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건군 61주년을 맞이한 우리 군의 역사는 말 그대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전차 한 대 없던 육군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정예강군으로 거듭나고 있고, 구축함 한 척 없던 해군은 소말리아 앞바다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다.
전투기도 없이 연락기로 출발했던 공군 또한 한반도 상공의 수호자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국군의 날을 맞아 한반도를 넘어 세계 평화에 기여하면서 정예선진군대로 발돋움하고 있는 우리 군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1.육군과 해군 창설 (1948. 9. 1)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15일 수립되고 같은 해 9월 1일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가 국군으로 정식 편입됐다.
이어 9월 5일 육군으로 명칭을 공식 개칭하면서 대한민국 육군의 공식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해군의 뿌리는 1945년 11월 11일 손원일 제독에 의해 창설된 해방병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946년 6월 15일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한 후 1948년 9월 1일 정식으로 국군으로 편입됐다.
육군과 해군 모두 창군 초기 심각한 장비 부족에 시달렸으나 맨손으로라도 조국의 땅과 바다를 지키겠다는 애국심과 열정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가면서 건군의 주춧돌을 놓았다.
2.해병대 창설 (1949. 4. 15)
해병대는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결단에 따라 1949년 4월 15일 경남 진해에서 380명의 인원으로 창설됐다.
같은 해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됨에 따라 법적인 뒷받침도 완료됐다.
해병대는 6·25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17일 통영지구 상륙작전에 성공, 귀신 잡는 해병이란 명성을 얻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탄환, 도솔산 지구 전투 등지에서 잇따라 승리를 쟁취하면서 신화 창조의 주역이 된다.
3.공군 창설 (1949. 10. 1)
공군의 뿌리는 1948년 5월 15일 통위부 직할로 창설된 항공부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 고문단은 장비가 빈약한 신생국의 처지에 공군 독립이 무리라고 생각했으나 항공력의 중요성을 인식한 항공사령부 간부들은 공군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1949년 10월 1일 대통령령 254호를 근거로 육군항공사령부가 독립, 정식으로 공군이 창설되면서 마침내 육·해·공 3군 체제가 완성됐다. 창군 초기 공군도 전투기 한 대 없는 무(無)의 상태였으나 6·25전쟁 발발 직후 F-51 무스탕 전투기 도입을 시작으로 빨간 마후라의 신화를 창조하게 된다.
4.한미상호방위조약 (1953. 10. 1)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되자 국군은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미군과 힘을 합쳐 북한군의 침입을 격퇴하고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데 성공했다. 휴전 3개월 후인 1953년 10월 1일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 한미 동맹을 핵심으로 하는 한반도 안전의 기본 설계도를 그려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우리 군이 미군과 밀접한 협조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반세기 넘게 한반도 안전 보장에 결정적 기여를 해 왔다.
5.베트남 파병(1964.9.11)
1964년 9월 11일 제1이동외과병원 요원과 태권도 교관단 등 국군 장병 140명이 탑승한 해군 상륙함(LST)이 부산항을 출항, 베트남으로 향했다. 건군 이후 16년 만에 이뤄진 역사적인 첫 해외파병의 순간이었다. 국회에서 전투사단 베트남 추가 파병 동의안이 통과됨에 따라 1965년 10월 해병대 청룡부대가 건군 이래 전투병 최초 해외파병의 주역이 됐다. 이후 육군 맹호·백마부대가 차례로 파병돼 연인원 32만 명에 달하는 파월 국군 장병이 1973년 3월까지 8년 6개월에 걸쳐 총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6000회의 소부대 작전을 수행했다.
6.향토예비군 창설 (1968. 4. 1)
정부는 북한이 무장공비의 대규모 침투를 통해 후방교란 시도에 대응, 1968년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공식 창설했다. 향토예비군은 창설 초기 무장공비 소탕 작전에서 전체 전과의 60%를 거두는 등 뛰어난 전투 능력을 과시했다. 이후 단계적으로 예비군 훈련 담당부대를 창설하고 전시 예비군 지휘조직을 강화함에 따라 예비군은 후방 전력의 중추적 요소로 떠오르게 됐다.
7.무기국산화 사업 시작 (1971. 11. 17)
정부는 독자적인 무기 개발 및 생산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안전 보장에 급선무라고 판단,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했다. 이어 정부는 1971년 11월 17일 번개사업에 착수, ADD로 하여금 소총·기관총·3.5인치 로켓발사기·박격포·지뢰·무전기 등 핵심 군사장비의 시제품을 개발하도록 했다. ADD는 시제품 개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 1972년 4월 31일 제1차 국산병기 시사회를 개최했다. 이 같은 번개사업의 성공에 따라 ADD는 국산 무기 개발의 중추이자 전력 건설의 견인차로 떠오르게 됐다.
8.제1차 전력증강계획 수립 (1974. 2. 25)
정부는 1973년 4월 19일 자주국방을 기치로 주요 무기·장비를 국산화하고 독자적인 전력증강계획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합참이 각군의 의견을 수렴, 1974년 1월 군장비 현대화 계획안을 마련했다. 이를 토대로 국방부는 1974년 2월 25일 일명 ‘율곡사업’으로 불리는 제1차 전력증강계획을 수립했다. 제1차 전력증강계획에 의해 육군의 사단 개념이 재정립되고 소총부터 전차까지 각종 무기체계가 교체됐으며 해·공군의 전력도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개선됐다.
9.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 (1978. 11. 7)
한국은 6·25전쟁 직후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 위임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우리 군의 역량이 향상되면서 한미 양국은 한국 측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연합기구를 구성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그 결과 1978년 11월 7일 한미연합군사령부(CFC)가 창설돼 한미 양국군 연합작전 수행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됐다. CFC 창설에 따라 한국 국가통수 및 지휘기구는 미국 측과 동등한 자격으로 작전과 전략 문제를 논의, 작전지침과 전략지시 하달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10.공군 자동화 방공체계 구축 (1985. 7. 1)
1985년 7월 1일 공군 중앙방공통제소(MCRC)가 현대화된 자동화방공체계의 운영을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전국 각지에 위치한 레이더 사이트에서 구역별로 공중감시, 식별, 요격관제 등의 임무를 수동으로 수행했으나 이날 자동화 방공체계가 구축됨에 따라 한반도 상공을 한곳에서 자동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후 제2방공통제소가 새롭게 창설됐으나 MCRC는 여전히 공군의 ‘잠들지 않는 눈’이자 ‘중추’ 그 자체다.
11.각군 본부 계룡대 이전 (1989. 7. 22)
1989년 7월 22일 서울에 있던 육군본부와 공군본부가 충남 계룡시 두마면에 조성된 대규모 군기지로 이전했다. 1993년 6월에는 해군본부도 계룡시 두마면으로 이전, 3군의 계룡대 이전이 완료됐다. 각군 본부의 계획적 이전에 따라 각군 본부는 위상에 걸맞은 시설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3군이 보다 유기적인 수평적 협조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각군 본부의 후방 이전으로 전시에도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여건을 확보하게 됐다.
12.합동군제로 전환 (1990. 10. 1)
1988년 7월 14일 군은 합동성을 강화하고 지휘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일명 818계획이라고 불리는 장기국방태세 발전방향 연구에 착수했다. 1989년 연구가 마무리됨에 따라 합참의장의 임무와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군 지휘구조 개선안이 마련됐다. 이에 따라 1990년 10월 1일 합동참모본부가 창설되고 합참의장은 과거 국방부장관을 보좌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육·해·공군의 작전부대를 지휘하고 합동부대를 지휘감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군령 분야 권한이 대폭 강화됐다.
13.PKO 최초 파병 (1993. 6 29)
정부는 1993년 6월에 소말리아에 상록수부대(공병대대)를 파견,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에 사상 처음으로 참가했다. 상록수부대가 소말리아에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함에 따라 1994년 9월 서부사하라 의료지원단을 시작으로 1994년 11월 인도·파키스탄 정전감시단 파견 등 세계 각지에서 활발하게 PKO에 참가해 오고 있다. 2002년 1월에는 키프러스 평화유지군(PKF) 사령관에 사상 최초로 한국군 장성이 임명됐으며, 2007년 7월 19일에는 동명부대가 레바논 남부 티르에 PKF 일원으로 파병되는 등 유엔을 통한 세계 평화 활동에 적극 공헌하고 있다.
14.평시 작통권 환수 (1994. 12. 1)
1994년 12월 1일부로 한국 합참의장이 평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게 됐다. 1994년 이전에는 한미연합군사령관이 전·평시 모두 한국군을 작전통제했으나, 평시 작전통제권 환수에 따라 합참의장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 육군의 경계 임무와 해·공군의 초계 활동 등 일상적인 작전 활동을 시행하게 됐다. 또한 종전에는 합참이 연합사와 협조해 시행하던 군비태세 강화, 작전부대의 합동전술훈련 시행, 전투준비 태세 유지 및 검열, 작전부대의 이동 등 작전적 조치들을 합참이 단독으로 시행할 수 있게 됐다.
15.육군과학화훈련장 개설 (2005. 9. 8)
육군은 2005년 9월 8일 강원도 인제에 3500여만 평 규모의 과학화 전투훈련장(KCTC : Korea Combat Training Center) 대대훈련체계를 구축 완료했다. KCTC는 다중통합레이저 훈련체계(MILES)를 기반으로 한 교전훈련장비를 이용, 실전과 거의 유사한 환경에서 훈련할 수 있는 최첨단 시설이다. 육군 각 대대는 KCTC 훈련을 통해 피 흘리지 않고도 전장 실상을 간접 체험, 실전적인 전투준비태세를 확립해 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KCTC는 과학적인 기록분석장비를 이용, 아군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전투 발전을 이끌어내는 데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16.국방개혁기본계획 수립 (2005.9.13)
국방부는 변화하는 안보 환경과 미래전에 부합할 수 있도록 병력 규모를 줄이고 질적인 전력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국방개혁기본계획을 수립, 2005년 9월 13일 ‘국방개혁 2020안’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2006년 12월 1일에는 국방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합참의 지휘구조와 육·해·공군의 구조가 개편됐으며 국방운영 분야에서도 저비용·고효율의 운영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2009년 6월에는 국방개혁 수정안을 확정, 전시작전권 전환에 따른 합참 지휘구조 개편을 반영하고 각군 구조 개편 시기와 범위를 일부 수정했다.
17.F-15K 전투기 전력화 (2008.7.10)
2005년 10월부터 2008년 9월까지 순차적으로 도입된 F-15K 전투기는 2008년 7월10일부터 초계임무 등 작전에 정식으로 투입됐다. F-15K는 각종 무장을 탑재하고도 F-16의 두 배에 가까운 1800km 이상의 전투반경으로 독도까지 안정적으로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을 자랑한다. F-15E를 기반으로 성능을 대폭 향상시킨 F-15K는 위성항법장치(GPS)를 활용한 정밀폭탄(JDAM)이나 SLAM-ER 미사일 등 장거리 공대지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어 강력한 정밀타격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18.K-2 전차 기술 수출 (2008. 7. 29)
2008년 7월 29일 현대로템은 방위사업청과 국방과학연구소의 지원 아래 터키와 전차 개발 기술 협약에 서명, 약 4억 달러 규모의 기술 수출을 성사시켰다. ADD는 2005년 이후 K-21 보병전투 장갑차, K-2 전차, K-11 복합형 소총 등 세계 수준에 손색이 없는 신형 무기를 잇따라 개발하는 데 성공, 국산무기 개발 능력이 단순히 외국을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 주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과시했다. 2008년에는 방산 수출이 10억 달러를 돌파하는 등 국산 명품 무기가 새삼 사회적 주목을 받게 되고 방위산업이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졌다.
19.이지스구축함 취역 (2008. 12. 22)
2008년 12월 22일 한국형 이지스구축함(DDG) 1번함인 세종대왕함의 취역함에 따라 1946년 이후 꾸준히 지속돼 온 해군의 전력 강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세종대왕함 취역으로 우리 해군은 사상 처음으로 광역 대공 방어능력을 갖춘 군함을 보유하게 돼 현대 해전의 발전 추세에 적응할 수 계기를 마련했다. SPY-1D(V) 레이더를 탑재해 최대 1000km 밖의 적 유도탄도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함정답게 2009년 4월 7일에는 군사적 목적을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의 발사를 신속하게 탐지, 그 능력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20.청해부대 파병 (2009. 3. 13)
해군 최첨단 한국형 구축함을 주축으로 한 청해부대가 2009년 3월 13일 출항함으로써 전투함 최초 해외파병이라는 역사적 첫발을 내디뎠다. 청해부대 파병은 육군에 이어 해군도 본격적인 해외 파병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클 뿐만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도 언급했듯이 대한민국이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따라가는 나라에서 이끌어가는 나라로 성장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이와 함께 우리 군은 평화유지 상비부대의 창설도 준비하고 있어 세계 13위의 국력에 걸맞은 국제 기여에 군이 앞장설 수 있는 새로운 발판이 될 전망이다.
사진설명
①1971년부터 시작된 무기 국산화 사업으로 개발된 대표적 무기 중 하나인 현무 지대지유도탄이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다. 국방일보 DB
②강력한 지상타격 능력을 자랑하는 공군의 F-15K 전투기가 편대 비행을 통해 팀워크를 과시하고 있다.(위) 공군 제공
③육군 장병들이 육군과학화전투훈련장에서 실전 같은 훈련으로 전투력을 기르고 있다. (아래 왼쪽)정의훈 기자
④청해부대 1진으로 소말리아 앞바다에 출동한 문무대왕함이 거친 파도를 헤치고 항진 중이다.(아래 오른쪽) 해군 제공
'국방 논문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군, 일본군의 계급명칭 도표 (0) | 2022.11.16 |
---|---|
세계의 국군의 날 - 승전·역사적 의미 담긴 날 지정해 기념 (2009) (0) | 2022.11.11 |
2022~2026 국방중기계획 (0) | 2022.11.08 |
국방개혁 2030 성공의 조건 (0) | 2022.11.07 |
세계 군사력 순위 (0) | 2022.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