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 - 동해 도서작전

by 충실한 해병 2022. 11. 28.

한국전시, 해병대 전략도서 확보작전 개관

한국전쟁 동안 해병대는 부대의 특성을 활용하여 38도선 이북 동.서해안의 전략 도서 확보 작전으로 적 해안을 봉쇄하고 적 후방을 위협하며, 첩보 수집 및 유엔군의 해군 활동을 보장하는데 기여하였다.

해병대는 동해안 도서 확보를 위하여 1951. 2. 2. 독립 제42중대를 편성하여 1951. 2. 14 원산 앞 여도에 상륙하여 영흥만 일대의 신도 등 7개 도서를 점령하고 원산항을 봉쇄하였다.

1951. 8. 28. 독립 제43중대는 함경북도 명천 부근의 양도에 상륙하여 차기작전 대비 중, 적 상륙기습부대 1개 대대공격을 완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한편 서해안 도서 확보를 위하여 1951. 4. 2 독립 제41중대를 편성하여, 서해안의 교동도(4월 2일), 백령도(4월 23일), 진남포에 인접한 석도(5월 7일)에 각각 상륙하여 해안선을 봉쇄하였다. 1952. 1. 15 해안선 봉쇄를 강화하기 위하여 해병대사령부 직할부대로 해병 도서부대를 편성하여 제7대대를 서해도서인 석도 및 초도에 주둔케 하고, 제9대대를 백령도 및 연평도에 증강 배치하였고 제8대대를 동해도서인 여도 및 양도에 주둔케 하여 휴전 시 까지 약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전략도서 확보 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작전은 휴전 뒤 백령도를 비롯한 서북 6개 도서를 아군 통제 아래 두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여, 국가 안보에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 해병대 도서작전 주요 연표
여도 상륙 : 1951.2.14

도서작전을 위한 독립중대 창설 (독립41중대, 42중대, 43중대) : 1951년 3월
서해: 독립41중대, 동해: 독립42중대, 43중대

교동도 상륙 : 1951.4.2
석도 상륙 : 1951.5.7
연평도 상륙 : 1952.1.18
초도 상륙 : 1952.1.22
백령도 상륙 : 1952.1.25
양도 상륙 : 1951.8.28
양도 전투 : 1952.2.20

해병대 도서부대 증개편 (독립 41중대,42중대,43중대 흡수) : 1952년

휴전협정에 따라, 북쪽 도서에서 해병대 철수 : 1953년 7월



(1) 서해 도서작전 - 연안 도서확보전

6.25 전쟁을 통틀어 도솔산,펀치볼지대 등과 같은 내륙에서의 전투에서 용맹을 과시한 해병대였지만, 이들의 진정한 전문 임무는 역시 바다에서의 상륙전이었다.

통영,인천에서의 눈부신 활약과 원산에서의 다소 싱거웠던 행정상륙 이후 오랜만에 해병대는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바다로 나아가게 된다.

우선 1950년 말 중국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UN군이 전면후퇴했을 당시 함께 38선 이남으로 넘어온 피난민들의 안전한 이동을 지원하기 위해 해상수송에 대한 안전이 확보될 필요가 있었다. 또한 1951년 초부터 공산군에 대한 재반격이 본격적으로 펼쳐짐에 따라 공산군의 병력및 물자수송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의 중요성도 커져 갔다.

당시 북한및 중국군은 동북 연안보다 서울에서 신의주 방향으로 연결되는 경의도로(京義道路)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를 효과적으로 막으려면 서해 연안지역을 통제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물론 그 중요성으로 인해 공산군에서도 자신들의 주요 보급선이었던 해당 도로 주변에서의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적군과의 해상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결과 해군은 서해 연안에서의 통제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거점기지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주요 도서지역들을 점유하고자 했으며, 여기에 해병대가 투입된 것이다.

서해안 연안지역의 통제작전을 위하여 해병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점은 1951년 3월말이었다.

이때까지 해병대는 안동, 영덕 등 동부전선에서의 작전에서 활약 중이었는데, 해군으로부터 연안지역 일대의 확보및 통제권 강화를 위한 임무를 받으면서 곧바로 3개의 독립중대를 신규편성하게 된다. 즉 제41,42,43중대가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 서해 연안에서의 작전에 투입된 부대가 제41중대로 이동호 중위가 이끄는 3개 소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병력 규모는 150명이었다.

1951년 2월 5일 제42중대와 함께 편성된 제41중대는 '서해안에서의 적군 해상봉쇄'와 '서해 연안 주요 도서지역 점령'이라는 임무를 띠고 1951년 3월 28일 출동했다. 해병 제41독립중대가 서해에 투입되기 전까지는 1950년 말 후퇴했던 육군 출신으로 구성된 '구월산부대', 자원입대한 의용청년들의 '안악부대' 등이 활동 중이었으나, 이들의 활동은 분산된 형태로 수행되고 있었다.

제41중대가 가장 먼저 상륙을 실시한 섬은 교동도였다. 이 섬은 강화도와 매우 가까운 곳으로 인구 1만 2천명 정도에 2개 면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연백군에 주둔 중이던 북한군 제8사단 소속 제2연대가 해안경계 수행과 동시에 이곳에 간첩을 침투시켜 후방교란 및 정보수집을 꾀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군에서 서해안 이내의 물자 수송은 제1,제2연대가 담당 중이었는데, 제1연대는 개성에 배치 중이었음.) 교동도가 적의 손에 선점된다면 강화도는 물론 곧바로 인천과 수도권까지 위험해 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제41중대는 다른 섬들보다도 먼저 이곳을 첫 상륙지로 선택했던 것이다. 이때가 1951년 4월 2일 오전 9시 5분이었다.

상륙 직후인 4월 3월 건너편의 봉화리고지에서 적의 기관총, 박격포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제41중대는 효과적으로 대응해냈다. 이어 4월 5일에는 해군 경비정 306호가 도착하여 화력지원에 나서고, 4월 10일에는 미 공군의 폭격기까지 합세하면서 연안에 집결한 적 4,500명을 겨냥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제41중대는 이와 같은 전투 이외에도 약 7,000명에 달하는 피난민 가운데서 의용대를 훈련및 조직하고, 주민들의 생업을 지원하기 위한 선무공작에도 만전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서해안에서의 적 수송로 봉쇄를 위한 첫 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어 제41중대는 4월 23일 백령도에 상륙하게 된다. 본래 백령도는 그해 1월 21일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소수의 해병대 병력이 이미 상륙했던 바 있었던 곳으로, 미 육군 항공대 소속의 UN군 소속 병력 87명과 국군 정보요원 약 20명, 목포부대 대원 87명, 경찰관 8명 그리고 수척의 국군및 UN군 해군함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제41중대 소속 대원 약 100명은 100고지를 비롯한 이곳의 지대 일대를 경비하게 되었다. 백령도에서 41중대는 약8천명의 피난민 가운데 300여명에 대한 소총훈련을 실시하고, 주민들과 협동 경비체제를 갖추는 등 자체방어를 위한 태세 구축에 힘썼다.

그러던 5월 3일 최우성 이등병조가 지휘하는 유격대원 50명이 진남포 서남쪽 방향의 석도로 출발, 5월 7일 상륙을 완료했다. 석도는 서해 연안도서들 가운데 최북단에 위치한 섬가운데 하나로 제41중대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적군에 대한 정보수집 활동은 물론 직접적인 기습상륙까지 감행하여 후방 보급선을 차단, 교란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제41중대는 6월 10,16,27일 등에 걸쳐 평안남도 정주, 안주와 인근의 섬들에 제1차 기습상륙전을 수행하였으며 여기서 적 탄약고 1개파괴, 적군 15명 사살, 5명 투항, 기관총및 소총 각 1정씩 노획, 그리고 의용지원 청년16명 구조 등의 전과를 올렸다. 대신 해병대원 2명이 전사하고, 1명 부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16명의 첩보담당 인원들도 실종되는 피해를 입었다.

제41중대 제2차 기습상륙은 당시 서해안 일대에 배치 중이던 북한군 제6군단 소속 2개 사단과 적 해군병력이 석도를 위시한 서해안의 주요 도서들에 대한 점령 의도를 드러내던 시기와 맞물려 이루어졌다. 7월 26일 김기준 일등병조가 지휘한 1개 분대병력이 대동강 입구에서 적 수송선을 격침시키고, 8월 5일과 8일에도 금산포 등지에 활약했다. 여기서 적군 46명과 공산당 간부(인민위원장 1명 포함)4명 사살, 2개 교량파괴, 1개 도로 차단, 대전차포 3문과 소총2정 그리고 1,700발 이상의 탄약을 노획하는 전과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석도를 근거지로 한 해병 제41중대의 작전수행은 8월 21일부터 9월 20일까지 더 이어졌는데, 그 결과 적군 32명과 첩보대원 2명을 사살하고, 적 교량 2개소및 건물 3개소 파괴했으며, 의용지원 청년 200명 구출하고, 2,000발의 기관총탄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반면 해병대의 피해는 부상2명과 첩보담당 인원 2명의 실종이 있었다. 그해 12월까지 계속된 이들 해병 유격대의 활약으로 적군 75명의 추가사살과 3명의 생포, 그리고 지방주민 120명 구조에 성공했다.

서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해병대의 해상봉쇄 임무가 갈수록 그 중요성을 더해가면서 이들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기존 독립중대를 보다 확대편성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특히 공산군이 여전히 서해리, 월산리 반도를 비롯한 서해안에서의 대규모 병력배치를 지속하면서 이 지역 연안의 도서지역을 노리려 했기 때문에 더욱더 필요성이 절실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해병 도서부대'가 새로이 편성되었으며, 김두찬 대령이 부대장에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제7,제8,제9대대 등 3개 보병대대를 주력으로 하여 본부및 근무중대, 보급수송중대, 의무중대, 무반동총소대로 구성되어 1952년 1월 15일 편성이 완료되었다. 제7대대가 거점인 석도와 초도를 확보한 가운데 연평도에는 독립 제5대대의 1개 소대가 차출되었고, 이어 1월 20~22일에 제9대대에 새로이 편입된 1.250명의 병력이 연평도와 백령도, 그리고 석도에 분산 상륙하여 경비 및 기습 상륙전을 전개해 나갔다.

그 가운데서 특히 진남포 남쪽, 석도 동북쪽에 위치했던 호도에서의 상륙작전과 전투는 상당한 격전으로 기록된다.

소수의 정찰병들만이 배치 중이던 이 무인도에 1월 30~31일에 적이 기습을 시도한 이후 석도의 제7대대로부터 1개 소대가 추가 투입되었지만, 교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3월 25일 박격포와 직사포 등의 중화기를 동원한 적군의 기습으로 한때 호도에 배치되었던 부대원들은 고립무원에 처하는 위기를 맞았으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제7중대 등의 지원도 계속 늦어지기만 했다.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호도 내부의 해병대원들은 침입한 4배 규모의 적을 상대로 끈질기게 맞서 적의 자진 철수를 이끌어내고야 만다. 3월 29일 제7중대가 지원을 위해 호도에 상륙했을 때는 3명이 전사하고, 33명 실종된 뒤였다. 이 과정에서 얻은 전과는 적군3명 사살 그리고 4명 부상이었다.

그후에도 해병 도서부대는 서해의 주요 도서지역에 배치되어 연안 봉쇄및 기습 상륙을 비롯한 실전 임무, 그리고 교육훈련을 통한 전투력 강화에 주력해 오던 중 1953년 7월말 휴전을 맞게 된다. 휴전과 함께 당시 UN군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장군의 발표로 바다 위의 군사분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북방 한계선 (NLL: Northern Limit Line)이 동,서해안에 설정되었고, 석도를 비롯해서 NLL북쪽에 배치 중이던 해병부대 철수해야 했다. 대신 백령도와 연평도, 그리고 대청도, 소청도를 비롯한 소위 서해 5도에는 해병대 병력이 계속 주둔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출처: 대한민국 해병대, 김재엽, 살림출판사, 2006년


<사진>
1. 한국전시 해병대 도서작전 주요 지역
2.~4. 한국전시 해병대 도서작전- 서해 도서작전 활동 지역
5. 서해 도서작전중- 석도에서 부상병 후송 (당시, 주로 목선을 이용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