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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 島嶼部隊 作戰

by 충실한 해병 2022. 11. 28.

海兵 島嶼部隊 作戰                                                                             

1. 東西海島嶼 작전현황
 
해병대가 동,서해안에 접근한 여러 도서를 점령, 확보하므로써 해안선을 통한 적의 보급과 병력 이동에 대한 봉쇄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封鎖作戰을 담당한 부대는 서해안에서는 독립 제41중대였고 동해안에서는 독립 제42중대와 제43중대였다.
 
중공군이 대거 한국동란에 개입한 후부터 도서작전의 중요성은 잠고되어 마침내 1952년1월15일 金斗燦 대령이 지휘하는 증강된 해병도서부대의 편성이 완료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제 기술편의상 西海와 東海로 각각 도서작전을 구분하여 그 작전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 西海島嶼作戰
 
한국동란 이래 북한 공산군의 이동과 수송은 동북연안보다 京義道路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많앗다. 따라서 '경의본선'과 이와 수반된 도로는 적의 대동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적도 이 수송동맥을 완전히 확보 보장하기 위하여 경비를 극히 엄중히 하고 있엇다. 이에 서해안을 봉쇄하고 있는 우리 해군과 또 이 해안선을 뚫고 적지 깊숙히 침투하여 활약하는 우리 해병대의 임무는 실로 중대하였다.
 
西海岸에 있어서 延白郡의 적은 1951년4월 경부터 해안선을 경비하는 동시에 일부 병력은 靑丹방면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때 적은 아군의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喬洞島에 五列을 침투시켜 아군의 활동을 탐지하고 있었다. 적이 만일 '교동도'에 상륙하여 이를 점령하면 용이하게 江華島에 침입하게 되므로 해병대는 우선 '교동도'에 상륙하여 이를 확보치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해병대가 서해안지구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전에는 1950년12월 철수할 때에 낙오된 육군 낙오병으로 조직된 九月山部隊와 平安道愛國靑年으로 구성된 安岳部隊라고 하는 부대들이 산발적으로 활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해병대가 喬洞島, 席島, 및 白翎島 등에 상륙한 후부터는 이들 부대들도 해병대의 지도하에 비로서 일정한 조직으로 편성되어 적극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1)  各島嶼상륙
   1) 喬洞島상륙
西海岸의 봉쇄작전을 담당한 부대는 초기에 있어는 李東湖 중위가 지휘하는 독립 제41중대로서 3개 소대 총병력은 150명이었다. 1951년4월 당시 서해안에 있어서 延白郡의 적은 해안선을 경비하는 동시에 일부 병력은 靑丹방면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군이 상륙하기에 직선거리 선상에 있는 海城面반도에서 '연안읍'에 이르는 도로는 파괴되어 있었고 '연백'지구의 곡물은 海州, 新溪, 谷山으로 운반되고 있었다. 
 
이같이 물자를 운반하는 적, 인민군은 松岳山을 근거로 하고 주력은 다시 開城과 '연백'지구에 집결되어 있었다. 開城지구의 인민군은 제8사단 제1연대였고 '연백'지구에는 제2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장비는 10인 중 약 반수가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海城面일대에는 약 1개 중대의 병력이 배치되어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견제할 목적으로 '교동도'에 五列을 침투시키고 있었다. 
 
이에 만일 적이 '교동도'를 점령하면 江華島에 쉽사리 침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김포'반도를 경유하여 仁川까지 진출하게 되므로 해병대는 먼저 '교동도'에 상륙하여 적이 寸步의 전진도 못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에 李東湖 중위가 인솔한 독립 제41중대가 4월2일 09:05시 '교동도'에 상륙하여 무혈점령하였다. 
 
이'교동도'는 경기도 '화성군'에 속하는 2개 면으로 된 섬이다. 人口는 약 1,200명이고 이북으로부터 남하한 애국청년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자치를 행하였으며 白翎島에서 파견된 육군 G-2가 함께 활약하고 있었다.  
 
제41중대가 이 섬에 상륙한 다음 날인 4월3일 03:00시에서 08:00시까지 대안인 峰火里고지에서 적으로부터 중, 경기관총 및 81mm 박격포의 사격을 받았으나 부대는 곧 이에 응전하여 적을 침목시켰으며 5일에는 해군의 306艇이 이 지구일대에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이어 10일에는 적 약 4,500명이 延安에 집결하였다는 정보보고에 의거하여 미 제5공군 폭격기대에 연락하여 동지역 일대를 대거 폭격케 하여 다대한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부대는 同島의 경비를 엄중히 하는 동시에 이 섬에 피난온 약 7,000명의 피난민 중에서 義勇隊를 조직하여 이들을 훈련시켰다. 이렇게 하는 한편 부대는 도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선무공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적의 후방을 위협함으로써 해안선을 봉쇄하여 적의 해안선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이 해안에 機雷를 부설하는 것을 저지하는 등 다대한 활약을 하였다.
 
   2) 白翎島上陸
白翎島에는 1951년1월21일 해군과의 협조하에 해병대의 일부병력이 상륙하였던 곳이다. 喬洞島(교동도)에 상륙하여 경비에 임하고 있던 독립 제41중대 병력 약 100명이 4월23일 '백령동'에 상륙하여 본부를 '사곳동'에 두고 이 지역에서 100고지에 이르는 지대를 경비하게 되었다.
 
이때 '백령도'에 주재한 우군부대는 미 육군 항공대에서 파견한 87명의 UN군과 VP호 2척에, 한국 육군 정보관계자 20명, 木浦부대 87명, 및 경찰관 8명이었고 해상의 UN군 함정과 우리, 해군함정이 경비하고 있었다.
 
'백령도'에는 피난민 약 8,000명이 집결하고 있었는데 그 중 약 300명에게 해병대가 훈련을 실시하여 아식장총으로 무장시켰다. 이곳의 도민도 해병대의 민심수습책이 주효하여 전적으로 협조하고 있어서 軍, 警, 民은 혼연일체가 되어 상호 협조하에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경비와 교육 훈련, 및 민심수습에 진력하고 있던 해병대는 北韓의 西海岸에 위치한 鎭南浦에 근접해 있는 席島에 이동하게 되었다. 1951년5월3일 二曺 崔우성을 대장으로 하는 유격대원 50명은 '백령도'를 출발하여 5월7일 '석도'에 상륙완료하였다. 
 
  3)  席島上陸作戰 
喬洞島를 근거로 하여 대안의 延白地區에서 상륙작전과 정보수집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던 제41중대는 '백령도'를 경유하여 鎭南浦 서쪽 해상에 위치하고 있는 '석도' 에 상륙하였다. 이때 제41중대는 '석도'를 방어하는 한편 平安南, 北道의 서해안 일대에 기습상륙하여 적의 후방보급선을 차단 또는 위협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독립제41중대는 상륙 즉시 인부 30명을 징용하여 이들의 협조하에 진지를 구축하고 또한 椒島에서 음료수를 운반하기도 하였다. 한편 '평안남, 북도'해안에 기습상륙을 감행하기 위하여 이 지방의 지형에 밝은 애국청년 100명으로 조직된 의용대와 첩보원 50명을 훈련시켰고 또한 선원 50명도 징용하여 상륙작전 준비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서해안은 조수의 간만의 차가 심할 뿐만 아니라 帆船(범선)으로 기습상륙작전을 수행하게 되어 있어서 작전상의 어려움은 막심하였다. 
 
第一次 奇襲上陸作戰
人民軍 제6군단괴 중공군 일부 병력은 平安北道 定州에서 平安道의 安州, 新義州, 龍江, 江西 및 鎭南浦와 黃海道의 九月山에 근거를 두고 長淵, 殷栗(은율), 松禾(송화) 일대에는 사단병력을 배치하여 해안선을 엄중히 경계 중에 있었다.
 
특히 해병대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椒島(초도), 熊島(웅도), 次螺島(차라도) 등의 대안 일대에는 무수한 지뢰를 매설하였고 '진남포', 龍岡,'구월산', '정주' 및 '안주'에는 다수의 탄약보급소까지 두었으며 인민군 해군부대는 적극적으로 각 도서에 상륙을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간파되었다. 또한 6월부터는 적의 전투기의 비행마저 빈번하여 적의 활동은 점차 활발의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이와같은 적의 동태에 대하여 그 당시 서해에서 작전 중에 있던 영국 함정과 한국 해군의 경비함정은 해안경비에 임하는 한편 1951년6월10일에는 해병대의 일부 잠복대가 범선 2척으로 雲霧島(운무도)에 도착하여 '안주', '정주' 및 新安州 일대의 적정을 파악하였다.
 
16일에는 '평남도'의 漢川 南陽里에 海軍 一曺 金用奇가 지휘하는 15명이 범선으로 상륙하여 적정을 탐색하고저 하였으나 적으로부터 불의의 사격을 받게 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해병대가 적진지에 맹열한 사격을 가함으로써 상륙할 기세를 보였음으로 지역내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애국청년들이 적의 경계망을 뚫고 아군측으로 피신해 올 수 있었다.  
 
그후 6월27일 金用奇 一曺외 20명은 다시 愛島에 상륙하여 李台鍾 소위 지휘하에 定州郡 葛山面(갈산면)에 속한 '팟섬'에 상륙하여 적정을 타색하고 애국청년들을 구출하고저 하였으나 적에게 발견되어 약 3시간 동안 교전끝에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해병 2명이 전사하고 1명이 부상당하였으나 적 10명을 사살하고 5명의 귀순병을 얻었다.
 
그후 해병대는 江西江 일대를 기습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戰果: 적 탄약고 1개소 파괴   사살  15명   귀순병  5명   애국청년 구출  16명   중기  1정   따발총  1정
被害: 전사  2명   부상  1명   첩보자 실종  16명
 
제2차 對岸奇襲上陸作戰
인민군 제6군단 소속 2개 사단은 安岳(안악), 長淵(장연), 松禾(송화) 및 豊川郡 일대에 위치하여 있었고 또 다른 1개 연대의 병력은 席島 전방 해안을 경계하고 있었다. 더욱 적 해군은 '진남포'에 사령부를 두고 발동선 9척과 범선 20여 척을 집결시켜 서해안의 도서 특히 '석도', '추도', '웅도', '차라도'를 점령할 그들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이같은 적의 행동에 대비하여 영국을 비롯한 濠州(호주), 카나다, 및 뉴-지랜드의 해군 함정과 한국 해군 함정은 상시 해상을 순찰하여 적을 제압하는 한편 해병대의 작전을 엄호하고 있었다.
 
7월26일 金基俊 一曺가 지휘하는 1개 분대는 大同江口에서 적의 수송선박 1척을 격침시켰고 8월5일 첩보자 金泰應이하 5명을 파견하여 鎭南浦와 金山浦 간을 왕래하는 차량을 '금산포'에서 파괴시키고 적 수명을 사살하였으며 8월8일에는 정찰대장 金順福이하 5명이 松禾郡 일대에 급습하여 온 적 2명을 사살하였다.
 
8월12일 劉東旭 一曺이하 7명과 제1유격대 45명은 月沙里半島를 급습하여 다대한 성과를 획득하였다.
戰果: 적 사살  46명   인민위원장 사살  1명   보안서원 사살  3명   경비원 사살  2명   자위대 포로  9명   인민군 귀순병 1명   교량 파괴 2개소   도로 차단   1개소   대전차포  3문   아식 소총  2정   중기 실탄 200발   소총탄  1,500발  지뢰 발굴 8개소
 
그후 해병대는 1951년8월21일부터 9월20일까지 1개 월 간에 걸친 활발한 활약으로 다음과 같은 전과를 올렸다. 
戰果: 적 사살  32명   민청위원장 사살  2명   적 첩보대워 사살  2명   교량 파괴  2개소   건물 파괴  3개소  애구청년 구출  200명   중기 실탄  2,000발   따발총  1정   아식 소총 실탄  두 상자    
被害: 첩보원 행방불명  2명   부상  2명.
 
12월까지 계속된 유격대의 활동으로 인민군 사살  75명   인민군 생포  3명   지방양민 구출  120명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와같은 혁혁한 전과를 올린 해병대는 유격대를 조직하여 '구월산'에 입산시켜 그 지역에서 활동 중인 애국청년들을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西海岸에서의 해병대의 기습작전은 적의 군사활동에 실로 막대한 지장을 주었었다.  
 
독립 제41중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제41중대장  중위 李東湖
                 1소대장  소위 金海萬
                 2소대장  소위 鄭二薰
                 3소대장  소위 李台鍾
                     총병력  150명
 
(2)  해병 도서부대 편성  
중공군의 한국동란 개입 이후 도서작전의 중요성은 일익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근 1년 간 동서 양해안에 걸쳐 독립 3개 중대가 맹활약을 거듭하여 해안봉쇄와 해안상륙 등을 감행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으나 보다 강력한 해안봉쇄의 임무를 위해서는 독립중대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증강된 도서부대의 편성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이때 적은 많은 병력을 주로 西海里반도 및 月沙里반도에 배치하고 서해안의 도서를 탈환할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전황 속에서 해안봉쇄는 물론 경계의 강화를 목적으로 해병 도서부대를 편성하여 그 주력은 서해 도서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초대 부대장으로 金斗燦 대령이 임명되어 鎭海 신병훈련소에서 신규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여 본부 및 근무중대, 75mm 무반동총소대, 의무중대, 보급 및 수송중대, 제7대대, 제8대대, 및 제9대대를 1952년1월15일까지 편성와료하여 익월 15일 白翎島로 출발하게 되었다.   
                                                 신편된 도서부대(서해주둔)의 직위표는 아래와 같다.  
                                   
                                                                     해병 도서경비부대 군기
                  
                       
               도서부대 본부가 위치한 '백령도'(인공위성 사진). 오른쪽 밑, 해안에 천연활주로가 길게 보이고 있음. 
 
이때 이미 제7대대(제4중대 포함)는 席島에 대대본부를 두고 '석도'와 椒島(초도)를 확보하고 있엇으며 '백령도'에는 제6대대가 이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延坪島에는 독립 제5대대에서 1개 소대를 차출하여 이를 확보하고 있었다.
 
신규로 증강 편성된 부대는 1월16일 예정대로 이미 도서에 배치된 제7대대, 제8대대(동해안에 배치)를 제외한 부대본부, 제9대대 편입요원 1,250명을 LST 803정에 싣고 '진해'항을 출항하여 '연평도'에 1월22일, '백령도'에 1월20일, '초도'에 1월22일 각각 상륙하여 경비 및 기습상륙 등을 전개하는 한편 상륙전 훈련을 실시하여 전투력을 증강하고 잇었으며 휴전 시까지 계속된 도서부대의 활약은 자못 큰바 있었다.
 
3.  虎島作戰
 
(1)  虎島上陸
'호도'는 서해지구 鎭南浦서남방, 席島동북방 2,000yds(xc72-73.5)에 위치한 무인도로서 對岸과의 거리는 500yds이며 육안으로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指呼之間에 있었다. 이 섬은 동북방에 약간의 사장이 있을 뿐 암석으로 둘러싸인 폭 40yds 길이 100yds 정도의 작은 섬이었다. 
 
主副食物은 물론 음료수와 연료로 사용할 火木도 없으므로 이를 전부 '석도'부대에서 정기적으로 범선을 이용하여 추진보급하고 있었다. 
 
적은 수개 월 전부터 서해안의 각 도서를 탈취할 목적으로 '서해리'반도 및 '월사리'반도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西海地區 봉쇄함대의 활동을 방해하는 한편 상륙할 기세까지 농후하였다. 이때 '호도'에는 '석도'에서 파견된 소수의 정찰병이 있었을 뿐이었다.
 
해병 도서부대장 金斗燦 대령은 대안에 집결하고 있는 적을 견제하며, 또한 적의 활동에 대비하는 한편 서해지구함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서해지구 봉쇄사령관 '다이야' 소장 및 해병 도서부대 작명 제 4호로서 1952년 2월 12일 席島부대(제7대대장 소령 金東埈)에서 증강된 1개 소총소대를 제1차로 虎島에 상륙케 하였다. 이 소대는 3월12일 鄭炯模 소위가 지휘하는 소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3월 13일에는 공병소대장이 지휘하는 1개 분대를 파견하여 해안 일대에 철조망과 지뢰 및 기타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2)  전투경과
虎島에 해병들이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타 도서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안의 적으로서는 그들의 목에 칼날을 대고 있는 듯 항상 불안에 쌓이게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은 1월30일 박격포 11발을 '호도'에 사격하는 한편 약 30명의 병력으로 소총사격을 가하여 왔으나 해병부대는 이에 즉각 반격으로 격퇴하였다.
 
1월31일 대안의 적은 月沙里반도로부터 중, 경기로 '호도'에 사격을 가하여 왔으나 해병부대는 UN함대에 연락하여 함포사격으로 적을 격퇴하였으며 이때 '호도'부대도 동시에 무반동포의 사격으로 적을 격퇴하였다. 이러한 전투상황은 거의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는 중 이때까지 보지 못한 대격전의 날이 드디어 왔다. 즉 그날은 3월25일이었다.
 
이날 적은 직사포와 박격포로서 '호도'전면에 무수한 포탄을 사격하는 한편 '석도'에도 40여 발의 포탄을 사격하여 '석도'부대를 견제하면서 22:50시 (가)지점에서 범선 4척에 분승한 1개 중대 약 160명이 '호도'를 향하여 공격하여 왔다. 이때, (가)지점에 4척의 적선이 출현했을 때 '호도'의 해병소대는 맹열한 집중화망을 구성하면서 곧 '석도,와 연락하기 위하여 SCR-300과 OK(유격대)의 GRC로서 제7대대장에게(이날 대대장 金東俊 소령과 신임 대대장 閔容植 소령과의 임무교대가 있었다) '호도'에 "적 내습"이라는 보고를 시작하였을 때 적의 직사포탄의 낙하로 통신기가 파괴되어 연락은 단절되었다.
 
적은 해병들의 맹열한 사격에도 불구하고 교전이 시작한지 5분 만에 집중사격을 가하는 한편 4척의 선박은 연막탄을 선수에 살포하면서 1척은 (다)지점으로 우회하였다. (다)지점으로부터 '호도'의 중앙부에 상륙한 적이 해병대 진지로 육박하고 있을 때 (마)지점에 상륙한 적은 (다)지점의 적을 사격하고 있는 해병소대의 후방의 (라)지점에서 고지의 상봉을 점령하고 만세를 부르며 육박하여 오니 해병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포위된 상태에 이르게 되어 약 15분 후에 (1)지점에서 (2)지점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이미 해병의 반수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1)지점을 점령한 적은 해병들에게 일제사격을 가하여 왔다. 해병들은 각개 분산하여 (2)지점에 진지를 점령하고 맹열히 응전하였다. 이때 해병의 인원수는 약 20명 뿐이었다. 해병들은 1정 뿐인 중기관총이 적의 직사포탄으로 인하여 파괴됨에 따라 전황이 극히 불리해졌음을 알았으나 끝까지 사수할 것을 마음 굳게 다짐하고 전투를 계속 하였다.
 
이리하여 (1)지점으로부터 계속 공격하여 오는 적에 대하여 해병들은 (2)지점에서 3차에 걸쳐 반격하기 위하여 일제사격으로 또다시 약 10분 간 교전하였으나 전투원의 부족과 적의 맹열한 화력으로 인하여 부득기 (2)지점에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다.  
 
그러나 잔여 해병들은 끝까지 전멸당하는 한이 있드라도 '호도'를 사수하기 위하여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고지 후방과 암석 사이에서 각개 분산, 잠복하여 우군의 지원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 '호도'부대에서는 적이 '호도'에 내습한 초기에 '호도'로부터 한번 보고를 접하였을 뿐 그 후 일절 연락이 단절됨에 따라 이들을 직접 지원하거나 또는 구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이때 도서부대의 기동력은 전적으로 선박에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선박의 보유수는 4척뿐이었고 그것도 각 도서에 1척 씩 밖에 배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역내에서의 전술기동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때 '호도'에도 대기선박으로 '석도'의 제7대대에서 범선 1척을 배치하였으나 전투 초기에 이미 적의 포탄 2발에 명중되어 침몰하였으므로 '석도'로부터의 지원만이 '호도'의 상황을 호전케 할 수 있는 유일한 관건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석도'의 장병들은 '호도'의 전우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음을 예상하고 "빨리 지원해야 한다! 구출해야 하겠다"는 비통한 심정으로 가슴이 터질 듯하여 백방으로 그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석도'에도 기동선은 전무하였고 범선이 단 1척밖에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석도'부대장이 "적 내습"이라는 '호도'로부터의 보고를 접한 후 역습을 결심하고 전투준비를 갖추어 미 해병대의 서해지구 사령관과 수차에 걸쳐 '호도'에 대한 역습을 상의하였으나 '팬포-드' 대령은 시간이 경과하여야 한다 하여 강력히 이를 반대하였던 데에도 기인하였다.
 
이리하여 席島와 虎島의 해병들은 고전과 비분이 교차하는 가운데 속수무책으로 3월25일을 넘기게 되었으며 다음 날 26일은 고요 속에 밝아왔다. '석도'부대에서는 '호도'의 전투 상황에 대해서 전우들이 역경 속에서 고전하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할 수 있을 뿐 그 외에 다른 상황은 전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날 白翎島에서는 도서부대장 金斗粲 대령이 직접 '석도'에 출동하여 '호도' 상황을 관찰한 도서부대장은 심중에 모종의 결정을 내린 듯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석도'의 전 장병은 점차 사기가 앙양되어 부대장으로부터 속히 현재의 상황에 대한 어떤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일 20:30시 정찰병 1명을 XC73, 6-73, 4 지점에 상륙, 정찰시킨 결과 '호도'에 약 60명의 적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익일 27일 05:00시에 귀대하였다. 이날 20:00시 다시 3명을 1조로 한 정찰조를 차출하여 정찰한바 역시 적병 약 60명을 발견하고 단시간 교전 후 피해없이 '석도'로 무사히 귀대하였다.
 
이리하여 2개 소대 약 80명으로 구성된 전투정찰대는 韓永雲 중위의 지휘하에 발동선 3척에 분승하여 '석도'부대의 엄호사격과 미군 폭격기의 지원으로 3월29일 08:00시 '호도'에 상륙하여 XC 71,5-74,9 지점에 이르러 (2)고지 및 암석 사이에 잠복하고 있던 전우 7명을 구출하였다.
 
전투정찰대가 비장한 각오로 일대 격전을 예상하고 '석도'에 상륙하였을 때는 적은 이미 대안인 육지로 도주한 후였다. 이때 정찰대원들에게 구출된 7명 중 1명은 전사하였고 1명은 부상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출되기 전의 이들 7명은 고립된 역경 속에 있으면서도 기회를 보아 반격전을 하고저 칼빙 소총을 휴대하고 있었으니 이는 이러한 궁지에 빠졌어도 끝까지 싸우려는 이들의 기개는 촌시라도 잊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虎島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 다음 날 席島로부터 파견된 정찰병 1명이 71, 2-73, 8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암석 사이에 잠복하고 있던 소대장 鄭炯模 소위와 분대장 金창현 三曺는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병이 타고 있는 범선을 향하여 수영을 하여 범선에 접근하려 하였으나 거센 조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서 애석하게도 희생된 사실은 부하를 아끼는 마음과 자기 직책을 끝까지 완수하려는 승고한 책임감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虎島作戰이 초기 단계부터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열거한 것같이 병력과 기동력이 부족하였고 또한 미군측에서 빨리 서둘지 않았다는 등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요한 원인으로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호도'부대는 대부분 신병 제12기생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부대로서 전투가 시작되자 침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당황하였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대원들이 보초근무 이외의 시간은 틈을 타서 해안선에 나가 꿀을 따서 먹는 회수가 많았으므로 적이 아군의 진지내의 안전통로를 상세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적이 상륙 시에 단 1발의 지뢰에도 촉발됨이 없이 지뢰지대를 피하여 신속히 상륙하였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수병력으로서 약 4배의 적과 끝까지 잘 싸워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적이 '호도'에 장기간 머물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야밤에 대안으로 도주하게 하여 후에 지원차 상륙한 전투정찰대에 피해를 전혀 주지 않게 하였으니 그 공로 또한 다대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얻은 전과는 사살 2명, 사상 4명이었고 피해는 전사 3명, 행방불명 33명이었다.  
 
출처: 海兵戰鬪史(海兵隊司令部發行)

海兵 島嶼部隊 作戰                                                                             Panmunjom DMZ

1. 東西海島嶼 작전현황
 
해병대가 동,서해안에 접근한 여러 도서를 점령, 확보하므로써 해안선을 통한 적의 보급과 병력 이동에 대한 봉쇄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封鎖作戰을 담당한 부대는 서해안에서는 독립 제41중대였고 동해안에서는 독립 제42중대와 제43중대였다.
 
중공군이 대거 한국동란에 개입한 후부터 도서작전의 중요성은 잠고되어 마침내 1952년1월15일 金斗燦 대령이 지휘하는 증강된 해병도서부대의 편성이 완료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제 기술편의상 西海와 東海로 각각 도서작전을 구분하여 그 작전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 西海島嶼作戰
 
한국동란 이래 북한 공산군의 이동과 수송은 동북연안보다 京義道路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많앗다. 따라서 '경의본선'과 이와 수반된 도로는 적의 대동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적도 이 수송동맥을 완전히 확보 보장하기 위하여 경비를 극히 엄중히 하고 있엇다. 이에 서해안을 봉쇄하고 있는 우리 해군과 또 이 해안선을 뚫고 적지 깊숙히 침투하여 활약하는 우리 해병대의 임무는 실로 중대하였다.
 
西海岸에 있어서 延白郡의 적은 1951년4월 경부터 해안선을 경비하는 동시에 일부 병력은 靑丹방면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때 적은 아군의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喬洞島에 五列을 침투시켜 아군의 활동을 탐지하고 있었다. 적이 만일 '교동도'에 상륙하여 이를 점령하면 용이하게 江華島에 침입하게 되므로 해병대는 우선 '교동도'에 상륙하여 이를 확보치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해병대가 서해안지구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전에는 1950년12월 철수할 때에 낙오된 육군 낙오병으로 조직된 九月山部隊와 平安道愛國靑年으로 구성된 安岳部隊라고 하는 부대들이 산발적으로 활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해병대가 喬洞島, 席島, 및 白翎島 등에 상륙한 후부터는 이들 부대들도 해병대의 지도하에 비로서 일정한 조직으로 편성되어 적극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1)  各島嶼상륙
   1) 喬洞島상륙
西海岸의 봉쇄작전을 담당한 부대는 초기에 있어는 李東湖 중위가 지휘하는 독립 제41중대로서 3개 소대 총병력은 150명이었다. 1951년4월 당시 서해안에 있어서 延白郡의 적은 해안선을 경비하는 동시에 일부 병력은 靑丹방면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군이 상륙하기에 직선거리 선상에 있는 海城面반도에서 '연안읍'에 이르는 도로는 파괴되어 있었고 '연백'지구의 곡물은 海州, 新溪, 谷山으로 운반되고 있었다. 
 
이같이 물자를 운반하는 적, 인민군은 松岳山을 근거로 하고 주력은 다시 開城과 '연백'지구에 집결되어 있었다. 開城지구의 인민군은 제8사단 제1연대였고 '연백'지구에는 제2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장비는 10인 중 약 반수가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海城面일대에는 약 1개 중대의 병력이 배치되어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견제할 목적으로 '교동도'에 五列을 침투시키고 있었다. 
 
이에 만일 적이 '교동도'를 점령하면 江華島에 쉽사리 침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김포'반도를 경유하여 仁川까지 진출하게 되므로 해병대는 먼저 '교동도'에 상륙하여 적이 寸步의 전진도 못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에 李東湖 중위가 인솔한 독립 제41중대가 4월2일 09:05시 '교동도'에 상륙하여 무혈점령하였다. 
 
이'교동도'는 경기도 '화성군'에 속하는 2개 면으로 된 섬이다. 人口는 약 1,200명이고 이북으로부터 남하한 애국청년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자치를 행하였으며 白翎島에서 파견된 육군 G-2가 함께 활약하고 있었다.  
 
제41중대가 이 섬에 상륙한 다음 날인 4월3일 03:00시에서 08:00시까지 대안인 峰火里고지에서 적으로부터 중, 경기관총 및 81mm 박격포의 사격을 받았으나 부대는 곧 이에 응전하여 적을 침목시켰으며 5일에는 해군의 306艇이 이 지구일대에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이어 10일에는 적 약 4,500명이 延安에 집결하였다는 정보보고에 의거하여 미 제5공군 폭격기대에 연락하여 동지역 일대를 대거 폭격케 하여 다대한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부대는 同島의 경비를 엄중히 하는 동시에 이 섬에 피난온 약 7,000명의 피난민 중에서 義勇隊를 조직하여 이들을 훈련시켰다. 이렇게 하는 한편 부대는 도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선무공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적의 후방을 위협함으로써 해안선을 봉쇄하여 적의 해안선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이 해안에 機雷를 부설하는 것을 저지하는 등 다대한 활약을 하였다.
 
   2) 白翎島上陸
白翎島에는 1951년1월21일 해군과의 협조하에 해병대의 일부병력이 상륙하였던 곳이다. 喬洞島(교동도)에 상륙하여 경비에 임하고 있던 독립 제41중대 병력 약 100명이 4월23일 '백령동'에 상륙하여 본부를 '사곳동'에 두고 이 지역에서 100고지에 이르는 지대를 경비하게 되었다.
 
이때 '백령도'에 주재한 우군부대는 미 육군 항공대에서 파견한 87명의 UN군과 VP호 2척에, 한국 육군 정보관계자 20명, 木浦부대 87명, 및 경찰관 8명이었고 해상의 UN군 함정과 우리, 해군함정이 경비하고 있었다.
 
'백령도'에는 피난민 약 8,000명이 집결하고 있었는데 그 중 약 300명에게 해병대가 훈련을 실시하여 아식장총으로 무장시켰다. 이곳의 도민도 해병대의 민심수습책이 주효하여 전적으로 협조하고 있어서 軍, 警, 民은 혼연일체가 되어 상호 협조하에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경비와 교육 훈련, 및 민심수습에 진력하고 있던 해병대는 北韓의 西海岸에 위치한 鎭南浦에 근접해 있는 席島에 이동하게 되었다. 1951년5월3일 二曺 崔우성을 대장으로 하는 유격대원 50명은 '백령도'를 출발하여 5월7일 '석도'에 상륙완료하였다. 
 
  3)  席島上陸作戰 
喬洞島를 근거로 하여 대안의 延白地區에서 상륙작전과 정보수집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던 제41중대는 '백령도'를 경유하여 鎭南浦 서쪽 해상에 위치하고 있는 '석도' 에 상륙하였다. 이때 제41중대는 '석도'를 방어하는 한편 平安南, 北道의 서해안 일대에 기습상륙하여 적의 후방보급선을 차단 또는 위협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독립제41중대는 상륙 즉시 인부 30명을 징용하여 이들의 협조하에 진지를 구축하고 또한 椒島에서 음료수를 운반하기도 하였다. 한편 '평안남, 북도'해안에 기습상륙을 감행하기 위하여 이 지방의 지형에 밝은 애국청년 100명으로 조직된 의용대와 첩보원 50명을 훈련시켰고 또한 선원 50명도 징용하여 상륙작전 준비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서해안은 조수의 간만의 차가 심할 뿐만 아니라 帆船(범선)으로 기습상륙작전을 수행하게 되어 있어서 작전상의 어려움은 막심하였다. 
 
第一次 奇襲上陸作戰
人民軍 제6군단괴 중공군 일부 병력은 平安北道 定州에서 平安道의 安州, 新義州, 龍江, 江西 및 鎭南浦와 黃海道의 九月山에 근거를 두고 長淵, 殷栗(은율), 松禾(송화) 일대에는 사단병력을 배치하여 해안선을 엄중히 경계 중에 있었다.
 
특히 해병대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椒島(초도), 熊島(웅도), 次螺島(차라도) 등의 대안 일대에는 무수한 지뢰를 매설하였고 '진남포', 龍岡,'구월산', '정주' 및 '안주'에는 다수의 탄약보급소까지 두었으며 인민군 해군부대는 적극적으로 각 도서에 상륙을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간파되었다. 또한 6월부터는 적의 전투기의 비행마저 빈번하여 적의 활동은 점차 활발의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이와같은 적의 동태에 대하여 그 당시 서해에서 작전 중에 있던 영국 함정과 한국 해군의 경비함정은 해안경비에 임하는 한편 1951년6월10일에는 해병대의 일부 잠복대가 범선 2척으로 雲霧島(운무도)에 도착하여 '안주', '정주' 및 新安州 일대의 적정을 파악하였다.
 
16일에는 '평남도'의 漢川 南陽里에 海軍 一曺 金用奇가 지휘하는 15명이 범선으로 상륙하여 적정을 탐색하고저 하였으나 적으로부터 불의의 사격을 받게 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해병대가 적진지에 맹열한 사격을 가함으로써 상륙할 기세를 보였음으로 지역내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애국청년들이 적의 경계망을 뚫고 아군측으로 피신해 올 수 있었다.  
 
그후 6월27일 金用奇 一曺외 20명은 다시 愛島에 상륙하여 李台鍾 소위 지휘하에 定州郡 葛山面(갈산면)에 속한 '팟섬'에 상륙하여 적정을 타색하고 애국청년들을 구출하고저 하였으나 적에게 발견되어 약 3시간 동안 교전끝에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해병 2명이 전사하고 1명이 부상당하였으나 적 10명을 사살하고 5명의 귀순병을 얻었다.
 
그후 해병대는 江西江 일대를 기습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戰果: 적 탄약고 1개소 파괴   사살  15명   귀순병  5명   애국청년 구출  16명   중기  1정   따발총  1정
被害: 전사  2명   부상  1명   첩보자 실종  16명
 
제2차 對岸奇襲上陸作戰
인민군 제6군단 소속 2개 사단은 安岳(안악), 長淵(장연), 松禾(송화) 및 豊川郡 일대에 위치하여 있었고 또 다른 1개 연대의 병력은 席島 전방 해안을 경계하고 있었다. 더욱 적 해군은 '진남포'에 사령부를 두고 발동선 9척과 범선 20여 척을 집결시켜 서해안의 도서 특히 '석도', '추도', '웅도', '차라도'를 점령할 그들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이같은 적의 행동에 대비하여 영국을 비롯한 濠州(호주), 카나다, 및 뉴-지랜드의 해군 함정과 한국 해군 함정은 상시 해상을 순찰하여 적을 제압하는 한편 해병대의 작전을 엄호하고 있었다.
 
7월26일 金基俊 一曺가 지휘하는 1개 분대는 大同江口에서 적의 수송선박 1척을 격침시켰고 8월5일 첩보자 金泰應이하 5명을 파견하여 鎭南浦와 金山浦 간을 왕래하는 차량을 '금산포'에서 파괴시키고 적 수명을 사살하였으며 8월8일에는 정찰대장 金順福이하 5명이 松禾郡 일대에 급습하여 온 적 2명을 사살하였다.
 
8월12일 劉東旭 一曺이하 7명과 제1유격대 45명은 月沙里半島를 급습하여 다대한 성과를 획득하였다.
戰果: 적 사살  46명   인민위원장 사살  1명   보안서원 사살  3명   경비원 사살  2명   자위대 포로  9명   인민군 귀순병 1명   교량 파괴 2개소   도로 차단   1개소   대전차포  3문   아식 소총  2정   중기 실탄 200발   소총탄  1,500발  지뢰 발굴 8개소
 
그후 해병대는 1951년8월21일부터 9월20일까지 1개 월 간에 걸친 활발한 활약으로 다음과 같은 전과를 올렸다. 
戰果: 적 사살  32명   민청위원장 사살  2명   적 첩보대워 사살  2명   교량 파괴  2개소   건물 파괴  3개소  애구청년 구출  200명   중기 실탄  2,000발   따발총  1정   아식 소총 실탄  두 상자    
被害: 첩보원 행방불명  2명   부상  2명.
 
12월까지 계속된 유격대의 활동으로 인민군 사살  75명   인민군 생포  3명   지방양민 구출  120명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와같은 혁혁한 전과를 올린 해병대는 유격대를 조직하여 '구월산'에 입산시켜 그 지역에서 활동 중인 애국청년들을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西海岸에서의 해병대의 기습작전은 적의 군사활동에 실로 막대한 지장을 주었었다.  
 
독립 제41중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제41중대장  중위 李東湖
                 1소대장  소위 金海萬
                 2소대장  소위 鄭二薰
                 3소대장  소위 李台鍾
                     총병력  150명
 
(2)  해병 도서부대 편성  
중공군의 한국동란 개입 이후 도서작전의 중요성은 일익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근 1년 간 동서 양해안에 걸쳐 독립 3개 중대가 맹활약을 거듭하여 해안봉쇄와 해안상륙 등을 감행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으나 보다 강력한 해안봉쇄의 임무를 위해서는 독립중대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증강된 도서부대의 편성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이때 적은 많은 병력을 주로 西海里반도 및 月沙里반도에 배치하고 서해안의 도서를 탈환할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전황 속에서 해안봉쇄는 물론 경계의 강화를 목적으로 해병 도서부대를 편성하여 그 주력은 서해 도서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초대 부대장으로 金斗燦 대령이 임명되어 鎭海 신병훈련소에서 신규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여 본부 및 근무중대, 75mm 무반동총소대, 의무중대, 보급 및 수송중대, 제7대대, 제8대대, 및 제9대대를 1952년1월15일까지 편성와료하여 익월 15일 白翎島로 출발하게 되었다.   
                                                 신편된 도서부대(서해주둔)의 직위표는 아래와 같다.  
                                   
                                                                     해병 도서경비부대 군기
                  
                       
               도서부대 본부가 위치한 '백령도'(인공위성 사진). 오른쪽 밑, 해안에 천연활주로가 길게 보이고 있음. 
 
이때 이미 제7대대(제4중대 포함)는 席島에 대대본부를 두고 '석도'와 椒島(초도)를 확보하고 있엇으며 '백령도'에는 제6대대가 이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延坪島에는 독립 제5대대에서 1개 소대를 차출하여 이를 확보하고 있었다.
 
신규로 증강 편성된 부대는 1월16일 예정대로 이미 도서에 배치된 제7대대, 제8대대(동해안에 배치)를 제외한 부대본부, 제9대대 편입요원 1,250명을 LST 803정에 싣고 '진해'항을 출항하여 '연평도'에 1월22일, '백령도'에 1월20일, '초도'에 1월22일 각각 상륙하여 경비 및 기습상륙 등을 전개하는 한편 상륙전 훈련을 실시하여 전투력을 증강하고 잇었으며 휴전 시까지 계속된 도서부대의 활약은 자못 큰바 있었다.
 
3.  虎島作戰
 
(1)  虎島上陸
'호도'는 서해지구 鎭南浦서남방, 席島동북방 2,000yds(xc72-73.5)에 위치한 무인도로서 對岸과의 거리는 500yds이며 육안으로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指呼之間에 있었다. 이 섬은 동북방에 약간의 사장이 있을 뿐 암석으로 둘러싸인 폭 40yds 길이 100yds 정도의 작은 섬이었다. 
 
主副食物은 물론 음료수와 연료로 사용할 火木도 없으므로 이를 전부 '석도'부대에서 정기적으로 범선을 이용하여 추진보급하고 있었다. 
 
적은 수개 월 전부터 서해안의 각 도서를 탈취할 목적으로 '서해리'반도 및 '월사리'반도에 병력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西海地區 봉쇄함대의 활동을 방해하는 한편 상륙할 기세까지 농후하였다. 이때 '호도'에는 '석도'에서 파견된 소수의 정찰병이 있었을 뿐이었다.
 
해병 도서부대장 金斗燦 대령은 대안에 집결하고 있는 적을 견제하며, 또한 적의 활동에 대비하는 한편 서해지구함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서해지구 봉쇄사령관 '다이야' 소장 및 해병 도서부대 작명 제 4호로서 1952년 2월 12일 席島부대(제7대대장 소령 金東埈)에서 증강된 1개 소총소대를 제1차로 虎島에 상륙케 하였다. 이 소대는 3월12일 鄭炯模 소위가 지휘하는 소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3월 13일에는 공병소대장이 지휘하는 1개 분대를 파견하여 해안 일대에 철조망과 지뢰 및 기타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2)  전투경과
虎島에 해병들이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타 도서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안의 적으로서는 그들의 목에 칼날을 대고 있는 듯 항상 불안에 쌓이게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은 1월30일 박격포 11발을 '호도'에 사격하는 한편 약 30명의 병력으로 소총사격을 가하여 왔으나 해병부대는 이에 즉각 반격으로 격퇴하였다.
 
1월31일 대안의 적은 月沙里반도로부터 중, 경기로 '호도'에 사격을 가하여 왔으나 해병부대는 UN함대에 연락하여 함포사격으로 적을 격퇴하였으며 이때 '호도'부대도 동시에 무반동포의 사격으로 적을 격퇴하였다. 이러한 전투상황은 거의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는 중 이때까지 보지 못한 대격전의 날이 드디어 왔다. 즉 그날은 3월25일이었다.
 
이날 적은 직사포와 박격포로서 '호도'전면에 무수한 포탄을 사격하는 한편 '석도'에도 40여 발의 포탄을 사격하여 '석도'부대를 견제하면서 22:50시 (가)지점에서 범선 4척에 분승한 1개 중대 약 160명이 '호도'를 향하여 공격하여 왔다. 이때, (가)지점에 4척의 적선이 출현했을 때 '호도'의 해병소대는 맹열한 집중화망을 구성하면서 곧 '석도,와 연락하기 위하여 SCR-300과 OK(유격대)의 GRC로서 제7대대장에게(이날 대대장 金東俊 소령과 신임 대대장 閔容植 소령과의 임무교대가 있었다) '호도'에 "적 내습"이라는 보고를 시작하였을 때 적의 직사포탄의 낙하로 통신기가 파괴되어 연락은 단절되었다.
 
적은 해병들의 맹열한 사격에도 불구하고 교전이 시작한지 5분 만에 집중사격을 가하는 한편 4척의 선박은 연막탄을 선수에 살포하면서 1척은 (다)지점으로 우회하였다. (다)지점으로부터 '호도'의 중앙부에 상륙한 적이 해병대 진지로 육박하고 있을 때 (마)지점에 상륙한 적은 (다)지점의 적을 사격하고 있는 해병소대의 후방의 (라)지점에서 고지의 상봉을 점령하고 만세를 부르며 육박하여 오니 해병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포위된 상태에 이르게 되어 약 15분 후에 (1)지점에서 (2)지점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이미 해병의 반수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1)지점을 점령한 적은 해병들에게 일제사격을 가하여 왔다. 해병들은 각개 분산하여 (2)지점에 진지를 점령하고 맹열히 응전하였다. 이때 해병의 인원수는 약 20명 뿐이었다. 해병들은 1정 뿐인 중기관총이 적의 직사포탄으로 인하여 파괴됨에 따라 전황이 극히 불리해졌음을 알았으나 끝까지 사수할 것을 마음 굳게 다짐하고 전투를 계속 하였다.
 
이리하여 (1)지점으로부터 계속 공격하여 오는 적에 대하여 해병들은 (2)지점에서 3차에 걸쳐 반격하기 위하여 일제사격으로 또다시 약 10분 간 교전하였으나 전투원의 부족과 적의 맹열한 화력으로 인하여 부득기 (2)지점에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다.  
 
그러나 잔여 해병들은 끝까지 전멸당하는 한이 있드라도 '호도'를 사수하기 위하여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고지 후방과 암석 사이에서 각개 분산, 잠복하여 우군의 지원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 '호도'부대에서는 적이 '호도'에 내습한 초기에 '호도'로부터 한번 보고를 접하였을 뿐 그 후 일절 연락이 단절됨에 따라 이들을 직접 지원하거나 또는 구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이때 도서부대의 기동력은 전적으로 선박에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선박의 보유수는 4척뿐이었고 그것도 각 도서에 1척 씩 밖에 배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역내에서의 전술기동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때 '호도'에도 대기선박으로 '석도'의 제7대대에서 범선 1척을 배치하였으나 전투 초기에 이미 적의 포탄 2발에 명중되어 침몰하였으므로 '석도'로부터의 지원만이 '호도'의 상황을 호전케 할 수 있는 유일한 관건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석도'의 장병들은 '호도'의 전우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음을 예상하고 "빨리 지원해야 한다! 구출해야 하겠다"는 비통한 심정으로 가슴이 터질 듯하여 백방으로 그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석도'에도 기동선은 전무하였고 범선이 단 1척밖에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석도'부대장이 "적 내습"이라는 '호도'로부터의 보고를 접한 후 역습을 결심하고 전투준비를 갖추어 미 해병대의 서해지구 사령관과 수차에 걸쳐 '호도'에 대한 역습을 상의하였으나 '팬포-드' 대령은 시간이 경과하여야 한다 하여 강력히 이를 반대하였던 데에도 기인하였다.
 
이리하여 席島와 虎島의 해병들은 고전과 비분이 교차하는 가운데 속수무책으로 3월25일을 넘기게 되었으며 다음 날 26일은 고요 속에 밝아왔다. '석도'부대에서는 '호도'의 전투 상황에 대해서 전우들이 역경 속에서 고전하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할 수 있을 뿐 그 외에 다른 상황은 전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날 白翎島에서는 도서부대장 金斗粲 대령이 직접 '석도'에 출동하여 '호도' 상황을 관찰한 도서부대장은 심중에 모종의 결정을 내린 듯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석도'의 전 장병은 점차 사기가 앙양되어 부대장으로부터 속히 현재의 상황에 대한 어떤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일 20:30시 정찰병 1명을 XC73, 6-73, 4 지점에 상륙, 정찰시킨 결과 '호도'에 약 60명의 적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익일 27일 05:00시에 귀대하였다. 이날 20:00시 다시 3명을 1조로 한 정찰조를 차출하여 정찰한바 역시 적병 약 60명을 발견하고 단시간 교전 후 피해없이 '석도'로 무사히 귀대하였다.
 
이리하여 2개 소대 약 80명으로 구성된 전투정찰대는 韓永雲 중위의 지휘하에 발동선 3척에 분승하여 '석도'부대의 엄호사격과 미군 폭격기의 지원으로 3월29일 08:00시 '호도'에 상륙하여 XC 71,5-74,9 지점에 이르러 (2)고지 및 암석 사이에 잠복하고 있던 전우 7명을 구출하였다.
 
전투정찰대가 비장한 각오로 일대 격전을 예상하고 '석도'에 상륙하였을 때는 적은 이미 대안인 육지로 도주한 후였다. 이때 정찰대원들에게 구출된 7명 중 1명은 전사하였고 1명은 부상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출되기 전의 이들 7명은 고립된 역경 속에 있으면서도 기회를 보아 반격전을 하고저 칼빙 소총을 휴대하고 있었으니 이는 이러한 궁지에 빠졌어도 끝까지 싸우려는 이들의 기개는 촌시라도 잊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虎島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 다음 날 席島로부터 파견된 정찰병 1명이 71, 2-73, 8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암석 사이에 잠복하고 있던 소대장 鄭炯模 소위와 분대장 金창현 三曺는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병이 타고 있는 범선을 향하여 수영을 하여 범선에 접근하려 하였으나 거센 조류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서 애석하게도 희생된 사실은 부하를 아끼는 마음과 자기 직책을 끝까지 완수하려는 승고한 책임감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虎島作戰이 초기 단계부터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열거한 것같이 병력과 기동력이 부족하였고 또한 미군측에서 빨리 서둘지 않았다는 등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요한 원인으로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호도'부대는 대부분 신병 제12기생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부대로서 전투가 시작되자 침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당황하였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대원들이 보초근무 이외의 시간은 틈을 타서 해안선에 나가 꿀을 따서 먹는 회수가 많았으므로 적이 아군의 진지내의 안전통로를 상세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적이 상륙 시에 단 1발의 지뢰에도 촉발됨이 없이 지뢰지대를 피하여 신속히 상륙하였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수병력으로서 약 4배의 적과 끝까지 잘 싸워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적이 '호도'에 장기간 머물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야밤에 대안으로 도주하게 하여 후에 지원차 상륙한 전투정찰대에 피해를 전혀 주지 않게 하였으니 그 공로 또한 다대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얻은 전과는 사살 2명, 사상 4명이었고 피해는 전사 3명, 행방불명 33명이었다.  
 
출처: 海兵戰鬪史(海兵隊司令部發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