을 사낭과 함께 겨우 허리 높이까지 쌓을 수 있어서 교통호로 사용하기에는 이용 가치가 전혀 없었다.
 
중대장인 내가 보기에도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전혀 실용가치가 없는 그런 방어진지였다. 이러한 취약한 방어진지 상태를 나는 제5중대장을 교대 후에 처음 알게 되어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엉성했던 방어진지를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이다.
 
교대 직후 진지 보강작업에 박차를 더욱 가했으나, 심지어 중대장도 삽으로 대원들과 함께 땅을 팠는데 손바닥에 물집만 생기고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만 조급했을 뿐 진지공사는 그리 쉽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때 비로서 나는 전임 중대장(河鏞守 중위)의 이 제5중대의 방어진지에 대한 급하고 답답했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 만일 중공군이 야간에 공격해 오면 우리는 돌파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대대 후방에 있던 '임진강'철교가 중공군의 수중에 만일 넘어 갔으면 아마 한국전쟁의 양상도 달라졌을 것이다. 정말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을 뻔했다. 추측컨대 대대작전장교는 한번도 이런 현황을 직접 와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대대장도 물론 진지 현황 파악도 않했을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이때 해병 제1연대는 서부전선으로 이동 후 3개월이 지났을 때였는데 이런 연대 좌측방의 노출된 취약 지점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비해 개활지역이 되어서 너무나 안일한 생각으로 무관심했거나 또는 눈 앞에 보이는 상황에만 집중하다 보니 연대 정면 전체의 상황에는 무지해서였을 것으로 나는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일선대대 정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전투(67m고지)로 인하여 연대 좌측방 깊은 지역이 무방비로 노출되다 싶이 되어 있는 넓은 개활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쓰고 있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상급 지휘관(대대장)의 책임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때 내가 중대장으로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공군의 침투에 대비해 자동화기용  최저표적 사격진지를 산록하단 일대에 여러개 구축해 놓고 매일 밤새 적의 야간침투에 대비해 경계하는 것 뿐이었다. 주간에는 중대 전원이 진지 보강작업을 계속 하여야 했고 또한 야간에는 경계근무를 계속하여야 했기 때문에 주간은 잠을 자거나 또는 쉬어야하나 계속된 진지작업에 대원들도 지칠 수밖에 없었으니 생각할 수록 한심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대대장이나 대대작전장교의 할 일이 무엇인가?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한숨을 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해서 중대장은 책임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발견하고도 적절한 조치, 상급부대에 강력히 건의하여 진지 보강방안을 수립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투 시의 지휘관의 책임이 막중한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못한 것 같았다. 너무 젊어서 였을 까? 나는 그때 22세의 약관이었다. 그런 긴장 속에서 적과의 접전도 없이 매일 매일을 긴장 속에서 보내고 있는 가운데 내가 중대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제2대대는 연대예비대가 되어 부대정비와 병력의 휴식을 목적으로 L.V.T.(Landing Vehicle,Tracked)로 한강을 넘어 김포지역으로 이동하였다. 
 
金浦지역에서도 예비중대(제5중대)지역내에 있던 대대장의 숙소에서 누군가 대대장의 군화를 김바이(훔치다, 일본어)했는데 그것이 제5중대 대원이 틀림없다는 대대장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나는 화가 치밀어서 중대 전원을 집합시켜 일장 훈시를 하고 중대 전원, 장교 포함해서 주먹으로 얼굴을 한대씩 갈긴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건 중대장이 아니라 무슨 깡패 두목인 것 같기도 했다. 약 1개월 간의 부대정비와 휴식을 마치고 제2대대는 다시 '장단, 사천강'지역으로 이동하여 연대 좌일선대대로 전방에 투입되었다.  
 
좌일선대대로 재배치 된 제2대대는 제6중대(중대장 金景山 중위) 및 7중대(安澈煥 중위)를 전방에 일선배치하고 제5중대를 대대예비대로 전방진지 후방, 적으로부터 낮은 능선으로 은폐된 지역에 소대별로 개인천막으로, 중대본부는 분대천막을 치고, 분산 배치하고  1개소대(3소대)를 임진강 철교 경비로 차출했다. 얼마 동안 제5중대는 대대예비대로서 逐次陣地 공사를 하면서 편안한 일과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 간에도 우일선대에서는 매일 숙적 중공군과 '67m고지'를 중심한 전초진지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의 해병 제1연대 정면의 전투는 대부분 우일선대대의 4개 전초진지에서의 전투였다.
 
중공군이 넓은 개활지를 통과하여 해병대 진지를 공격했다는 것은 그들이 해병대보다 어느 면에서는 전투력이 강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반면에 해병 제1연대는 그때까지만 해도 한번도 중공군같은 공격적인 전투를 '사천강'너머의 중공군 진지 지역에서 한 일이 없었다. 이때 그들은 우리와같은 전초진지를 운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해병들도 멀지 않은 장래에 그들과 혈전을 벌여야 할 때를 기다리면서 칼을 갈고 있었다.
 
3.  제5중대 지역에 적의 포탄 낙하
 
7월 중순 어느 날 아침 나는 아무 생각없이 08:00시경 '임진강'철교 경계를 위하여 차출된 3소대를 순찰하기 위하여 Jeep를 몰고 중대지역을 출발하였다. '임진강'철교는 거리상으로 Jeep로 약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3소대원들의 경계근무 상태를 점검, 확인 후 겸사 겸사해서 약 5분 거리에 있는 연대 본부의 미 고문관실로 미국인 친구를 만나려고 Jeep를 몰고 연대 본부로 갔다.
 
이 미 고문관은 4.2"중포중대 고문관 출신이다. 연대 본부에 도착하니 마침 그 미군 고문관이 밖에 나와 있었는데 나를 보자 "Lt. Lee 지금 제5중대 지역에 적의 포탄이 낙탄 중"이라고 말했다. 물론 영어로 말한 것이지만 나는 설마 했다. "내가 지금 거기서 막 오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는 "Right  now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중" 이라고 다시 말했다.
  
나는 Jeep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막 바로 전속력으로 중대지역으로 돌아왔다. 중대 지역일대에 적의 포탄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소리로 봐서 적의 야포사격이었다. 이때 중대본부 천막은 포탄에 이미 날라갔고 그 옆에 있던 중대장 개인천막도 함께 날라가서 보이지 않았다. 적의 포탄이 중대 본부에 명중한 것이다. 물론 본부요원들의 사상자도 발생했다. 그러나 다행한것은 소대지역에는 한발도 떨어지지 않고 중대본부에만 한발이 떨어졌을 뿐 그 외에는 10여 발이 중대 숙영지 오른쪽 지역에 떨어졌다.
 
이때 만일 나도 중대본부 천막에나 혹은 중대장 개인천막에 있었으면 천막과 함께 날라가 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 현장을 보고 아찔했다. 적의 포탄은 내가 중대본부를 떠난지 10분 정도 후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정말 나로서는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나는 3소대('임진강' 철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중대 본부요원들이 피해를 입었으니 나는 나의 기적과같은 전운을 좋아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전사자 중 한명은 새로 부임한 작전장교(李東用 대위)의 전령이었는데 특별히 자기 전령이 중대로 가고 싶다해서 제5중대로 보냈으니 행정능력도 있고 똑똑하니 본부에서 근무시켜달라고 나에게 당부하기 때문에 중대본부에서 근무하도록 했는데 근무를 시작한 다음날에 참변을 당한 것이다. 오히려 그 대원이 소대에 배치되었으면 이런 불행한 일은 당하지 아니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걸 보고 과연 "인명은 재천이라"하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도솔산 전투" 에서의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동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공격 중 적의 저격병이 3~40m되는 거리의 산정에서 나를 저격했는데 나는 나의 복부(배꼽 바로 밑)를 피격당했으나 상처 하나 입지않은 기적같은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이 당시 부산에서 발행되던 自由新聞(申翼熙 발행)의 사설로 기사화되어 세상에 알려진바 있었다. 참조: 해병대 전투(1) "도솔산 전투" 
 
(1)  구원의 손길
아침에 내가 3소대의 '임진강'철교의 경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 중대지역을 떠난 것은 무슨 사전 계획에 의한 나의 행동이 아니라 갑자기 그곳으로 가 봐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떠난 것이 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났으니 마치 내가 적의 포탄이 이 지역에 떨어질 것을 미리 알고 떠난 것 같이 생각될 수도 있었다. 그 10분이 나를 살린 것이었다. 이걸 보고 나는 무슨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때에 나는 미처 생각못했지만 내가 이런 위기를 면한 것은 나를 항상 내가 위기 속에 있을 때마다  나를 도와준 그 구원의 손길의 도움이었다. 그것은 이날 뿐만 아니라 "도솔산 공격"  시에도 적탄에 복부를 정통으로 맞고도 상처 하나 입지아니한 기적같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누구든 믿을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을 한번 당해 보라.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떻게 적의 관측으로부터 우리 지역은 사각인데 적에게 관측되어 포격당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지역은 대대에서 선정해 준 지역이었다. 나는 이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중대원들이 절대 주변의 높은 능선에는 올라가지 않도록 단단히 주위를 주었고 대원들도 나의 지시를 잘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적과의 거리(관측)도 10km나 되고 쌍안경으로도 관측이 어려울 정도인데 어떻게 관측했을까?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지역이 적에게 노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제5중대의 불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4.   韓美 步,戰연합정찰   
 
8월초 제5중대는 대대로부터 미 해병사단의 전차중대(20대)와 한국 해병대 전차소대(5대)와 연합으로 대대 전방 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사천강'변의 '87m고지'까지의 구간의 개활지 일대를 전투정찰 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제5중대 인원도 이에 따라 120명 출동 준비를 마쳤다. 날씨는 아주 쾌청하여 시계도 좋았다. '87m고지'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4km 정도이나 전차 통로는 기성 도로인 농로밖에 없었고 도로 양측은 밭으로 되어 있어서 무거운 전차가 기동하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출발 전 나는 대대 작전장교로부터 자세한 사항을 지시받았어야 되는데 이 지역은 우리가 잘 알고있고, '87m고지'까지는 아직 적의 활동이 보고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대략 준비하고 출발했다. 
 
전차는 도로를 따라서 기동했고 우리 해병들은 각 전차를 중심하여 좌우로 산개해서 '87m고지'까지의 지역일대를 샅샅이 수색하면서 진출했으나 아무런 적정도 발견할 수 없었다.
                         
                                     87m고지까지의 한, 미 보전연합작전 중인 제5중대 -1952년8월 -
 
(1)   87m고지
'87m고지'는 위치상으로 중공군 진지와 좌일선대대 진지의 대략 중간지점에 위차하고 있으며 그 앞을 전연 장애물인 '사천강'이 북에서 남(한강)으로 흐르고 있었다. 또한 그 너머에 배치되어있는 적을 관측할 수 있는 지점에 '87m고지'가 위치하고 있으나 주저항선 진지로부터 너무 원거리라는 취약성 때문에 최초 이곳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해병대의 주저항선 진지와 '87m고지' 간의 약 4km의 지역 공간은 무방비인 진공 상태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의 보병, 전차 연합 수색정찰도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작전의 일부였다. 이때 '사천강'너머의 적은 높은 산정에서 우리의 활동을 관측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목표지역까지 도착하여 전차는 '87m고지'를 중심하여 양측에 보병과 함께 배치하고 '87m고지' 정상에 해병들이 이전에 파 놓은 관측호 속에  들어가 적정을 관측하고 있는데 적의 박격포 포탄이 우리 주변에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공군이 높은 고지에서 우리의 활동을 계속 관측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적의 박격포 사격은 정확하였다. 사전에 사격제원을 산출해 놓고 사격하는 것 같았다.  
  
나는 미 해병대 전차중대장에게 적 진지에 전차포 사격을 요청했다. 적 진지까지의 거리는 2.000m 정도다. 미 해병대 전차 몇대에서 적진을 향해서 사격을 개시했다. 해병들은 적의 포사격에 대비해 충분히 산개시키고 사주경계를 하도록 했다.
 
'87m고지'로부터 '판문점까지의 직선거리는 12km 정도인데 적의 122m 야포탄은 날아오지 않았고 '사천강' 너머의 적의 진지로부터 박격포 포탄만 날아왔다. 약 20분 간 우리는 적의 진지에 전차포 사격을 하고 부대로 되돌아오기 시작햇다.
 
돌아올 때는 적정도 없었고 또 해병들의 피곤도 덜해 줄 목적으로 대원들을 전원 전차 한대에 4-5명씩 탑승시켰다. 중대지역로 돌아올 때도 실은 원칙대로 중대에서 출발했을 때의 산개된 대형을 유지해야 했으나 해병들의 피곤을 덜어 주고 또한 진지로의 복귀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해병들을 전차에 탑승시킨 것이 의외의 재앙을 우리에게 가저오게 했다. 이것은 중대장의 인정에 끌린 판단 착오였다.  
 
(2)   전투 중의 지휘관의 책임
지휘관의 책임과 그 판단력이 특히 전투 중에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이 여기서 실증된 셈이다. 전장에서는 전쟁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재삼 나는 여기서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엇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었다.
 
나는 중대장 전차에 전령과 무선통신병 그리고 선임하사관과 함께 탑승했다. 귀대 중 전차들은 잘 기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좌일선대대, 주저항선 진지 가까이에서 농로를 따라 기동하고있던 전차 중 선두전차가 갑자기 멈쳤다. 기계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선두 전차가 멈추게 되니 전차대열 전체가 기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농로 양측은 밭으로 돼 있어서 무거운 전차가 기동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내가 탑승하고있는 중대장 전차는 두번째였다. 앞으로 5분 정도면 우리는 전방진지를 통과하게 되는 그런 시간대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 와서 고장났담" 하면서 우리는 속도 상했지만 곧 고장수리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전차에 탑승한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약 2-3분 정도 지나서 고장났던 선두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  구원의 손길
그 순간 멀리 '판문점'방향에서 "쿵.쿵."하는 포성(122m 야포)이 여러발 들렸는데 나는 그 포성을 듣고 그 포성이 우리를 향한 포성인줄은 생각지도 않했다. 그것은 '판문점'은 인접부대인 미 해병사단 전면에 위치하고 있었고 거리도 10 km 이상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포성을 들으면서 출발해서 약 10-15초 정도(약 15m 거리) 지났는데 적의 포탄이 우리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바로 우리 뒤에서 포탄이 떨어진 "쾅"하는 큰 폭음이 들렸다. 그 폭발 소리를 듣고 순간 뒤돌아보니 비통하게도 그 첫발이 내가 탑승하고있는 중대장 전차가 서 있던 바로 그 위치에 뒤따르던 전차가 들어서는 순간 그 전차에 명중한 것이 보였다. 순간 그 위에 탑승하고 있던 해병들 5명 전원이 산산이 되어버렸다. 전원이 전사한 것이다. 그들은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위해 그 들의 하나 뿐인 귀한 생명을 받친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10초(거리상으로 10m 정도)라는 짧은 시간에 의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포탄이 전차에 떨어지는 순간에 날아갔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타고 온 전차들은 전부 전차의 Hatch를 닫고 그대로 고속으로 가버렸다. 우리 해병들은 전차에 포탄이 낙탄하는 순간 전부 하차해서 대대진지로 뛰어갔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여서 나는 정말 어처구니 없었다. 곧 구급차가 오고 Helicopter가 날아오고 하여 그 일대는 순식 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이 상황은  전투 시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결과가 얼마나 큰 희생을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기도 했다.
 
나는 이 큰 희생을 보면서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완전히 잊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그 처참했던 장면을 54년이 지난 오늘날도 잊을 수가 없어  참담한 심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구체적으로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도솔산 공격" 중의 나의 공훈보다 더욱 무거운 상처로 아직껏 나에게 남아있다. 이런 속에서 나의 성격의 변화가 나도 느끼지 못하고 또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의 나의 강성적인 성격이다. 이런 시련을 통해서 나는 무엇이 건 원칙대로 한다는 생활신조를 갖게 된 것 같다. 
 
그후 나는 8월 하순에 연대작전보좌관으로 발령이 났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 연대작전보좌관의 직책은 당시의 중위급 장교면, 전부 중대장을 마치고 가기를 소원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발령이 난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 나를 연대작전보좌관으로 추천했거나, 혹은 요청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발령이 날 수 없는 보직이다.
 
나는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대대장과의 이임인사 대화 중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그 발령 추천자는 부연대장인 남상휘 중령이었다. 그는 중동부전선에서 제1대대장으로 부임 직후에 나를 호출하여 나와 면담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와 전혀 면식이 없었다. 단지 그는 대대장으로 부임하니 "도솔산 전투"에서 제2중대 3소대장이 아주 용감하게 전투를 잘 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장교들로부터 듣고 이근식 소위가 어떤 장교인지 알고 싶어서 불렀다 했다.
 
그리고 후일에 기회가 있으면 함께 일해 보자고 나에게 말했었는데 그는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나를 연대본부로 발령낸 것이다. 나는 그 당시 그와 만난 사실도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제5중대의 지난 몇개월 간의 불운에 정신적으로 어려움 속에 있었던 나를 때맞게 연대본부로 발령해 주니 생각할 수록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이와같은 행운?에 비하여 제5중대의 불운은 나의 후임중대장인 권중달 중위의 전사로 이어졌다. 8월 하순 육군보병학교를 막 수료하고 전방에 배치되어 곧바로 전투 중에 있는 제5중대장으로 임명된 그는 나와 교대하면서 "야! 근식아. 똥뙈놈같은 것은 문제 없어" 하고 큰 소리를 친 권 중위는 그후 10월20일 중공군에게 점령당한 '87m고지' 탈환 야간공격에서 비통하게도 전사하고 말았다. 그는 일선소대장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전투는 오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우리가 전투하면서 터득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3)   공격 시 소대장의 위치
더욱이 소총소대장도 하지아니한 장교를 중위라하여 전투가 한참 치열한 전투부대의 중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상급부대지휘관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중공군이 산정에서 투척한 방망이수류탄에 의해 전사했다. 중대장은 전투지휘하는 것이지 적의 수튜탄에 의해 전사할 정도의 근접거리에서 소총병들과 함께 엉켜서 전투를 직접하는 것이 아니잖는가?
 
당시의 우리의 전투지휘 개념은 소대장이 맨 앞에서 소대를 직접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심히 잘못된 지휘 개념이다. 때문에 소대장의 전사확률이 아주 높았고 소대장이 전사하면 그 소대는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그 전투에서도 실패했었다. 이와같은 소대장의 전투지휘 개념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 소대장은 Leader가 아니라 Commander임을 알아야 한다.
 
소대장은 전투 중 맨 앞에서 앞장 서서 소대원들을 이끌고 적진에 돌입하는 것이 아니라 소대원, 전원이 적진에 동시에 돌입하게끔 소대를 적당한 위치에서 지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당시 제1대대장과 대대작전장교를 해군에서 해병대로 전과 후 육군보병학교에서 몇개월 간의 지상전술교육을 받았을 뿐 실병지휘경험이 전혀 없는 장교(H 소령과 P 대위)를 대대장과 대대작전장교로 임명하므로써 제1대대가 "장단지구 전투"에서 많은 해병들의 희생을 내고 전초진지 전부를 중공군에게 점령당하고, 심지어 제1대대장의 지휘권 포기까지하게 된 해병대 전사상 유레가 없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사유와 일맥상통한 실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5.   두 중대장의 전사(제6중대 선임장교 및 제5중대장)
 
10월 초에 있었던 중공군의 추계대공세에서 상실한 '87m고지'의 탈환전은 계속되었다. 10월 2일 밤 '87m고지' 방어책임자로 임명됐던 나의 동기생인 제2대대 제6중대 선임장교인 이성길 중위(해간 3기)는 중공군의 추기대공세에 수반하여 야간공격해 온 중공군과의 육박전에서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이런 사실은 그 당시 '87m고지'의 포병관측장교(박 소위 해간 6기)가 '87m고지'에서 야간공격해 온 중공군과 육박전 중 진내에서 중공군에게 생포되어 중공군 진지로 연행당하는 도중에 '사천강'변에서 중공군 장교를 허리춤에 휴대하고 있던 권총으로 사살하고 탈출한 후에 그때의 상황을 해병대 사령부 정훈감실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海兵'에 상세히 소개하므로써 그날 밤의 육박전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었다.
 
그날 밤의 전투(1952.10.2)에서 제2대대 제6중대는 그 전초진지(87m고지)를 중공군에게 잃었다. 그날 밤의 치열했던 전투 내용은 "해병대 전투 4('사천강'전투)"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음.
 
나는 아직껏 그 홍안의 소년같았던 우리의 동기생 이성길 중위의 얼굴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너무나 젊은 나이에 그는 갔다. 그때 그는 22세의 약관이었을 것이다. 그날 밤 많은 해병들도 그들의 지휘관과 함께 그들의 귀중한 목숨을 버렸다.

또한 나와 제2대대 제5중대장직을 8월 하순에 교대한 나의 동기생 권중달 중위(해간 3기)도 얼마 후(1952.10.20) 중공군에게 점령당한 '87m고지' 탈환을 위한 야간공격 중 '87m고지' 위로부터 투척한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에 의해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주간이라면 그 수류탄을 피할 수 있었겠지만  야간이라서 그는 그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날의 야간공격에서 해병들은 '87m고지' 탈환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수많은 이땅의 젊은이들이, 해병들이 그들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버린 것이다. 과연 누구를 위함이었던가? 그후 나는 전투단본부 뒷산에서 중공군의 '도깨비 불'같은 파란 기관총 예광탄이 '87m고지'에서 '50m고지'로 날라가는 것을 볼 때마다 '87m고지'전투에서 전사한 나의 두 동기생을 생각하며 슬퍼했다.
 
이때 나는 전투단 작전보좌관이었는데 내가 그대로 제5중대장이었으면 그 전사자는 나 일수 있다는 데에서 나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어떤 표현할 수 없는 자괴심을 갖게 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동작동 국군묘지, 해병대 묘역에 "고 해병 대위 권중달의 묘" 라고 쓰여진 묘비 아래에 이 나라와 이 겨례를 위하여 그들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한 우리의 해병들과 함께 잠들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인지 그의 묘비는 꽤 쓸쓸해 보였다. 그는 독신으로 그의 생애를 마쳤으니 찾아오는 인척도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단지 동기생인 우리만 매년 현충일에 그를 찾을 뿐이다.
                        

나는 그의 묘비 앞에 설 때마다 그것이 나일 수 있었다는 생각에 어떤 자괴지심과 자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가 나와 교대 후 "야! 근식아! 똥 뙈놈쯤은 문제 없어"하고 큰 소리를 친 것을 나는 아직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                                                    
 
oldmarine

제 5중대의 불운 

                                                                          - 목차 -
                                                              1.  개 요
                                                              2.  제5중대의 임무
                                                              (1)  방어진지 구축
                                                              3.  제5중대 진지에 적의 포탄 낙하
                                                              (1)  구원의 손길
                                                              4.  韓美 步,戰 연합정찰
                                                              (1)  87m고지
                                                              (2)  전투 중의 지휘관의 책임
                                                                1)  구원의 손길
                                                              (3)  공격 시 소대장의 위치
                                                              5.  두 중대장(해간 3기)의 전사
                                                                         - 끝 -   
한국전쟁 중 중동부전선에서 북한군과 전투, 소탕전 중에 있던 해병 제1연대는 1952년3월17일을 기해 서부전선, '임진강'너머의 경기, 개풍군의 '장단, 사천강'지역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이때 이 지역에는 중동부전선에서 우리와 대치한 바 있는 중공군이 배치되어 한국 육군 제1사단과 조용한 가운데 대치하고 있었다. 
                             
위의 상황도는 한국전쟁 중 1952년3월18일부터 휴전 시(1953.7.27)까지 해병 제1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장단, 사천강'지역 방어배치도이며 이때 제5중대(중대장 이근식 중위 해간 3기)는 좌일선대대(제2대대)의 좌일선중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87m고지'는 좌일선대대 전방 멀리에 보이는 전초표식으로 위치 표식이 되어 있음.
                       
오늘 날의 좌일선대대 전면의 사진으로서 전쟁 당시의 흔적은 보기 힘드나 북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임진강'과 중앙 좌측편으로 '사천강'이 북에서 남쪽, '임진강'으로 합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음. 오른쪽으로 '임진강'철교(자유의 다리)를 京義線이 통과하여 '도라산'역(155m고지)으로 연결되어 있음. 좌측대대 전방의 '87m고지'는 초록색 지역의 전방의 '사천강'으로 가까히 돌출한 오른쪽 돌출부분에 위치하고 있음.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 노란선은 휴전선임.
 
1.   개 요
 
중동부전선에서 우리 해간 3기생들은 전부 일선소대장들이었는데 이곳 서부전선('잔단, 사천강'지역)에서는 대부분이 일선중대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간부후보생과정을 마치자 곧 중동부전선에서 전투 중인 해병 제1연대로 배치되어 1951년2월23일 이후 줄곧 제1대대제2중대3소대장으로서 각종 전투(6개 전투)에 참전했었다.
 
특히 해병대 5대전투의 하나인 "도솔산 전투(1951년6월7일)"에서는 공격 중 왼쪽 무릎관절에 파편창으로 부상당하여 鎭海의 해군병원에 1개월 간 입원했다 퇴원 후 당시 鎭海에서 신편된 4.2"중포중대에 배치되어 같은 해인 1951년9월 하순에 다시 중동부전선의 제1연대로 출동하였다.
 
나는 뜻밖에 "도솔산 전투" 시의 전공으로 미국정부로부터 미국 은성훈장(U.S. Silver Star Medal)을 수여받았다. 이때 "도솔산 전투" 시의 전공으로 해간 3기생, 소대장 3명에게 '미국 은성훈장'(US Silver Star Medal)이 수여되었다. 수상자는 제11중대의 선임장교인 金益泰 소위, 제9중대의 화기소대장인 吳定根 소위와 나, 제2중대 3소대장 등이었다.    
                                         
 
나는 해병 제1연대가 서부전선으로 이동(1952년3월18일) 후 같은 해 5월 하순에 4.2"중포중대 선임장교에서 제2대대 제5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제2대대장은 朴成哲 소령, 부대장에 金洛天 대위. 작전장교에 朴正模 대위였으며 이때의 제2대대의 중대장들은 제5중대장, 河鏞守 중위, 제6중대장, 金景山 중위 및 제7중대장에 安澈煥 중위 등으로 전부 나의 동기생들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제5중대장직을 인계한 하용수 중위는 이상한 인연으로 1962년 11월에 제1연대 제2대대장직을 나에게 다시 인계한 일이 있다.
                                       
                                        제5중대 중대장(우측) 이근식 중위  선임장교 김을상 소위 - 1952.8.7 - 
 
제5중대 선임장교는 金乙祥 소위, 1소대장에 尹紀泂 소위, 2소대장에 朴揆淡 소위, 3소대장에 左炳玉 소위였고 박격포소대장은 鄭時俊 소위 및 화기소대장에 姜商煥 소위 등이었다. 얼마 후 3소대장은 전출하고 吳一水 소위가 임명되었다.
 
소대장들은 3소대장을 제외하고 전원이 온순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는데 3소대장은 경상도 사나이 기질이 있어서 성격이 좀 강한 면이 있었다. 이 좌병옥 소위는 '5.16 군사 구테타' 당시 김포반도에 배치되어 있던 해병 제2여단(여단장 金潤根 준장)소속에서 5.16 '구테타'에 가담하여 주체세력이 되었다. 당시 여단 참모장은 朴成哲 대령, 연대장은 朴承道 대령이었다.   
 
                         50년 세월의 변화 ( 좌측 선임장교 金乙祥 소위, 우측 중대장 李根植 중위)
                            
                                 2002.11 서울에서 (좌측이 당시의 선임장교  중앙이 당시의 중대장)
 
2.   제5중대의 임무                                                      
 
제5중대의 임무는 해병 제1연대 좌일선대대(제2 대대)의 좌측방, 즉 좌일선대대의 노출된 측방에 배치되어 '장단면' 건곡리일대의 漢江과 臨津江이 합류되는 넓은 지역(개활지)을 적의 침투로부터 방어하는 것이 었다.
 
 (1)   방어진지구축
제5중대의 방어진지는 50m 높이의 암석으로 구성된 낮은 지대여서 방어진지 구축에 꽤 어려움이 있었다. 더욱이 지형이 암석으로 구성돼 있어서 교통호를 팔 수 없기 때문에 주변일대에 산재해있는 돌을 사낭과 함께 겨우 허리 높이까지 쌓을 수 있어서 교통호로 사용하기에는 이용 가치가 전혀 없었다.
 
중대장인 내가 보기에도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전혀 실용가치가 없는 그런 방어진지였다. 이러한 취약한 방어진지 상태를 나는 제5중대장을 교대 후에 처음 알게 되어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엉성했던 방어진지를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이다.
 
교대 직후 진지 보강작업에 박차를 더욱 가했으나, 심지어 중대장도 삽으로 대원들과 함께 땅을 팠는데 손바닥에 물집만 생기고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만 조급했을 뿐 진지공사는 그리 쉽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때 비로서 나는 전임 중대장(河鏞守 중위)의 이 제5중대의 방어진지에 대한 급하고 답답했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 만일 중공군이 야간에 공격해 오면 우리는 돌파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대대 후방에 있던 '임진강'철교가 중공군의 수중에 만일 넘어 갔으면 아마 한국전쟁의 양상도 달라졌을 것이다. 정말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을 뻔했다. 추측컨대 대대작전장교는 한번도 이런 현황을 직접 와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대대장도 물론 진지 현황 파악도 않했을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이때 해병 제1연대는 서부전선으로 이동 후 3개월이 지났을 때였는데 이런 연대 좌측방의 노출된 취약 지점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비해 개활지역이 되어서 너무나 안일한 생각으로 무관심했거나 또는 눈 앞에 보이는 상황에만 집중하다 보니 연대 정면 전체의 상황에는 무지해서였을 것으로 나는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일선대대 정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전투(67m고지)로 인하여 연대 좌측방 깊은 지역이 무방비로 노출되다 싶이 되어 있는 넓은 개활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쓰고 있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상급 지휘관(대대장)의 책임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때 내가 중대장으로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공군의 침투에 대비해 자동화기용  최저표적 사격진지를 산록하단 일대에 여러개 구축해 놓고 매일 밤새 적의 야간침투에 대비해 경계하는 것 뿐이었다. 주간에는 중대 전원이 진지 보강작업을 계속 하여야 했고 또한 야간에는 경계근무를 계속하여야 했기 때문에 주간은 잠을 자거나 또는 쉬어야하나 계속된 진지작업에 대원들도 지칠 수밖에 없었으니 생각할 수록 한심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대대장이나 대대작전장교의 할 일이 무엇인가?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한숨을 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해서 중대장은 책임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발견하고도 적절한 조치, 상급부대에 강력히 건의하여 진지 보강방안을 수립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투 시의 지휘관의 책임이 막중한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못한 것 같았다. 너무 젊어서 였을 까? 나는 그때 22세의 약관이었다. 그런 긴장 속에서 적과의 접전도 없이 매일 매일을 긴장 속에서 보내고 있는 가운데 내가 중대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제2대대는 연대예비대가 되어 부대정비와 병력의 휴식을 목적으로 L.V.T.(Landing Vehicle,Tracked)로 한강을 넘어 김포지역으로 이동하였다. 
 
金浦지역에서도 예비중대(제5중대)지역내에 있던 대대장의 숙소에서 누군가 대대장의 군화를 김바이(훔치다, 일본어)했는데 그것이 제5중대 대원이 틀림없다는 대대장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나는 화가 치밀어서 중대 전원을 집합시켜 일장 훈시를 하고 중대 전원, 장교 포함해서 주먹으로 얼굴을 한대씩 갈긴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건 중대장이 아니라 무슨 깡패 두목인 것 같기도 했다. 약 1개월 간의 부대정비와 휴식을 마치고 제2대대는 다시 '장단, 사천강'지역으로 이동하여 연대 좌일선대대로 전방에 투입되었다.  
 
좌일선대대로 재배치 된 제2대대는 제6중대(중대장 金景山 중위) 및 7중대(安澈煥 중위)를 전방에 일선배치하고 제5중대를 대대예비대로 전방진지 후방, 적으로부터 낮은 능선으로 은폐된 지역에 소대별로 개인천막으로, 중대본부는 분대천막을 치고, 분산 배치하고  1개소대(3소대)를 임진강 철교 경비로 차출했다. 얼마 동안 제5중대는 대대예비대로서 逐次陣地 공사를 하면서 편안한 일과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 간에도 우일선대에서는 매일 숙적 중공군과 '67m고지'를 중심한 전초진지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의 해병 제1연대 정면의 전투는 대부분 우일선대대의 4개 전초진지에서의 전투였다.
 
중공군이 넓은 개활지를 통과하여 해병대 진지를 공격했다는 것은 그들이 해병대보다 어느 면에서는 전투력이 강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반면에 해병 제1연대는 그때까지만 해도 한번도 중공군같은 공격적인 전투를 '사천강'너머의 중공군 진지 지역에서 한 일이 없었다. 이때 그들은 우리와같은 전초진지를 운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해병들도 멀지 않은 장래에 그들과 혈전을 벌여야 할 때를 기다리면서 칼을 갈고 있었다.
 
3.  제5중대 지역에 적의 포탄 낙하
 
7월 중순 어느 날 아침 나는 아무 생각없이 08:00시경 '임진강'철교 경계를 위하여 차출된 3소대를 순찰하기 위하여 Jeep를 몰고 중대지역을 출발하였다. '임진강'철교는 거리상으로 Jeep로 약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3소대원들의 경계근무 상태를 점검, 확인 후 겸사 겸사해서 약 5분 거리에 있는 연대 본부의 미 고문관실로 미국인 친구를 만나려고 Jeep를 몰고 연대 본부로 갔다.
 
이 미 고문관은 4.2"중포중대 고문관 출신이다. 연대 본부에 도착하니 마침 그 미군 고문관이 밖에 나와 있었는데 나를 보자 "Lt. Lee 지금 제5중대 지역에 적의 포탄이 낙탄 중"이라고 말했다. 물론 영어로 말한 것이지만 나는 설마 했다. "내가 지금 거기서 막 오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는 "Right  now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중" 이라고 다시 말했다.
  
나는 Jeep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막 바로 전속력으로 중대지역으로 돌아왔다. 중대 지역일대에 적의 포탄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소리로 봐서 적의 야포사격이었다. 이때 중대본부 천막은 포탄에 이미 날라갔고 그 옆에 있던 중대장 개인천막도 함께 날라가서 보이지 않았다. 적의 포탄이 중대 본부에 명중한 것이다. 물론 본부요원들의 사상자도 발생했다. 그러나 다행한것은 소대지역에는 한발도 떨어지지 않고 중대본부에만 한발이 떨어졌을 뿐 그 외에는 10여 발이 중대 숙영지 오른쪽 지역에 떨어졌다.
 
이때 만일 나도 중대본부 천막에나 혹은 중대장 개인천막에 있었으면 천막과 함께 날라가 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 현장을 보고 아찔했다. 적의 포탄은 내가 중대본부를 떠난지 10분 정도 후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정말 나로서는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나는 3소대('임진강' 철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중대 본부요원들이 피해를 입었으니 나는 나의 기적과같은 전운을 좋아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전사자 중 한명은 새로 부임한 작전장교(李東用 대위)의 전령이었는데 특별히 자기 전령이 중대로 가고 싶다해서 제5중대로 보냈으니 행정능력도 있고 똑똑하니 본부에서 근무시켜달라고 나에게 당부하기 때문에 중대본부에서 근무하도록 했는데 근무를 시작한 다음날에 참변을 당한 것이다. 오히려 그 대원이 소대에 배치되었으면 이런 불행한 일은 당하지 아니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걸 보고 과연 "인명은 재천이라"하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도솔산 전투" 에서의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동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공격 중 적의 저격병이 3~40m되는 거리의 산정에서 나를 저격했는데 나는 나의 복부(배꼽 바로 밑)를 피격당했으나 상처 하나 입지않은 기적같은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이 당시 부산에서 발행되던 自由新聞(申翼熙 발행)의 사설로 기사화되어 세상에 알려진바 있었다. 참조: 해병대 전투(1) "도솔산 전투" 
 
(1)  구원의 손길
아침에 내가 3소대의 '임진강'철교의 경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 중대지역을 떠난 것은 무슨 사전 계획에 의한 나의 행동이 아니라 갑자기 그곳으로 가 봐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떠난 것이 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났으니 마치 내가 적의 포탄이 이 지역에 떨어질 것을 미리 알고 떠난 것 같이 생각될 수도 있었다. 그 10분이 나를 살린 것이었다. 이걸 보고 나는 무슨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때에 나는 미처 생각못했지만 내가 이런 위기를 면한 것은 나를 항상 내가 위기 속에 있을 때마다  나를 도와준 그 구원의 손길의 도움이었다. 그것은 이날 뿐만 아니라 "도솔산 공격"  시에도 적탄에 복부를 정통으로 맞고도 상처 하나 입지아니한 기적같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누구든 믿을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을 한번 당해 보라.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떻게 적의 관측으로부터 우리 지역은 사각인데 적에게 관측되어 포격당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지역은 대대에서 선정해 준 지역이었다. 나는 이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중대원들이 절대 주변의 높은 능선에는 올라가지 않도록 단단히 주위를 주었고 대원들도 나의 지시를 잘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적과의 거리(관측)도 10km나 되고 쌍안경으로도 관측이 어려울 정도인데 어떻게 관측했을까?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지역이 적에게 노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제5중대의 불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4.   韓美 步,戰연합정찰   
 
8월초 제5중대는 대대로부터 미 해병사단의 전차중대(20대)와 한국 해병대 전차소대(5대)와 연합으로 대대 전방 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사천강'변의 '87m고지'까지의 구간의 개활지 일대를 전투정찰 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제5중대 인원도 이에 따라 120명 출동 준비를 마쳤다. 날씨는 아주 쾌청하여 시계도 좋았다. '87m고지'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4km 정도이나 전차 통로는 기성 도로인 농로밖에 없었고 도로 양측은 밭으로 되어 있어서 무거운 전차가 기동하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출발 전 나는 대대 작전장교로부터 자세한 사항을 지시받았어야 되는데 이 지역은 우리가 잘 알고있고, '87m고지'까지는 아직 적의 활동이 보고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대략 준비하고 출발했다. 
 
전차는 도로를 따라서 기동했고 우리 해병들은 각 전차를 중심하여 좌우로 산개해서 '87m고지'까지의 지역일대를 샅샅이 수색하면서 진출했으나 아무런 적정도 발견할 수 없었다.
                         
                                     87m고지까지의 한, 미 보전연합작전 중인 제5중대 -1952년8월 -
 
(1)   87m고지
'87m고지'는 위치상으로 중공군 진지와 좌일선대대 진지의 대략 중간지점에 위차하고 있으며 그 앞을 전연 장애물인 '사천강'이 북에서 남(한강)으로 흐르고 있었다. 또한 그 너머에 배치되어있는 적을 관측할 수 있는 지점에 '87m고지'가 위치하고 있으나 주저항선 진지로부터 너무 원거리라는 취약성 때문에 최초 이곳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해병대의 주저항선 진지와 '87m고지' 간의 약 4km의 지역 공간은 무방비인 진공 상태에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의 보병, 전차 연합 수색정찰도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작전의 일부였다. 이때 '사천강'너머의 적은 높은 산정에서 우리의 활동을 관측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목표지역까지 도착하여 전차는 '87m고지'를 중심하여 양측에 보병과 함께 배치하고 '87m고지' 정상에 해병들이 이전에 파 놓은 관측호 속에  들어가 적정을 관측하고 있는데 적의 박격포 포탄이 우리 주변에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공군이 높은 고지에서 우리의 활동을 계속 관측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적의 박격포 사격은 정확하였다. 사전에 사격제원을 산출해 놓고 사격하는 것 같았다.  
  
나는 미 해병대 전차중대장에게 적 진지에 전차포 사격을 요청했다. 적 진지까지의 거리는 2.000m 정도다. 미 해병대 전차 몇대에서 적진을 향해서 사격을 개시했다. 해병들은 적의 포사격에 대비해 충분히 산개시키고 사주경계를 하도록 했다.
 
'87m고지'로부터 '판문점까지의 직선거리는 12km 정도인데 적의 122m 야포탄은 날아오지 않았고 '사천강' 너머의 적의 진지로부터 박격포 포탄만 날아왔다. 약 20분 간 우리는 적의 진지에 전차포 사격을 하고 부대로 되돌아오기 시작햇다.
 
돌아올 때는 적정도 없었고 또 해병들의 피곤도 덜해 줄 목적으로 대원들을 전원 전차 한대에 4-5명씩 탑승시켰다. 중대지역로 돌아올 때도 실은 원칙대로 중대에서 출발했을 때의 산개된 대형을 유지해야 했으나 해병들의 피곤을 덜어 주고 또한 진지로의 복귀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해병들을 전차에 탑승시킨 것이 의외의 재앙을 우리에게 가저오게 했다. 이것은 중대장의 인정에 끌린 판단 착오였다.  
 
(2)   전투 중의 지휘관의 책임
지휘관의 책임과 그 판단력이 특히 전투 중에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이 여기서 실증된 셈이다. 전장에서는 전쟁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재삼 나는 여기서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엇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었다.
 
나는 중대장 전차에 전령과 무선통신병 그리고 선임하사관과 함께 탑승했다. 귀대 중 전차들은 잘 기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좌일선대대, 주저항선 진지 가까이에서 농로를 따라 기동하고있던 전차 중 선두전차가 갑자기 멈쳤다. 기계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선두 전차가 멈추게 되니 전차대열 전체가 기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농로 양측은 밭으로 돼 있어서 무거운 전차가 기동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내가 탑승하고있는 중대장 전차는 두번째였다. 앞으로 5분 정도면 우리는 전방진지를 통과하게 되는 그런 시간대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 와서 고장났담" 하면서 우리는 속도 상했지만 곧 고장수리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전차에 탑승한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약 2-3분 정도 지나서 고장났던 선두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  구원의 손길
그 순간 멀리 '판문점'방향에서 "쿵.쿵."하는 포성(122m 야포)이 여러발 들렸는데 나는 그 포성을 듣고 그 포성이 우리를 향한 포성인줄은 생각지도 않했다. 그것은 '판문점'은 인접부대인 미 해병사단 전면에 위치하고 있었고 거리도 10 km 이상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포성을 들으면서 출발해서 약 10-15초 정도(약 15m 거리) 지났는데 적의 포탄이 우리 주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바로 우리 뒤에서 포탄이 떨어진 "쾅"하는 큰 폭음이 들렸다. 그 폭발 소리를 듣고 순간 뒤돌아보니 비통하게도 그 첫발이 내가 탑승하고있는 중대장 전차가 서 있던 바로 그 위치에 뒤따르던 전차가 들어서는 순간 그 전차에 명중한 것이 보였다. 순간 그 위에 탑승하고 있던 해병들 5명 전원이 산산이 되어버렸다. 전원이 전사한 것이다. 그들은 이 나라와 이 백성을 위해 그 들의 하나 뿐인 귀한 생명을 받친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10초(거리상으로 10m 정도)라는 짧은 시간에 의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포탄이 전차에 떨어지는 순간에 날아갔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타고 온 전차들은 전부 전차의 Hatch를 닫고 그대로 고속으로 가버렸다. 우리 해병들은 전차에 포탄이 낙탄하는 순간 전부 하차해서 대대진지로 뛰어갔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여서 나는 정말 어처구니 없었다. 곧 구급차가 오고 Helicopter가 날아오고 하여 그 일대는 순식 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이 상황은  전투 시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결과가 얼마나 큰 희생을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기도 했다.
 
나는 이 큰 희생을 보면서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완전히 잊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그 처참했던 장면을 54년이 지난 오늘날도 잊을 수가 없어  참담한 심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구체적으로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도솔산 공격" 중의 나의 공훈보다 더욱 무거운 상처로 아직껏 나에게 남아있다. 이런 속에서 나의 성격의 변화가 나도 느끼지 못하고 또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의 나의 강성적인 성격이다. 이런 시련을 통해서 나는 무엇이 건 원칙대로 한다는 생활신조를 갖게 된 것 같다. 
 
그후 나는 8월 하순에 연대작전보좌관으로 발령이 났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 연대작전보좌관의 직책은 당시의 중위급 장교면, 전부 중대장을 마치고 가기를 소원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발령이 난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 나를 연대작전보좌관으로 추천했거나, 혹은 요청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발령이 날 수 없는 보직이다.
 
나는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대대장과의 이임인사 대화 중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그 발령 추천자는 부연대장인 남상휘 중령이었다. 그는 중동부전선에서 제1대대장으로 부임 직후에 나를 호출하여 나와 면담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와 전혀 면식이 없었다. 단지 그는 대대장으로 부임하니 "도솔산 전투"에서 제2중대 3소대장이 아주 용감하게 전투를 잘 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장교들로부터 듣고 이근식 소위가 어떤 장교인지 알고 싶어서 불렀다 했다.
 
그리고 후일에 기회가 있으면 함께 일해 보자고 나에게 말했었는데 그는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나를 연대본부로 발령낸 것이다. 나는 그 당시 그와 만난 사실도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제5중대의 지난 몇개월 간의 불운에 정신적으로 어려움 속에 있었던 나를 때맞게 연대본부로 발령해 주니 생각할 수록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이와같은 행운?에 비하여 제5중대의 불운은 나의 후임중대장인 권중달 중위의 전사로 이어졌다. 8월 하순 육군보병학교를 막 수료하고 전방에 배치되어 곧바로 전투 중에 있는 제5중대장으로 임명된 그는 나와 교대하면서 "야! 근식아. 똥뙈놈같은 것은 문제 없어" 하고 큰 소리를 친 권 중위는 그후 10월20일 중공군에게 점령당한 '87m고지' 탈환 야간공격에서 비통하게도 전사하고 말았다. 그는 일선소대장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전투는 오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우리가 전투하면서 터득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3)   공격 시 소대장의 위치
더욱이 소총소대장도 하지아니한 장교를 중위라하여 전투가 한참 치열한 전투부대의 중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상급부대지휘관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중공군이 산정에서 투척한 방망이수류탄에 의해 전사했다. 중대장은 전투지휘하는 것이지 적의 수튜탄에 의해 전사할 정도의 근접거리에서 소총병들과 함께 엉켜서 전투를 직접하는 것이 아니잖는가?
 
당시의 우리의 전투지휘 개념은 소대장이 맨 앞에서 소대를 직접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심히 잘못된 지휘 개념이다. 때문에 소대장의 전사확률이 아주 높았고 소대장이 전사하면 그 소대는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그 전투에서도 실패했었다. 이와같은 소대장의 전투지휘 개념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 소대장은 Leader가 아니라 Commander임을 알아야 한다.
 
소대장은 전투 중 맨 앞에서 앞장 서서 소대원들을 이끌고 적진에 돌입하는 것이 아니라 소대원, 전원이 적진에 동시에 돌입하게끔 소대를 적당한 위치에서 지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당시 제1대대장과 대대작전장교를 해군에서 해병대로 전과 후 육군보병학교에서 몇개월 간의 지상전술교육을 받았을 뿐 실병지휘경험이 전혀 없는 장교(H 소령과 P 대위)를 대대장과 대대작전장교로 임명하므로써 제1대대가 "장단지구 전투"에서 많은 해병들의 희생을 내고 전초진지 전부를 중공군에게 점령당하고, 심지어 제1대대장의 지휘권 포기까지하게 된 해병대 전사상 유레가 없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사유와 일맥상통한 실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5.   두 중대장의 전사(제6중대 선임장교 및 제5중대장)
 
10월 초에 있었던 중공군의 추계대공세에서 상실한 '87m고지'의 탈환전은 계속되었다. 10월 2일 밤 '87m고지' 방어책임자로 임명됐던 나의 동기생인 제2대대 제6중대 선임장교인 이성길 중위(해간 3기)는 중공군의 추기대공세에 수반하여 야간공격해 온 중공군과의 육박전에서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이런 사실은 그 당시 '87m고지'의 포병관측장교(박 소위 해간 6기)가 '87m고지'에서 야간공격해 온 중공군과 육박전 중 진내에서 중공군에게 생포되어 중공군 진지로 연행당하는 도중에 '사천강'변에서 중공군 장교를 허리춤에 휴대하고 있던 권총으로 사살하고 탈출한 후에 그때의 상황을 해병대 사령부 정훈감실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海兵'에 상세히 소개하므로써 그날 밤의 육박전 내용이 세상에 알려졌었다.
 
그날 밤의 전투(1952.10.2)에서 제2대대 제6중대는 그 전초진지(87m고지)를 중공군에게 잃었다. 그날 밤의 치열했던 전투 내용은 "해병대 전투 4('사천강'전투)"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음.
 
나는 아직껏 그 홍안의 소년같았던 우리의 동기생 이성길 중위의 얼굴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너무나 젊은 나이에 그는 갔다. 그때 그는 22세의 약관이었을 것이다. 그날 밤 많은 해병들도 그들의 지휘관과 함께 그들의 귀중한 목숨을 버렸다.

또한 나와 제2대대 제5중대장직을 8월 하순에 교대한 나의 동기생 권중달 중위(해간 3기)도 얼마 후(1952.10.20) 중공군에게 점령당한 '87m고지' 탈환을 위한 야간공격 중 '87m고지' 위로부터 투척한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에 의해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주간이라면 그 수류탄을 피할 수 있었겠지만  야간이라서 그는 그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날의 야간공격에서 해병들은 '87m고지' 탈환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수많은 이땅의 젊은이들이, 해병들이 그들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버린 것이다. 과연 누구를 위함이었던가? 그후 나는 전투단본부 뒷산에서 중공군의 '도깨비 불'같은 파란 기관총 예광탄이 '87m고지'에서 '50m고지'로 날라가는 것을 볼 때마다 '87m고지'전투에서 전사한 나의 두 동기생을 생각하며 슬퍼했다.
 
이때 나는 전투단 작전보좌관이었는데 내가 그대로 제5중대장이었으면 그 전사자는 나 일수 있다는 데에서 나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어떤 표현할 수 없는 자괴심을 갖게 됨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동작동 국군묘지, 해병대 묘역에 "고 해병 대위 권중달의 묘" 라고 쓰여진 묘비 아래에 이 나라와 이 겨례를 위하여 그들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한 우리의 해병들과 함께 잠들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인지 그의 묘비는 꽤 쓸쓸해 보였다. 그는 독신으로 그의 생애를 마쳤으니 찾아오는 인척도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단지 동기생인 우리만 매년 현충일에 그를 찾을 뿐이다.
                        

나는 그의 묘비 앞에 설 때마다 그것이 나일 수 있었다는 생각에 어떤 자괴지심과 자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가 나와 교대 후 "야! 근식아! 똥 뙈놈쯤은 문제 없어"하고 큰 소리를 친 것을 나는 아직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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