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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마전리 동양리 전투

by 충실한 해병 2022. 12. 24.
● 전투시기 : 1950.11.10-12.2
● 전투지역 : 강원 마전리, 동양리
● 주요지휘관 : 김윤근 소령, 황 영 중위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상 세 설 명
 
1. 마전리-동양리 전투의 개요

  패배를 당한 적들이 태백산맥을 타고 분산, 북상하여 마전리 근방에서 정규병들과 연대를 취하여 재편성한 후 수시로 원산을 공격할 태세를 취하자, 해병 제3대대와 제5대대가 미 제10군단장 지휘 하에 들어가 마전리 등지에서 적을 섬멸한 전투이다.


2. 마전리-동양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해병 제3대대 장 소령 김윤근
제9중대 장 중위 황 영
제10중대 장 중위 종덕원
제11중대 장 중위 박동열
제12중대 장 중위 박동근

*적군
단대호 미상부대 약 15,000명


3. 마전리-동양리 전투의 진행과정

  가. 전투전의 개황

  11월 9일 고성지구에 전투임무를 수행 중이던 해병 제3대대와 제5대대는 새로이 미 제10군단장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고성에서 LST 2척에 분승하고 18:00시에 고성남쪽 해안인 송도진리를 출발하여 원산으로 향하였다.
  이리하여 원산에 도착한 제3대대(대대장 소령 김윤근)는 곧 마식령을 넘어 마전리(성남, 덕원, 원산 서쪽 24km)에서 미 해병 제7연대가 실시하는 작전에 합세하고 마전리에서 북상하는 북괴군을 저지,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제5대대와 분리되어 또 다시 잔적섬멸작전에 참가하게 된 제3대대의 장병들은 미 해병대에서 주선한 차량에 의해 원산에서 평남도 양덕에 이르는 가도를 따라 서쪽으로 마전리를 향해 원산을 출발하였다.

  나. 작전계획

  남한일대에서 북상 퇴각한 잔적들이 북괴군 정규군과 합세하고 평원가도의 우군진지를 습격하고 우군보급로의 차단을 꾀하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마전리의 요충을 방어하고, 나아가 이 보급로의 안전을 기하려는 미 제10군단직속 UN군 작전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 제3대대는, 이 곳 우군과의 합동작전으로 방어진지를 구축, 적의 습격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었고, 이 후 부근 일대에 출몰하는 적을 격파, 분쇄하는 것이 이 지구전투의 계획이고, 목표였다.
  이와 같은 임무 아래, 마전리에 도착한 제3대대장(소령 김윤근)은 대대 작전명령 제111호를 예하에 하달하고, 진지작업을 서둘러 적의 습격으로부터 마전리를 방어함은 물론 적을 포착, 섬멸하여 마전리로 통하는 보급로를 확보하려는 지휘관으로서의 결심을 밝혔다.

  다. 마전리-동양리의 전투

  11월 10일
  먼지투성이로 마전리에 도착한 제3대대 예하 각 중대는 부대정비와 화기점검 등을 실시하는 한편, 대대 작전명령 제111호에 따라 미 해병 제7연대 제3대대와 같이 방어진지작업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 마전리의 미 해병 제3대대는 그 연대본부가 원산에 있었으며, 1개 중대의 포병을 배속 받아 사주방어를 실시하는 한편, 이 방면의 작전을 담당한 제7연대본부에서는 보급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마식령정상에 별개의 1개 중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마전리 남쪽 고지에 방어진을 치고 있던 미 해병 제3대대와 합동으로 진지를 구축한 제3대대는 제9중대(중대장 중위 황영)를 우일선, 제11중대(중대장 중위 박동열)를 좌일선, 제10중대(중대장 중위 종덕원)를 중앙에 배치하고 남쪽에서 북상해 오는 적에 대비하였다.
  이 때 대대 지휘소는 마전리 남쪽 100m지점인 486고지후방에 설치하였고, 미 해병대 지휘소는 마전리 초등학교에 설치하고 있었다.

  11월 11일
  01:00에 북괴군 약 4,000~5,000명이 약간의 증화기를 소지하고 마전리 후방 후릉산(△992 마전리 남서쪽 2.5km)고지 능선일대에 출몰하고 있음을 탐지하게 되었다. 대대장(소령 김윤근)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대대 전원을 지휘하고 후릉산에 출동하여 이곳에 잠복한 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벌어진 피아의 교전은 장장 4시간에 걸쳐 실시되었고, 적은 우세한 아군의 공격 앞에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제각기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3대대는 적 사살 69명과 소련제소총 1정, 실탄 60발, 다발총실탄 60발, 기병소총 7정, 수류탄 1상자와 약간의 서류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날 통신대장 이두찬 중위와 대대부관 심선택 소위 이하 9명의 장병은 차량정비와 연락임무관계로 대대주력보다 1일 늦게 마전리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이곳에 잠복하고 있던 북괴군 50여 명으로부터 급습을 받게 되어 교전 결과, 적은 6명의 시체를 남긴 채 도주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심선택 소위는 전사하고 경상자 3명의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9명으로서 적 50여 명을 상대하고 더구나 적의 급습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근소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는 것은 오로지 죽음을 각오한 심 소위 이하 전 대원의 분전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11월 12일
  이 날이 되자, 또 다시 적 약 2개 대대 병력이 마전리 남쪽 유동리(마전리 남쪽 2km) 방면에 잠복하고 있으면서, 이들은 마전리의 제3대대 진지를 공격할 기세였기 때문에 대대는 작전명령 제13호 1을 예하에 시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08:00에 제9중대는 도로를 수색하며 남진하였다. 이들이 유동리에 도착하여 공격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적은 아군의 내도를 눈치 채고 미리부터 겁을 먹고 남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나, 중대는 이들 적을 과감한 기동으로 추격하여 사살 10명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11월 13일
  유동리에서 격퇴당한 북귀군 약 200명은 다시 일산리(마전리 남쪽 10km)에 집결하여 가증스럽게도 주민들로부터 물품을 약탈할 목적으로 부근마을을 습격하고 있었다. 이날 제10중대에게 시달된, 대대 작전명령 제113호 2에 따라 제10중대장(중위 종덕원)은 이 적을 섬멸하기 위해 중대원 160명을 지휘하고 제12중대 선임 장교가 이끄는 기관총 2문, 81mm 박격포 2문의 지원을 받아 10:00에 분대를 떠났다. 당시 제10중대는 전날 제9중대가 유동리까지 진격하였기 때문에 적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관계로 도로수색 중 부근에 잠복하였던 적으로부터 급습을 받았으나, 제12중대 선임 장교가 지휘하는 일부병력의 지원사격과 중대장의 과감한 지휘로 이 적들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10중대는 적 사살 35명 및 포로 2명과 다발총 1정, 실탄 200발의 전과를 올렸고, 아군의 손실은 전사 1명, 중경상자 3명이었다.

  11월 14일
  09:00에 이르러 북괴군의 2개 대대 병력이 유동리(마전리 남쪽 2km)방면에 또다시 중화기를 소지하고 잠복하고 있음을 탐지한 대대는 곧 이 적을 격멸하기 위해서 제11중대(중대장 중위 박동열 중위)로 하여금 중기관총 2문을 배속시켜 출동케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유동리부근 일대를 수색한 후 11:00에 접적 없이 귀대하였다.
  20:00가 되자 대대진지 전방에 약 2개 소대로 추산되는 적병이 출현하고 아군진지를 정찰하는 기미가 보였으므로 대대장 명령으로 제9중대장 황 영 중위는 160명의 중대원을 인솔하고 적을 격멸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이들은 적과 약 1시간여에 걸쳐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을 멀리 격퇴시켰는데, 이들은 사살 7명, 소총 1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1월 15일
  마전리에서 본대와 분리되어 제3대대가 분전하고 있을 때, 고성에 있는 해병대사령부와 제1대대는 계속 잔적을 격멸하고 있었고, 일부부대로 하여금 통천방면에 출동시켜 통천 서방에 있는 발전소와 철로 등을 경비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별다른 적정 없이 아침을 맞이한 제3대대는 진지 내의 방한작업을 실시하며 진지보강작업을 강화하였고, 멀리 소부대정찰대를 파견하는 등 부근일대의 적정탐색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1월 16일
  이때 입수된 첩보에 의하면 평양-원산 대로에 출몰하는 북괴군은 약 2,500명으로 추산되었고, 적은 아호비령(원산 서방 20.5km, 평양-원산가도, 마전리 서북방 6km)과 상자개동(아호비령 서방 4km), 하자개동(상자개동 서방 2km), 토기리(아호비령 서방 15km), 동양(평원가도 양덕 동방 20km) 등 요지에도 약 1개 중대의 병력을 배치하여 부근일대에 출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제3대대는 양덕에 있는 UN군과의 연계작전을 위해 또 다시 동양 마전리 서방 20.2km(실제거리 70km), 평남도 양덕군까지 진출하기고 되어, 13:00시에 제11중대(중대장 중위 박동열), 제12중대(중대장 중위 박동근), 본부중대, 제10중대(중대장 중위 종덕원) 순위로부터 이동을 전술종대로 하여 마전리를 출발하였다. 이때 제9중대(중대장 중위 황영)는 부대후위의 임무를 맡았다.

  11월 17일
  고된 강행군으로 마전리에서 동양에 도착한 제3대대는 곧 진지작업을 서두르고 이날 20:00까지는 모든 공사를 완료하게 되었다.
  한편 고성 방면의 제1대대 상황으로는 미 제3사단 배속에서 해제된 제5대대 제23중대(중대장 중위 권석기)가 고성에 도착하고, 제1대대장 지휘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고성고급중학교에 숙영하고 있었다.

  11월 18일
  진지 주변 4km에 대한 적정을 탐색하고, 적의 기습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제3대대는, 민폐근절과 주민들의 사정을 돌봐 주기 위해 제9중대장(중위 황영)을 민정관에 임명하고 아울러 동양지방의 치안유지에 주력케 하였다.
  이날 고성지구 사정으로는 제23중대가 통천에 파견하여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김종식 대위의 일부병력은 이를 증강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며, 이서근 소위의 일부병력은 고성남방지역에 적이 출현하였다는 첩보에 따라 출동하고 있었다.

  11월 19일
  동양지구를 확보한 제3대대는 부근일대와 양덕(동양 서북방 22km)지구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적정 수색활동을 전개하였다.
  제9중대(는 08:00에 대대진지 남방 4km 지점인 영암리와 덕암리를 수색하기 위하여 이날 목적지는 물론, 원산으로 통하는 구룡리까지 무려 9시간에 걸쳐서 적정을 수색하였다. 또한 제10중대는 08:00부터 대대장(소령 김윤근)의 지휘로 차량에 의해 양덕까지 수색정찰을 감행한 다음, 양덕에 있는 UN군부대와 연계를 취하였다.
  또한 진지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 제11중대(중대장 중위 박동열 중위)는 제9중대와 제10중대의 경계임무를 인수하여 대대진지를 경비하였다.

  11월 20일
  이날 적정에 의하면 북괴군이 공진리(동양 남쪽 마을)방면에 약 1개 대대가 출몰하고, 구룡리에 잠복한 1개 대대의 패잔병들은 부근 토기(남양-구룡리 사이), 자개동(토기일리 불쪽 마을)에 출몰하여 의류를 약탈하고 현물세를 강제로 징수하고 있었으며, 남양에 있는 제3대대 진지를 기습할 기세라는 것이었다.
  대대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제11중대장(중위 박동열)의 지휘 하에 163명으로 하여금 토기리의 패잔병을 격멸하고, 이어 자개동까지 진격할 목적으로 이에 남양을 출발시켰다. 부대가 토기리에 이르니, 적은 이미 도주하였기 때문에 다시 자개동을 공격하고자 이창환 삼등병조가 지휘하는 분대를 먼저 첨병분대로 하여 전진시켰다.

  11월 21일
  이날 적은 공진리(마전리 남방 4km)에 1개 대대, 마전리-남양 중간지점인 구룡리에 약 1개 대대의 병력을 잠복시키고 있었으나, 새로 마전리 부근으로부터 이동한 병력 1개 대대가 공진리 서방 3km 지점인 덕암리에 증파되었고, 동양 북방에 위치한 용산리에서 1개 대대가 증강되어 동양을 포위할 태세에 있었으며, 마전리-동양간의 도로를 차단하고 적극적이 공세를 기도하고 있었다.
  남양중학교에 위치한 제3대대는 전날 제11중대가 자개동에서 섬멸하지 못한 적이 재차 토기리에 침입하여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07:00에 각자 1식분의 식량을 휴대시켜 제10중대로 하여금 자개동일대를 수색케 하였으나, 이들은 접적 없이 16:00에 진지로 귀환하게 되었다.

  11월 22일
  대대지휘소를 동양중학교에서 다시 대대진지가 있는 고지로 이동하게 된 제3대대는 각종 안전사고가 빈발함에 비추어 예하 장병에게 화기취급의 철저를 포함한 진중근무요령 등 교육을 강화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대대작명 제119호로 교육지시를 하달하게 되었다.
  원산과 동양간 가도에 출몰하고 있던 적은 날로 증강되어, 동양에 있는 제3대대에게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미군 차량부대를 습격하는가 하면, 특히 마전리-동양간 도로는 적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으며, 사방을 둘러싼 험준한 지세에 우군부대는 고립되어 동양에 포진하고 있는 대대는 사실상 적에 의해 첩첩이 포위된 형세가 되어 전세는 극도로 불리하게 되고 있었다.

  11월 23일
  원산에 본부를 둔 미 보급부대와 마전리 엄호부대는 수차에 걸쳐 마전리-동양간 보급로 타개에 진력을 다하였으나, 자개동과 토기리 일대에 출몰하는 약 2개 대대의 적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그때마다 전멸하거나 실패하여 마전리로 되돌아가고, 제3대대에 대한 보급물자수송은 큰 난관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이날 원산보급대대는 수송차량 10대로써 전차 수대의 엄호 하에 기어코 이 보급로를 타개하려고 마전리를 출발하여 아호비령을 넘어 구룡리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대대는 이와 같은 보급부대를 영접하고자, 대대장 진두지휘 하에, 제10중대를 첨병중대로 하고, 제11중대, 제12중대 순으로 토기리를 경유하여 자개동, 구룡리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는 11:00에 중화기를 소지한 빨치산과 합세한 북괴군 약 2,100명과 조우하게 됨으로써 피아의 교전은 시작되었다. 수적으로 열세한 대대는 악전고투하여 이들 적과 싸우기를 무려 7시간, 적은 비로소 아군의 과감한 기동과 필사적인 공격에 견대지 못하고 뿔뿔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타개된 보급로는 곧, 보급부대의 구룡리 도착을 무난케 하여 구룡리에서 대대는 그 후 보급부대를 동양까지 엄호하여 안착하게 하였다.

  11월 24일
  방한피복을 아직도 보급 받지 못한 대대 장병들은 눈이 쌓이고 밤이면 영하 10여도의 추위를 이겨 내기에 큰 고역을 면할 수가 없었으나, 그 보다도 더 큰 위협은 대대진지를 둘러싸고 있는 적정이었다.
  부근일대의 울창한 송림 속에 잠복하고 있는 적은 더욱 그 활동이 증가일로에 있었고, 야간에는 진지 가까이 접근하여 동정을 살피고 때로는 박격포공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적들의 활동들은 아군에게는 충분한 식량과 실탄 등이 보급로의 두절로 결핍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내습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기 위한 것들이었다.

  11월 25일
  이날이 되자 북괴군은 토기리를 지나 검동 계곡으로부터 상자개동, 하자개동 아호비령에 이르는 지역일대에 약 8km 간격을 1,500~2,000명이 잠복하여 마전리-동양 간의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동양 남방 4km인 공진리, 덕암에 근거를 둔 적병은 날로 그 전력이 강화되고 있었으며, 동양 서방 4km의 용산리의 적 약 1개 대대는 여전히 동양-양덕사이 도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11월 26일
  03:00에는 동양에 있는 제3대대 진지에 약 1개 연대병력으로 추산되는 적이 진지 사면에서 공격을 기도하여 왔다. 대대는 이를 맞아 각 장병들로 하여금 자기 위치를 사수케 하고, 산성과 같은 유리한 지형지물을 최대로 이용한 사전에 계획된 방어사격으로 약 10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무려 사살 114명, 포로 4명, 소총 5정, 수류탄 30발을 노획하였고, 전사 3명, 부상 1명, 81mm 박격포 1문의 손실을 입었다.

  11월 27일
  마전리-동양간의 아호비령과 토기리 등에 잠복한 북괴군은 그 활동이 점차 활발하여졌고, 더욱이 맹산과 양덕, 그리고 성천방면의 적도 전력을 증가하여 그 활동은 날로 격증되고 있었다. 심지어 토기리 일대의 북괴군은 아군 전사자의 피복을 탈취하여 우군행색으로 위장하여 출몰하고 있었다.
  이날 특히 동양에 포진한 제3대대(대대장 소령 김윤근에게 실탄을 보급하려고 아호비령을 넘어 동양으로 오던 미군 수송대가 상자개동, 하자개동 부근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60mm 박격포탄 1500발, 81mm 박격포탄 400발을 피탈당한 후, 약 70명이 전사하고 약 50명이 부상을 한 큰 손실을 입은 다음 각기 분산되어 동양에 있는 제3대대 진지에 간신히 도착하여 이 급보를 전하였다. 대대는 즉시 부상병을 치료하고 마전리와 원산에 각각 이 사실을 알려 미군들을 인수케 하는 조치를 취한 다음, 우군으로부터 피탈한 각종 실탄이 여하히 운반되는가를 예의 주시하였다. 이날 또한 제5대대는 지휘소를 신고산에 옮기고 대대 전 병력으로써 신고산 방어에 돌입하고 있었다.

  11월 28일
  전날 우군의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의 손실을 입은 사실을 알았으나, 밤이 다가오기 때문에 무모한 반격을 시도하지 않고, 적정만을 살피고 있던 대대는 아침이 되자 북괴군의 근거지인 공진리(동양남방)의 우군으로부터 피탈한 탄약을 운반한 것을 알게 되어, 이를 공격코자 제9중대에게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제9중대장(중위 황영)은 0600에 중기관총부대를 제12중대로부터 배속받아 미군에서 보내 온 보급부대차량을 이용하여 토기리로 우선 진격하였다. 이때 토기리에 중화기를 소지한 약 1개 대대의 적은 아군에게 반격을 가하였음으로 피아간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다. 약 1시간에 걸친 이 교전에서 적은 우세한 병력으로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여 심한 저항을 하였으므로 제9중대 일부병력의 과감한 적진의 돌입도 지리적으로 조건이 불리함을 어찌 할 수가 없어 부득이 공격을 중단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전과는 사살 48명, 부상 25명, 다발총실탄 750발을 노획하였고, 손실은 전사 4명, 부상 21명이었다.

  11월 29일
  이날 동양지구의 적은 맹산에서 양덕지구로 이동한 부대와 연계를 지어 증강된 약 3,000명과 함께 대대진지에 내습할 기세였다.
  한편 27일 적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뿔뿔이 동양까지 도착한 미 보급부대의 잔여인원은 마전리로부터 파견된 구출부대의 도움으로 대대진지를 떠나 마전리로 향하고, 이들은 토기리에서 다시 구원부대와 연계되어 무사히 마전리 방면으로 되돌아갔다.
  제11중대는 10:00에 동양을 출발하여 미군보급부대의 마전리 귀환을 엄호하고, 겸하여 토기리일대의 적정을 수색한 다음, 일몰 경에 이들은 임무수행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였으나, 이날 14:00에 약 1개 연대병력의 적은 동양리의 제3대대 진지를 포위하고 박격포 지원 하에 공격을 가하여 왔다.
  이때 박격포탄을 보급 받지 못한 제3대대는 다만 유리한 지형을 최대로 선용하여 소화기로서만 대항하는 선전상을 보여 적에게 많은 손실을 강요한 끝에 이들을 모조리 격파시켰는데, 그 교전 시간은 약 1시간 동안이었다.
  이 전투에서 적은 50구의 시체와 다발총 6정, 동실탄 800발을 버린 채 도주하였고, 아군의 손실은 전사 1명, 부상 18명이었다.

  11월 30일
  온 천지가 눈에 덮여 오직 산짐승들의 포효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리는 분위기 속에서 홀로 분전하고 있는 제3대대를 L-19기에 의해 전달되는 통신연락문과 무전기가 없었더라면 고도에 갇힌 외로운 신세를 아마도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대는 이날, 전날 적의 내습으로 파괴된 진지의 보수를 개시하고 또 다시 예상되는 적의 기습에 대비하는 분망한 일정을 보내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병력만을 차출하여 주위일대의 적정탐색을 위해 출동시켰을 뿐, 별다른 작전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날 원산에 있는 해병대의 본부상황으로는 지금까지 연천에 남아 있었던 제23중대가 군단명령으로 원산에 도착하고 명산국민학교에 숙영하게 되었다.

  12월 1일
  토기리 고지와 그 부근마을에 약 1,500명의 적이, 그리고 상작동과 하자개동일대에 1,200명, 공진리와 덕암리에 2,500명, 용산리에 2,000명의 적이 각각 집결하여 제3대대 진지를 포위하고 있는 형세에 있으며, 또한 덕천을 지나 맹산 양덕지구에 이미 침입한 중공군은 그 수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점점 그들의 야포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우군으로는 마전리에 미 1개 대대가 야포 1개 중대의 지원을 얻어 포진하고 있을 뿐, 성천에 있던 UN군은 순천으로 이동하였으며, 양덕과 온정리를 확보하고 있던 그 곳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대는 내일 중으로 동양에 있는 제2대대 진지로 이동할 계획에 있었다.
  신고산에서 원산으로 이동한 제1대대는 이 날 미군과 교대하여 원산방어에 임하고 있었는데, 부대대장(대위 김종식)은 2개 중대와 81mm 박격포 2문, 경기관총 1개 소대를 인솔하고, 원산외곽에 이르러 미군과 임무를 교대한 다음, 평원선을 타고 원산에 침입하려는 북괴군을 요격하고자 하였다. 한편 제1중대(장, 정만진 중위)는 1개 기관총반의 배속을 받아 관풍리(원산 서방4km)에서 미군과 임무를 교대하고 제3중대(중대장 중위 이봉출)는 1개 기관총반에 배속을 받아 중청리(원산 나방 2km)에서 미군과 방어임무를 교대하고 있었다.

  12월 2일
  04:30까지 이동준비를 완료한 제3대대는 05:00를 기하여 항공기의 엄호사격으로 부근일대의 적을 교란시키며 동양을 떠나 마전리로의 이동을 개시하였다. 전술중대는 토기리까지는 제11, 제10, 제12, 본부, 제9중대 순위로 행군하고, 토기리를 지나서는 제9, 제11, 제12, 본부, 제10중대 순으로 그 이동순위를 바꾸어 행군하기로 한 사전계획에 따라 각 장병들은 휴대 가능한 실탄과 미군으로부터 수령하여 사용 중인 외투, 침낭, 모포 1매와 1일분의 Raiton을 배낭에 넣은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마전리로의 길을 떠났다.
  이 부대이동에는 양덕과 동양지역의 치안원과 북괴들의 잔악상과 그들의 포악한 학정을 뼈저리게 느껴 온 피난민이 동행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경호임무가 뒤따라, 부대이동의 복잡성을 야기 시켰으나, 피난민의 생명을 보호하며 그들의 간곡한 자유에의 갈망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대대장(소령 김윤근)은 조금도 이를 꺼려하지 않았고, 뒤따를 수 있는 한 많은 피난민들을 동행하게 하였다.


4. 마전리-동양리 전투의 결과

  12월 3일 마전리에 도착한 제3대대는 그 곳을 방어 중이던 미군 1개 대대와 같이 합세하게 되어 이들과 같이 마전리방어에 진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이곳의 미군들도 12월 4일을 기해 원산으로 이동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제3대대도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 군단명령으로 12월 3일 마전리의 미군들과 같이 원산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에 따라 제3대대는 4일 07:30까지 이동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시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4일에는 미군차량으로 원산으로의 부대이동은 또 다시 시작되었으며, 이무렵 원산의 우군은 전부 함흥으로 육로와 해로를 이용, 이동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