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투시기 : 1950.7.26-7.28
● 전투지역 : 경남 함양 ● 주요지휘관 : 민기식 대령, 김병화 소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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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세 설 명 | ||||
1. 함양-안의지구 전투의 개요
7월 24일, 남원 방어에 실패한 민부대 지휘하의 김병화부대(김부대)와 오덕준부대(오부대), 그리고 해병 김성은 부대는 서전사작명 제 1호(7.22. 8000부)에 의거 운봉으로 이동하여 지연전을 계속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장계-안의 간을 침로로 택한 북한군 제 4사단(사단장 이권무)주력이 안의에 이어 거창과 함양으로 접근하게 되자, 민부대는 후방을 차단하기 전에 급거 함양방어로 전환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므로 민부대는 미 제 24사단 19연대와 협동하여 안의와 함양에서 일전을 치른 뒤에 산청-진주의 능선으로 병력을 수습하였다. 한편, 거창 방면에 대기 중이던 미 제 34연대도 전세를 만회하지 못하여 협천 방면으로 물러나는바 되었다. 2. 함양-안의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소장 신태영 영남서부지구방위사령관(가칭) 소장 채병덕(1950.7.25 16:00부터) 민부대(신편 제 7사단)장 대령 민기식 김부대(김병화부대)장 소령 김병화 오부대(오덕준부대)장 대령 오덕준 해병대(김성은부대_장 중령 김성은 미 제 24사단장 소장 존 처치(John H.Church) 제 19연대장 대령 네드 무어(Ned D. Moore) 제 34연대장 대령 찰스 뷰챔프(Charles E. Beauchamp) 제 29연대 제 1대대장 중령 위즐리 윌슨(Wesley C. Wilison) 장비(미군제외) 81mm 6문 60mm 13문 중기관총 14정 경기관총 15정 차량 45대 *적군 북한군 제 4사단장 소장 이권무 제 5연대장 대좌 최인덕 제 16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 18연대장 대좌 김희준 포병연대장 대좌 김준 병력 : 2,000명 장비 122mm 12문 120mm 18문 76mm 36문 45mm 48문 자주탄 18문 전차 23대 3. 함양-안의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가. 작전계획 당시, 민부대의 남원철수에 앞서 함양으로 이동한 서해안지구전투사령관 신태영 소장은 호남지역에서와 같이 육군본부로부터 명확한 행동지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난감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호남에서의 고수방어 계획을 지양하고, 진안. 장수 간의 병동대인 경찰혼성부대와 민부대로써 덕유산-백운산-지리산의 잔악지대에서 되도록 적을 유착시킨 다음, 시간을 벌어 조직적인 방어진지를 급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결이 두절되어 상황을 파악치 못할 뿐만 아니라, 피난민의 대열에 끼어 물러서는 병원수가 폭증하였으므로 우선 이들을 수습하여 함양에서의 방어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나. 함양-안의지구의 전투 안의부근의 전황 적의 침공상황 북한군 제 4사단(사단장 소장 이권무)은 1개 연대를 선봉으로 삼아 보, 포 협동으로 장계로부터 안의를 직충코자 하였는데, 뒤에 반명된 이들의 침공상황은 다음과 같다. 즉, 7월 20일에 대전을 점령한 각 사단은 이른바 의용군이란 미명하에 현지에서 강제로 징병한 1,000명을 보충 받아 23일 아침부터 금산가도로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제 6및, 3 양 사단은 진주와 김천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그 중간에서 안의-거창 정면으로 투입하기 위하여, 금산에 이르러 1,000명의 신병을 다시 충원 받은 다음, 25일에 각지를 떠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전차연대는 보병부대가 낙동강변에 도달할 때까지 금산에 계속 배치되었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장계-안의의 통도로를 주력의 침로로 선택한 듯 하였으며, 이에 비하여 아군의 당면배비는 허술할 따름이었으니, 단지 당면에는 24일 함양으로 이동한 서해안지구전투사령관 신태영 소장의 격려를 받은 경찰혼성부대(대대규모)가 무주, 진안 등지로부터 축차 철수하다가, 전북과 경남의 북경계인 육십령고개(안의 서쪽 15km)에서 험준한 지리를 얻어, 방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야포와 박격포 등 중화기로 지원된 연대 규모의 적은 차량편으로 기동하여, 이날 미명에 각 고개를 돌파하려는 듯이 05:00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방자인 경찰부대는 도로를 따라 거의 이열종대로 접근하는 적세에 잠시 압도당하기도 하였으나, 곧 진용을 가다듬어 소총화력을 가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병원과 화력이 우세한 적에게 밀리는 바 되어 경찰부대는 마침내 안의로 분산 철수하게 되었으니, 장계-안의의 통로는 스스로 개방당하여 경남 서북부의 요충인 안의로 지향하는 적세를 저지할 길이 막연하였다. 오부대 및 김부대의 출동 민기식 대령은 경찰부대의 보고로 육십령이 돌파당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 함양우체국으로 달려가 육군본부에 상황을 급보하고, 신태영 소장 및 오덕준 대령과 협의한 결과, 오부대와 김부대를 안의방어에 전용키로 결심하여, 요지 다음과 같은 명령을 구두로 하달하였다. ●작전명령 『① 적은 금조 장계-안의도를 따라 남침중임. ②작일 부원한 미 제 19연대의 1개 중대가 현재 안의에서 방어에 임하고 있으며, 해병대는 팔령재를 계속 견수중임. ③ 부대는 안의에서 미군과 협동하면서 이 적을 격멸하려 한다. ④ 오, 김 양 부대는 즉시 안의로 출동하여 미군과의 협동으로 진지를 급편하라. ⑤ 부대출동은 차량에 의하라. ⑥ 지휘부는 계속 함양에 위치할 것이다.』 이로써 오부대와 김부대는 또다시 안의로 출동케 되었거니와 그 병력은 편성당시에 비하여, 거듭된 낙오자의 수용과 정비에도 불구하고 모두 70~80%에 지나지 않았다. 차량기동으로 안의로 향한 양 부대는 30분동안 기동 끝에 창평리(함양 북쪽 5km)를 경유 오부대는 468고지(안의 서쪽 2km)에, 김부대는 그 서쪽에 인접한 421고지일대에 전개하고 미 제 19연대 1대대의 A중대와 함께 안의 서쪽에서 남ㄴ북으로 진지를 급편 하였는데, 이때가 언제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전후 상황으로 미루어 대체로 정오 무렵이라고 추리된다. 그러나 안의로 급박중인 적의 진출속도에 비하여, 이 진지편성은 이미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적을 안의 침공에 앞서 수미상의 탐색대를 침투시킨 듯, 아직 충분히 태세를 굳히지 못한 김부대를 공격하고, 연이어 후속부대로써 오부대를 교란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양 부대는 황급 중에서도 부대장의 호령일하에 화전을 집중하였는데, 적은 아군의 대비상황의 위력 탐색이 우선의 목적이었음인지 수분간의 교전만으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적은 미 제 19연대 1대대의 A중대 진지전방에도 출현 탐색하는 집착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이때가 14:00로 A중대는 이때에 미 제 29연대 제 1대대(미 제 19연대 배속)와 진지를 교대하고 있었다. 미 제 29연대의 부원과 진지의 교대 이날, 진주에 위치한 미 제 24사단 19연대(연대장 대령 네드 무어(Ned D. Moore))는 이미 전날에 미 제 8군의 조치로 24일에 오키나와로부터 부산에 도착한 미 제29연대 1, 3 양 대대를 배속 받게 되었는데, 연대장 무어 대령은 제 1대대를 함양-안의에, 제 3대대를 하동방면에 각각 배치키로 결심하고, 제 1대대장 윌슨(Weseley E. Wilison)중령에게 상황이 위급하니 지체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이르기를 『오전 중에 화산리와 안의부근의 미 제 19연대 1대대 진지를 인수하라.』라고 하였으며, 미 제 19연대 1대대장에게는 『진지를 미 제 29연대 1대대에게 인계하는 즉시로 진주로 집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가 10:00무렵인데, 윌슨중령의 제 1대대는 차량으로 단성-산청으로 기동하여, 1시간 반 뒤에는 화산리에서 제 19연대 1대대 진지를 인수하였다. 그런데, 이 진지 교대 시에 사용할 수 있는 지원화력은 포당 연막탄 2발이 전부인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가 있었을 뿐, 포병이나 전차는 물론 공중지원도 전혀 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진주의 제 19연대 본부와의 통신수단은 차량전령에 의존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진지교대에 앞서 B중대로 하여금 안의의 제 19연대 A중대진지를 인수토록 하기 위하여 임시로 리(Rhea) 중령의 대대에 배속하였던 까닭에, 이에 리 중령은 윌슨 중령대대의 D중대(중화기 중대)에서 35명의 증원을 받아 이들을 지원토록 조치하였다. 이로써, 리 중령의 제 19연대 1대대는 오후 일찍이 안의로 직행하였으며, A중대에게는 『B중대에 진지를 인계하는 즉시, 화산리로 집결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에 미 제 19연대 A중대는 이미 적과 접전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진지교대는 5시간이상이나 지연되고, 16:00에야 본대를 찾아 출발할 수가 있었다. 이들이 3km가량 기동하였을 때, 오부대 및 김부대와 교전 중 적 잠복부대의 기습을 받아 6대의 자동차가 대파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격포 등 중화기의 일부를 유기하였으며 중대의 기동대열은 혼란되어 동내 그 일부만이 다음날 아침에 거창으로 철수하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한편, 화산리에서 진지를 인수한 미 제 29연대 1대대장은 이 무렵 인접부대와의 연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S-2 홀리데이(San C. Holliday)중위를 함양으로 급파하여 민부대와 접촉케 하였으나, 미 제 34연대와는 연계할 수 없었다. 즉, 연락차량 2대를 급파하였는데, 화산리에서 남강 우안도로를 거쳐, 안의 2~3km의 교차로에 이르렀을 때, 민가에 잠복한 적의 기습으로 2명이 전사하고, 3명만이 안의로 되돌아가 상황을 급보케 된 것이다. 이처럼 양 대대는 악상황하에서 진지를 교대하였으니, 방비의 허술함은 더욱 심각하여질 따름이었다. 오부대 및 김부대의 철수 적은 17:00부터 오부대와 김부대가 점령한 468고지와 421고지 일대에 각종 야포와 직사화력을 집중하더니, 해질 무렵에는 2개 대대규모가 증강되어 더욱 광란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양 부대는 처음으로 체험하는 적의 격렬한 포격 속에서도 진지를 지켜, 그들 공격 제 1파를 일시 격퇴한 바 있으나, 20:00에 이르러 그 후속파가 가일층 치성을 부리게 되어 신병이 대부분인 오부대는 마침내 진세를 지탱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오부대는 화산리로 병방을 수습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일부가 차량으로 화산리 북쪽 6km에 이르렀을 때, 함양을 우회 침입한 것으로 보이는 교적의 기습을 받아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따라서 부대는 산중에서 대오를 재정비하고 역습하였으나, 적을 포착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오부대와 인접하였던 김부대는 초일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린 바 있으나 전술한 바와 같은 오부대의 분요로 측방을 노출당하고 말았다. 이에, 부대장은 즉시 일부를 우측방으로 전환하였으나, 야반인지라 피아를 분간할 수가 없는 가운데 병력을 집중할 수가 없으므로, 전세의 역전이 힘겨울 것으로 판단하고 덕암리(함양 북쪽 6km)로 전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적의 추미가 급한터라, 함양에 잔류하였던 일부병력이 증원을 받으면서 함양으로 끝내 철수하고 말았다. 미 제 29연대 1대대 B중대의 고전 적은 오부대 및 김부대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미 제 29연대 1대대 B중대가 점령한 371고지에서도 광파를 이루었다. 진지를 인수하기가 바쁘게 공격을 받게 된 중대는 인접한 민부대의 상황을 알지 못한 채, D중대의 박격포 및 중기총의 지원을 받는 가운데, 한국에서의 초전을 선전으로 장식하여 상당한 시간 이곳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어둠이 깔리면서부터 삼면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으므로, 중대는 사주방어의 어려움을 겪게 되고, 밤이 깊어감에 따라 전세는 더욱 악화되기만 하였다. 이에, 중대장은 난관을 타개키 위하여 남강건너의 안의 동쪽 239고지(안의 동쪽 1km)로의 철수를 결심하고, 진지 전환을 명령하였다. 이로써 중대는 먼저 장교 2명과 사병 16명을 남강 너머로 선발시켰으나, 잔여병력은 적의 자동 화력에 막혀, 퇴로돌파에 악전고투 끝에 18명만이 이날 24:00에 거창으로 수용되었을 뿐, 잔여의 215명의 중대원(D중대 요원도 포함)은 끝내 적중에 갇혀 다음날부터는 전원이 전사 실종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렇듯 안의에서의 격전이 전개될 무렵, 대대장 윌슨중령은 통신의 불통으로 B중대 상황이 불명한 채 당면한 상황처리에 몰두하였는데, 수차에 걸친 연결병 파견마저 도중에서 좌절되는바 되어, 끝내는 각 중대의 구출을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함양부근의 전황 전날부터 시작된 오부대와 김부대의 수의철수는 적에게 침로를 개방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안의에 침입한 추봉은 일로 거창으로 지향케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함양을 일기에 침탈코자 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함양에서 당면작전을 지휘중인 민기식 대령은 전기 양 부대와의 연락의 두절로 그 상황을 파악할 길이 없었는데, 함양으로 복귀한 김부대원의 급보를 받고서야 비로소 안의 저지선이 돌파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소재를 알 수 없는 오부대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여러 차례 노력하다가 신태영 소장과 협의하여, 적이 밤사이에 아군을 뒤따라 함양으로 근박하리라고 판단한 결과, 해병대가 아직 팔령재를 방어하고 있는 시점에서의 함양의 지구견수가 절실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 함양에 배치한 김부대원과 철수병력을 재편하여, 안의-거창 가도로 급거 출동케 하였으며,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 예하의 본부중대로 이들을 증원토록 하였다. 이리하여 혼성 1개 중대는 이날 04:00무렵에 다시 북상하여 용평리(함양 북쪽 4km) 부근에 저지진지를 점령하였다. 해병대의 전진 민부대장은 안의로부터의 위협이 점차 고조됨에 따라 함양방어책에 고심하는 가운데, 해병대의 함양이동을 08:30에 명령하였는데, 그 요지에 이르기를 『즉시로 함양으로 이동하되, 1개 중대를 계속 팔령재에 잔치하여 고수토록 하라.』라는 것이었다. 이에, 김성은부대는 곧 제 3중대(중대장 중위 이봉출)를 계속 현지에 남도록 하여, 운봉을 거쳐 함양으로 침공하리라고 믿어지는 적을 지연시키도록 하는 한편, 주력으로써 함양으로 도보이동토록 하였다. 이 이동을 완료한 것은 대체로 12:00가 좀 지나서였는데, 이 때 이들의 증원을 고대하던 민기식대령은 다시 출동명령을 하달한 바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출동명령 『① 적은 27일 안의를 점령하고, 그 주력은 계속 함양을 지향하고 있음, ② 오부대 및 미군 1개 중대는 교전 중, 적에게 포위되어 목하 연결이 두절된 상태임. ③ 부대는 전 병력으로써 안의를 목표로 진격하여, 오부대 및 미군을 구출하려 함. ④ 해병대는 1개 중대를 함양에 배치하여 민부대의 예비로 하고, 그 나머지 병력으로 북상하여 안의를 수복한 다음 오부대 및 미군중대와 연계하라. ⑤ 부대지휘소는 계속 함양에 위치한다.』 이리하여, 해병대는 제 7중대(중대장 중위 안창관)을 함양에 남겨두고, 나머지 주력(제 1, 제 2중대)으로써 즉시 출동하였는데, 얼마 뒤에 이들은 함양 북쪽 4km에서 안의방면으로부터 남진하는 대대규모의 적과 접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부대장은 즉시, 각 지역에서 이미 접적 중인 육군혼성부대장과 작전을 협의하여, 부대본부를 안의-함양 간의 도로 좌측인 속칭 새미마을에 설치하고, 제 1중대(중화기중대)를 60mm 박격포 3문과 함께 부근에 포진케 한 다음, 제 2중대(중대장 중위 김광식)를 경기소대 배속으로 그 북쪽 500~600m 전방의 동서를 연하는 능선일대에, 그리고 수색소대를 그 좌측고지에 각각 전개하였다. 그러나 적은 이미 좌 제 1선 북쪽의 속칭 주곡까지 침탈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부대가 진출하자 곧 박격포와 기관총사격을 집중하기 시작하더니 2개 중대로 추산되는 무리가 좌 제1선 능선 상의 고지를 점령할 기도인 듯, 공격을 자행하였다. 이때가 대체로 15:10인데, 제 2중대장은 이에 그들이 개활지로부터 진습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전 화력을 집중함과 아울러, 중화기중대에 요청하여 진지전방일대에 사격을 가하도록 한바, 적은 의외로 강한 저항에 당황한 듯이 23구의 시체를 유기하고 황급히 퇴각하였다. 이처럼 출동 초 일격에서 적을 제압하자 적은 제 2중대 정면을 피하는 듯 하면서도 잠시 뒤인 18:50에 다시 좌 제 1선인 수색대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색대는 일보도 물러서지 않고 감투하였으며, 인접 제 2중대의 1개 분대가 급거 증원하는 반격의 세로써 오히려 진전출격을 서슴치 않았다. 또한 3문의 박격포가 적시의 위력을 떨침으로써 교적을 무난히 격퇴하였다. 민부대의 화산리 배비 한편, 이때 팔령재를 점령 중인 해병 제 3중대로부터 『수미상의 적의 일단이 팔령재에 접근하고 있다.』라는 요지의 적정이 민부대장에게 보고 되었다. 이 적정에 비추어, 민대령은 안의로부터 남하중인 적은 또다시 후속부대로써 집요한 공격을 시도할 것이고, 팔령재를 돌파한 무리가 이들과 함양을 습격할 경우, 현 병력으로서는 함양을 지탱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 해병대의 안의진출에 뒤이어, 팔령재를 방어 중인 해병 1개 중대의 함양 이동을 명령한 다음, 출동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 부대에게 수동면 화산리 부근으로의 이동을 명령하였다. 상황은 다시 격동하는 가운데, 예비대인 해병 제 7중대는 저녁 무렵에 팔령재에서 복귀한 해병 제 3중대와 함께 병명으로 철수부대를 엄호하기 위하여 305고지(함양 남쪽 2km)를 점령하였으며, 이 사이에 함양의 잔치부대는 무사히 화산리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전날의 안의전투 뒤에 부대소재마저 알 길이 없었던 오부대가 화산리 미군진지부근에서 병력을 축차로 수용하고 있음이 밝혀졌으므로 민부대장은 곧 각 부대를 수습하고 20:00에 이르러서는 김부대를 당시 미 제 29연대 1대대가 점령한 390고지(화산리 동북쪽 2km)에 연한 서쪽 능선에, 오부대를 314고지(화산리 남쪽 1.5km)에 각각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민부대는 차전차퇴로 이동하였으나, 병원의 사기, 체력의 저하는 막심할 뿐으로, 전열의 정비에 적지 않은 난조를 면치 못하였다. 부대의 철수 이 무렵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운봉으로부터 함양을 지향 중인 적은 이미 함양 서남쪽 2km까지 급박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므로, 민부대장은 별도의 응급조치가 없는 한, 현 상황으로서는 병력의 손실만을 자초할 뿐이며 사후대책에도 이로움이 없다고 보고 인접 미 제 29연대 1대대장과 부대철수에 따른 엄호를 협의하여 부대의 산청이동을 마침내 결행하였으니, 이때가 대체로 20:40이었다. 이에, 오부대는 수용병력 200명으로 산청-진주로 이동하고, 김부대는 당시 함양 북쪽으로 출동한 일부 병력을 차량으로 일단 화산리로 이동케 한 다음 축차로 산청으로의 부대를 철수하게 되었으나, 해병대의 철수는 명령전달이 여의치 않아 약간의 차질이 있었다. 즉, 김성은 부대장은 명령을 수령하자 곧 제 7중대의 1개 소대를 축출하여, 접적 중인 제 1, 제 2 양 중대와 수색소대의 철수를 엄호케 하였는데, 이에 출동한 이일용 소위가 지휘하는 동 중대의 제 1소대는 위천을 도하한 다음 새미마을 북쪽의 제 2중대진지에 이르러 부대주력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그러나 좌 제 1선 고지에 배치된 수색소대는 전령이 암야로 인하여 경로를 잘못 선택한 탓으로 철수명령을 전달받지 못하였으며, 2차로 파견한 전령마저도 수색소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김부대장은 수명의 요원을 직접 대동하고 현지에 급행하여 부관 이영호 소위를 수색소대에 보내어 부대철수를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해병대는 우선 집결을 마친 제 2중대, 제 1중대, 그리고 본부중대를 산청으로 이동케 하고, 이어서 제 2, 제 7중대가 소대별로 분리된 채 산청으로의 철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미 제 29연대 1대대의 상황 한편 화산리에 진지를 점령한 미 제 29연대 1대대장 윌슨중령은 이날 아침까지도 안의에 진출한 B중대의 전황을 알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는 연락이 두절된 B중대와의 연결을 위하여 전날부터 밤새도록 계속 전령을 차출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전령은 적 복병의 습격을 받아 되돌아오곤 하였다. 이날 역시, 여러 차례 전령을 파견하고, 종일토록 상황을 타개코자 하면서 저녁부터 시작된 민부대의 상황을 주시하였다. 결국, B중대 상황을 파악치 못하고 민부대의 수동이전과 더불어 연화산(화산리 북쪽 1km)에서 철수하여 490고지를 점령하였는데 민부대가 철수를 완료한 뒤에는 367고지(화산리 동남쪽 3km)일대에서 이튿날까지 진지를 확보하였다. 4. 함양-안의지구 전투의 결과 7월 28일, 민부대장 지휘하의 오부대, 김부대, 해병대가 함양을 철수한 뒤 화산리 부근 수동지역에서의 방어 역시 우세한 적군의 추미에 밀려 다음날에는 산청 경우 진주까지 축차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때, 구찰방면으로부터 침입한 북한군 제 6사단은 하동을 약취한 다음, 연이어 원전(진주 서쪽 22km)을 거쳐 진주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당면의 전선으로 부원한 미 제 19연대는 배속 받은 미 제 29연대 3대대의 잔존병력과 합세하여 이곳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부대는 계속 김부대를 지휘하여 그 일익을 담당, 당일 진주 북쪽 산청가도에 진지를 점령케 되었으며, 해병 김성은 부대는 30일에 미군에 배속되어 새로 BAR 8정과 SCR 통신기 3대 등의 장비를 보강하고 남강 남쪽 방어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수동지역에서 철수한 오부대는 진주 이동 뒤에 부대를 정비할 수가 없었으므로 31일에 마산으로 이동하고서야 새로운 임무에 가담될 수가 있었다. 한편, 민부대와 함께 수동지역에서 적을 저지코자 하던 미 제 29연대 1대대는 같은 날 산청에서 부대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진주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결국, 부대는 이날 산청에 접근하는 적정을 입수하고 진주로 이동하기 위하여 우선 중화기를 철수케 하고, 단성(산청 남쪽 14km)으로 남하하던 중, 상공에 출현한 연락기로부터 『귀 부대는 함안(진주 동쪽 28km)으로 이동하라』라는 요지의 통신문에 접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대대의 기동은 계속되었으나, 도중에 한국해군의 첩보대 요원으로부터 『모든 미군부대가 철수해버린 진주에 적이 침입하고 있다.』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일경한 대대장은 진주를 피해 산길을 택하여, 함안으로 이동키로 결심하고, 천신만고 끝에 이날 늦게 의령 통로에 이르고 다음날인 30일 02:00에는 마쌍리(함안 서쪽 21km)까지 진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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