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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간성-고성지구 전투

by 충실한 해병 2022. 12. 27.
● 전투시기 : 1950.10.27-11.26
● 전투지역 : 강원 고성, 간성
● 주요지휘관 : 신현준 대령, 고길훈 소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상 세 설 명
 
1. 간성-고성 지구 전투의 개요

  간성-고성 지구 전투는 아군 해병대가 간성-고성 등지의 산악지대에 은거한 적패잔병들을 소탕한 전투이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의 주력은 이후 부산을 거쳐 원산에 상륙하여, 금강산 등지에서 은거하며 양민을 학살하고 북진하는 아군을 기습 공격하며 산악로를 통해 북쪽으로 퇴각하는 적 패잔병들과 접전을 벌였다. 이는 북진하는 아군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적 패잔병들이 북으로 퇴각하여 본대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전투였다.


2. 간성-고성 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해병대 사령관 대령 신현준
제 1대대장 소령 고길훈
제 1중대장 중위 정만진
제 2중대장 중위 김광식
제 3중대장 중위 이봉출
제 4중대장 중위 고상하
제 3대대장 소령 김윤근
제 9중대장 중위 황 영
제 10중대장 중위 종덕원
제 11중대장 중위 박동열
제 12중대장 중위 박동근
제 5대대장 중령 김대식
제 51중대장 중위 안창관
제 52중대장 중위 한예택
제 53중대장 중위 권석기
제 54중대장 중위 민용식


3. 간성-고성 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가. 작전 계획

  미 제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이 서울에서 의정부를 공격하는 미 해병 제 7연대를 시찰하던 9월 28일, UN군 사령부에서 기초한 북진을 위한 작전계획 「9~50」이 미 합동참모부에 의하여 승인됨으로써 이 계획은 10월 2일 비로소 공격을 위한 명령으로 바뀌었다. 이 명령에 따라 미 제 7함대는 상륙 돌격하는 임무를 10월 5일 미 제 7합동기동부대의 항공모함과 수색정찰대에 하명하였는데, UN군 작명 9~50의 내용 일부는 미 해병 제 1사단이 인천에서 함선에 탑승하고 미 제 7사단은 인천항의 조건 대문에 육상 200마일을 차량 수송하여, 부산에서 함선에 탑승하여 미 해병대가 원산에 상륙한 다음, 행정 상륙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목포지구전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계획은 한국군 제 1군단이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원산 탈환을 위하여 마련된 미 해병사단의 작전명령 「16~50」은 결국 철회하게 되었으나, 10월 7일 인천에 집결을 완료한 미 해병 제 1사단은 미 제 10군단 작전지시 제 4호에 따라 계획대로 병력과 장비 적재를 계속하였다.
  한편 미 해병대와 같이 경인 지구 작전을 수행한 다음, 인천에 집결한 한국 해병대(제 1, 제 2대대 제외)는 이와 같은 일련의 계획에 다라, 제 3대대는 미 해병 제 7대대에, 그리고 제 5대대는 미 해병 제 5연대에 배속되어 미 해병 제 1사단의 작전지시를 받게 되었고, 13일에는 미 수송함 APA-Victory호에 탑승하여, 이로 동해를 거쳐 원산을 향하여 함대의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나. 간성-고성지구의 전투전

  10월 27일
  영흥만을 중심으로 적이 부설해 놓은 기뢰를 제거하기 위한 소해 작업이 미 해병대에 의하여 실시되고, 또한 이 작업이 완료됨을 기다려 실시된 「Yo Yo 작전」이 수행되는 동안에, 한국 해병대는 함상에서 대기하다가 비로소 이날 미 해병대의 후속파로 AKP 964호에서 제 9중대, 제 10중대, 제 12중대, 제 11중대의 순으로 하함하여 갈마반도에 연한 명사십리에 상륙할 수 있었다.

  10월 28일
  1. 제 1대대(대대장 소령 고길훈)는 지난 26일 동해안의 묵호에 상륙하여 강릉, 삼척 방면의 적정을 수색한 다음, 26일에 묵호를 출발한 대대는 본대와 합세키 위하여 이날 원산 갈마반도에 상륙한 다음, 대대 지휘소를 원산 여자 고급학교에 설치하고, 일부 병력은 해성중학교에서 숙영하며 다음 작전에 대한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원산시내의 적정 수색임무를 수행하였다.
  2. 제 3대대(대대장 소령 김윤근)는 덕원 천주교회당에서 상륙 후의 하룻밤을 지낸 다음, 대대작명 「101호」를 예하에 하달하고 각 중대의 임무를 명시하였는데, 그 요지는 『제 10중대는 같은 제 3대대의, 제 11중대는 제 1대대에 배속되어 임무를 수행하라.』는 것과 『제 12중대는 대대본부와 같이 미 해병 제 7연대장의 직접 지휘를 받으라.』는 것이었고, 또한 『피복류 일체를 12시 안으로 지급하고 아울러 소지 중인 부식대금을 각대에 분배하라.』는 군수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명령 「102호-1호」로써, 『본대의 피 배속대인 미 해병 7연대가 적 약 12000명(혼성부대)이 장진호 부근에 집결하고 있다.』는 적정을 입수하고 이를 공격하라는 작전 기도에 따라 이에 배속된 대대 역시 함흥으로 이동하고, 사단명령에 의해 장진호로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대대는 이날 경리대장을 시켜 미 해병 제 7연대로부터 백미 16가마, Ration 2일분을 수령하여 각 예하대의 분배케 하는 한편, 수송대장에게는 최후 산악전에 대비한 대대 보유 차량점검을 실시케 하여, 29일 06:00까지 제 12중대를 제외한 각 중대를 천주교 수도원 앞 도로에 집결토록 하고, 29일 07:00을 기하여 함흥으로 출발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대대 명령으로 지방일대의 적정 입수에 대한 수색전을 전개하면서 다음 날 이동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3. 제 5대대(대대장 중령 김대식)는 미 제 5연대에 배속되어 보급로를 비롯한 후방 차단임무를 수행하며, 원산에서 문평을 거쳐 문천에 다다른 대대는, 원산 상륙 후 처음으로 적과의 문전에 임하게 되었다. 즉 문천에 소재한 김일성 대학교 농과대학의 과수원 안에 마련된 큰 지하실에 북한군 약 1개 소대 병력이 숨어 있는 것을, 부근을 정밀 탐색하던 제 53중대(중대장 중위 민용식)에서 발견하여, 교전 끝에 적 1개 분대를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게 되었다.

  10월 29일
  1. 제 1대대는 이날 제 5대대와 같이 미 해병 제 5연대에 배속되어 18:00에 원산 여자 고급학교를 따라 어운리로 향하던 도중에 잔적들의 색출임무를 수행하였으나, 곳곳마다 아측 지방청년들로 조직된 치안대가 이미 활동을 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적정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의의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야간에는 자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엄중한 경계를 실시하였다
  2. 제 23대대는 이날 대대작명 「제 102호-2호」로 이미 잔류하기로 한 제 12중대를 본대에 포함시켜 덕원 천주교 수도원을 출발한 대대는 함흥에 도착하여 지휘소를 제 1중학교에 설치하였다. 여기에서 대대는 장진호 방면으로 출동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으나, 대대는 이날 18:00에 미 해병사단 작명으로 미 제 10군단의 남방 한계선 작전을 수행하기로 된, 한국 해병의 새로운 임무에 따라서 함흥을 출발, 다시 남하하여 원산으로 향하였다.
  3. 제 5대대는 문천 방면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역시 사단명령에 따라 원산으로 집결하기 위하여 제 1대대와 같이 차량 편으로 원산 갈마반도에 있는 비행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 이동은 야간이동이었기 때문에 동기피복을 지급받지 못한 대원들은 트럭 위에서 일찍 다가 온 추위를 이겨야 하는 고충을 겪어야 했으나, 그 보다도 차기작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특히 이날 미 보병 제 7연대는 이원에 상륙하고 있었고, 이들은 상륙 후 국경선가지 진격토록 되어 있었다.

  10월 30일
  지금까지 서울에 머물고 있던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대령 신현준)는 원산에 집결 중인 해병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육로와 공로로 구분되어 원산으로의 이동을 시작하였다. 해병대 사령부는 작명 「제 29호」에 따라 육로로 이도하게 된 김동하 소령이 지휘하는 사령부 후방제대는 서울에서 철원을 거쳐 원산을 향하여 출발하게 되었다. 이 대열은 이동 도중에 신고산 일대에 숨어 있는 잔적의 위협으로 야간행동이 어렵게 되었으나, 이를 무릅쓰고 이동은 강행되었다. 이동 대열 속에는 고향을 찾아가는 약간의 민간인과 종군기자들이 동승하고 있었다. 제 3대대와 제 5대대는 이날 각기 미 해병대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갈마반도 원산 비행장에 집결을 완료하고, 육로 이동으로 원산에 도착하게 된 사령부 후방 제대를 맞이하여 사령부와 합동하기를 기다렸다.

  10월 31일
  자경에 따라 공로로 원산에 이동하게 된 사령관 이하 33명(사령관실 전원, 고급부관실 5명, 정보참모실 3명, 작전참모실 3명, 군수참모실 6명, 헌병참모실 4명, 통신차모실 3명)은 11:00에 서울 사령부를 출발하여 김포비행장으로 향하고, 11:45에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11월 1일
  LST 2척에 승선한 사령부와 제 1, 제 3대대는 이날 05:00 원산 동쪽 명사십리 「황색해안」을 출발하였고, 제 5대대 일부는 또 다른 함정으로 10:00에 원산을 떠나 고성에 이르는 도로 및 마을수색의 임무를 맡아 15:00에 고저에 상륙하여 지휘소를 고저 초등학교에 설치하고, 일부 부대 역시 김동하 소령이 인솔하는 사령부 제대와 같이 육로로 원산을 떠나 안변을 경유, 차량으로 고저에 도착함으로써 대대는 곧 부근 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임무수행의 철저를 기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 해병대의 지휘권 관계는 미 제 10군단 직할이었다.

  11월 2일
  이날 12:00을 기하여 배포된 해병대 작명 제 30호에 의하여 기재된 적정에 의하면, 약 4000명으로 추산되는 패잔병이 동해안 송도진리, 고성, 진전, 고저 일대의 양민을 습격하고 식량과 의류, 기타 생활필수품을 약탈하고 있었고, 이들 적은 소총과 기관총 등의 경무장으로 금강산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활동 중이었다. 이때 한국군 제 17연대의 일부 부대가 고성에서 작전 중이었기 때문에 해병대는 이들과 임무를 교대하고 동해안 일대와 그 인접 산악지대에서 북상하는 패잔병을 섬멸하고 아울러 치안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LST 1123호와 975호에 분승하기로 하고 해상에 대기 중이던 해병 제 1, 제 3대대는 고성 남방 7km,지점인 송도진리에 상륙하기로 하였다.

  11월 3일
  1. 제 1대대는 해병대 작전명령 제 30호로 송도진리(고성 남방 7km)나방해안에 상륙하여 우선 교두보를 확보하고, 제 3대대의 상륙을 엄호하며 전방에 대한 경계 및 해안 지역에 물자 집결소를 보호할 임무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2척의 구축함과 2대의 항공기 엄호 하에LST 975함으로 송도진리 해안가지 접근한 대대는 08:00에 제 1중대(중대장 중위 정만진)에서 2개 소대를 착출하여 LCVP 2척에 분승케 하고, 상륙해안 지역을 먼저 정찰케 하였다. 이들이 해안 지역에 접근하여 정찰하였으나, 적정이 없으므로 곧 소지한 SCR 300으로 사령부에 이를 보고하여 상륙을 개시하였다. 상륙 즉시 송도진리 서쪽에 자리 잡은 203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제 3중대(중대장 중위 이봉출)는 상륙 후 송도진리 북쪽 초구 뒷산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제 2중대(중대장 중위 김광식)와 제 4중대(중대장 중위 고상하)는 송도진리 해안도로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2. 제 3대대는 제 1대대가 상륙을 완료한 다음, 곧 뒤를 이어 제 9중대(중대장 중위 황영), 제 10중대(중대장 중위 종덕원), 대대본부, 제 11중대(중대장 중위 박동열), 제 12중대(중대장 중위 박동근)의 순으로 송도진리 해안에 상륙하여 대대 작명 제 103호에 다라, 제중대는 첨병 중대가 되어 고성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주위를 정찰하며 전진하는 동안에 잔여 부대는 전술종대로 고성을 향하여 제 17연대와 조속한 연락을 갖도록 하였다.
  3. 제 5대대는 고저에 집결 후 육로를 따라 적정을 살피며 고성으로 향하고 있던 중 이날 강행군 끝에 고저에서 남쪽으로 약 26km 떨어진 장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송도진리 해안에 최종파로 상륙한 사령부는 먼저 제 1대대의 엄호아래 해안에 그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11월 4일
  이날 예하에 배포된 해병 작명 제 31호는 다음과 같이 적정을 밝히고 있었는데 5000~1000명으로 추산되는 적 패잔부대는 보원서원, 지방 공산당원 등을 대동하고 전투를 회피하면서, 수십명, 혹은 수백명씩 분산하여 상당한 속도로 북상, 퇴각하고 있으며, 소화기로 무장한 이들은 일정한 지휘계통이 없어서 오합지졸이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제 1대대는 사령부와 같이 송도진리, 제 3대대는 송도진리 북쪽 7km거리에 있는 고성 초등학교에 12:00을 기하여 도착하였고, 제 5대대는 장전을 경유하여 16:00 고성에 도착하였다. 이날 각 대대가 수색전에서 얻은 전과는 북한군 포고 1명이었고, 전군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11월 5일
  제 1대대는 전날 밤을 기하여 사령부와 같이 고성에 도착하여 사령부 작명 32호에 의하여, 즉 간성 서북쪽 7.5km에 위치한 건봉사 일대에 근거를 둔 패잔병 약 3000명이 소총과 약간의 경기관총을 소지하고 간성 부근 해상리(경성으로부터 5km 지점)와 입음리 대지에 출몰하고 있다는 민간인이 제보한 적정을 입수하고 이를, 격멸하기 위하여, 우선 수색대로 하여금 고성-간성간의 도로와 철도의 적정을 탐색한 다음, 13:00에 화물열차를 이용, 고성역을 출발하였으나, 도중에 기관차의 고장으로 부득이 제 1중대로 하여금 열차에 적재된 물자를 경비케 한 다음 대대 주력은 도보로써 간성으로 향하였다. 이렇게 하여 간성에 도착한 대대는 대대 지휘소를 「간성병원」에 설치하고, 후에 도착한 제 1중대로 하여금 다시 이를 경비케 하고, 제 2중대는 간성 동쪽 고성에, 제 3중대는 간성 남서쪽 고지에, 제 4중대는 간성 읍내에 각각 배치하고, 이 부근에서 침몰하는 패잔병을 토벌키로 하였다.

  11월 6일
  이날 지방민으로부터 입수한 종합정보에 의하면 소화기로 무장된 약 3000명으로 추산되는 적이 고성군 수동면 고미성리(간성 서북방 20km)일대에 잔재하여 지방거주민에게 온갖 만행을 거듭하고 있으며, 한때 미휘리(고성 서방 30km 외금강 서쪽)에 집결되었던 적 약 15000명은 그 일부병력이 산맥을 타고 삼방을 경유하여 안변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황 하에서 우군의 배치는, 미 해병 제 1연대가 안변에 포진하고 있었고, 미 육군 제 65연대가 고원(원산 북방 45km)에 포진하여 북상, 퇴각 중인 적의 퇴로를 차단, 저지하고 있었다.

  11월 7일
  1. 제 1대대는 「위천마을」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종식 대위가 지휘하는 제 2, 제 3, 제 4중대를 다시 출동시켰는데, 이들은 05:00을 기하여 잔적을 추격하여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 14km 지점가지 진격한 다음, 다시 고미성리에 대한 공격에 임하였으나, 적은 이미 북으로 퇴각한 뒤였기 때문에 기대하였던 전과는 거두지 못한 채 오후 늦게야 차편으로 간성에 귀대하였다.
  2. 제 3대대는 이날 제 11중대가 온정리에 계속 머물면서 전방을 수색하고 있는 가운데, 대대 주력은 보현리(고성 남방 15km)에 집결을 완료한 다음, 제 1대대의 공격을 받고 북상 퇴각 중인 적을 개잔령 일대에서 완전 섬멸코자 다시 행동을 시작하여 제 9중대를 침병중대로 하고 제 10중대, 대대본부, 그리고 제 12중대를 구분하여 전술대형을 갖춘 다음, 백천교리(고성 서남방 4km)방면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백천교리에 도착한 대대는 먼저 제 10중대에게 개잔령으로 통하는 도로를 수색케 하였다.
  13:00에 험준한 도로를 따라 적정을 살피며 유점사에 도착한 제 10중대는 적 소총부대 약 50여명과 조우하여 격전 끝에 사살 10명, 포로 3명과 소련제 소총 10정, 실탄 200여발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고, 나머지 적을 16:00에 이르러 완전히 격퇴하였다. 이리하여 이들은 고성군 수동리(남성 남방 25km)으로 통하는 도로를 향하여 병력을 분산, 잠복케 하고, 북상하여 올 적을 대기하고 있었다.
  한편 제 9중대와 제 12중대는 대대본부와 같이 백천교리에서 대기 중이었으나, 신대리(고성 남방 15km)근처에 500~700명으로 추산되는 적이 잔재하여 마을을 습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적을 잔멸하기 위하여 대대는 부대이동을 개시한 다음, 백천교리에서 보현리를 거쳐 신대리에 이르는 도로 분기점 부근마을인 「영고」에 부대를 머물게 하고, 제 9중대((중대장 중위 황영)로 하여금 신대리의 적을 공격토록 하였다. 이들이 공격을 개시한지 불과 2시간 내에 접적 없이 신대리 남쪽 고지를 점령하고, 이어 북쪽에 위치한 외명리를 점령하였다.

  11월 8일
  1. 제 1대대는 대대장의 명에 따라서 수색대원 3명을 차출하여 해상리 부근의 적정을 파악키 위하여 아침 일찍 행동을 개시토록 하였다. 이와 같이 수색임무를 띄고 대대를 출발한 이들은 해상리 부근은 물론, 건봉사와 북쪽 멀리 수동리 일대의 적정까지 입수한 다음, 다시 드리쿼터에 승차 하에 도로에 인접한 장신리(간성과 진부령 사이)에서 또한 적정을 입수하고 대한청년단에 귀순한 북한군 8명을 압송하여 귀대하였다.
  한편 간성에서 활동 중이던 대대는 미 제 10군단의 작명에 근거하여 작성된 해병대 작전명령 제 3호, 즉 『제 3, 제 5대대는 미 제 10군단장은 지휘를 받으며, 사령부와 제 1대대는 계속 고성에 주류하여 담당구역 내의 경비와 출몰하는 잔적들을 격멸토록 하라.』는 명에 의하여 제 1중대로 하여금, 간성에 ㄱ속 머물게 하여 이 지역 경비를 담당케 하고, 대대 주력은 제 2중대, 제 3중대, 본부중대, 그리고 제 4중대의 순으로 간성을 출발하여 12:00까지 고성에 도착하기 위한 강행군이 시작 되었으나, 해안도로를 이용한 부대 이동은 당초 계획보다 늦게 16:00에야 비로소 완료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고성지구의 경계임무를 담당하던 제 5대대로부터 임무를 인계받고 본격적인 고성지구 경계임무에 착수하게 되었다.
  2. 제 3대대는 해병대 작전명령 제 33호에 의하여 현재가지 영고마을에 주류하며 잔적섬멸 작전을 전개하던 것을 중지하고 송도진리에 9일 09:00가지 부대를 집결시키기 위한 행동이 개시되었는데, 대대본부와 제 12중대는 주류하던 영고마을을 출발하여 외면리(고성 남방 10km)에서 신대리를 점령한 바 있는 제 10중대의 일부부대와 그리고 제 9중대가 합류하여 대대가 보유 중인 차량에는 중화기 및 화물만 적재하고, 대대장 이하 전 병력은 제 9, 제 10중대, 그리고 대대본부와 제 12중대의 순으로 전술종대에 의한 도보행군을 감행하였다.

  11월 9일
  이날 09:30를 기하여 송도진리 해안에 집결을 완료한 제 3, 제 5대대는 08:00부터 부대정비와 승함 준비를 서둘러서 12:00까지는 차기 작전에 임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다음 18:00에 LST 2척에 대대별로 분승을 끝낸 이들 부대들은 신현준 사령관을 비롯하여 각급 참모들, 그리고 무운장구를 비는 수많은 주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일로 원산으로 향하게 되었으며, 기타 보급물자는 차량에 적재하여 고성에서 통천을 경유하는 육로를 이용하여 원산으로 떠났다. 당시 원산에는 미 해병 제 7연대가 주류하고 있었고, 제 7연대 예하 제 3대대가 포병 1개 중대의 지원을 받으며, 마전리 지역 일대의 경계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그중 1개 중대는 험준한 마식령에 파견되어 마전리를 통하는 보급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11월 10일
  고성 지구에 사령부와 함께 머물게 된 제 1대대는 제 5대대로부터 인수한 고성지구의 경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날 제 2중대를 39 고지와 32 고지에 배치하고, 제 3중대를 고성동방 36 고지에 배치하여 각각 진지를 구축토록 하였으며, 또한 제 4중대로 하여금 고성남방에 위치한 122 고지에 박격포 4문, 중기관총 2문, 그리고 93 고지에 중기관총 1문을 각각 배치토록 하여 고성지역 경비에 철저를 기하도록 하였으며, 10:00에는 온정리와 장전, 그리고 신대리(고성 남방 15km)에 1개 소대의 병력을 각각 파견하고 적정 정찰을 계속토록 하였다.
  한편 이날 송도진리를 출발하여 원산에 도착한 제 3대대는 곧 해병 제 7연대장으로부터 미 해병 제 7연대 제 3대대와 합동 작전으로 마전리(원산 서방 24km)에서 북상하는 북한군을 저지, 잔멸하라는 명령을 받아, 미 해병대의 차량에 의하여 멀리 마전리로 향하였으며 다음 목적지에 도착한 아들은 즉시 요소요소에 부대를 배치하여 적의 내습에 대비하였다.

  11월 11일
  제 1대대가 담당하게 된 금강산 일대에는 적패잔병이 아직도 상당한 수에 달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규합하여 사단본부를 설치하는가 하면 「빨치산」부대를 조직하여 때로는 도로를 장악하여 이곳을 통과하는 아군을 기습할 기세였다. 대대는 이날 해로를 통하여 고저에 도착하는 군수물자를 수령하기 위하여 강창희 병조장을 장으로 하여 대원 6명을 고저에 파견하여 아울러 조봉식 준위로 하여금 미군과의 연락 업무를 취하도록 조치하고, 그 외의 병력은 계속 계획된 경계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한편 마전리에 출동한 제 5대대가 적과의 교전에서 많은 전과를 올리고 있을 때 제 5대대는 원산에서 문평에 도착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자체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11월 12일
  이날 주민들로부터 입수된 첩보는 적의 주력이 건봉사(경성 서방 10km)에 약 2000명, 고미성리(건봉사 서북방 10km)에 약 1000명, 신탄리(고미성리 남방 5km) 등지에 약 1450명이 각각 반거하고 있었고, 금강산 서부계곡 일대에 약 3000명의 적이 산재되어 온갖 만행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대는 사령부 명령 제 35호에 의거하여 미 제 10군단 소속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일차로 건봉사와 고미성리 부근에 준동하고 있는 적을 포위, 공격하기 위하여 소총 1개 중대만을 고성에 잔치시킨 채 대대 주력으로 하여금 2일간의 식량을 휴대케 하고 05:00, 고성을 출발하여, 일부부대는 고성에서 신진까지 철로를 이용케 하고 우회 부대는 육로를 이용하여 건봉사로 향하였다. 그 뒤 작전지역에 도착한 대대는 은밀 행동으로 적의 퇴로에 병력을 배치하여 잠복케 하는 한편, 주력으로 하여금 건봉사를 양면에서 공격토록 하였다.
  하지만 적은 이미 1일 전에 이곳을 버리고 고미성리 방면으로 북상 도주하였기 때문에 예상했던 전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계속하여 고미성리와 그 남쪽 마을인 사천리까지 진격하기로 하고 각 대는 소대별로 야간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는 한편, 다음에 있을 공격 준비에 대비하였다.

  11월 13일
  대대는 전날에 배치된 각개의 경계임무를 수행토록 하는 한편, 잔적 수색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한편 고저에 군수물자의 수령을 위하여 파견되었던 강창희 병조장을 장으로 하는 대원 6명이 소기의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고저에 도착하여 귀대하였다.

  11월 14일
  제 1중대는 야간행동으로 건봉사를 경유하여 사천리로 향하던 중 05:00에 적의 퇴로로 추측되는 사천 부근 590 고지와 702 능선에 잠복하고, 제 3중대와 제 4중대는 차량을 이용한 야간 기동으로 갈마 고개에 도착하여 06:00를 기하여, 제 1중대가 사천리를 공격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고미성리를 공격하였다. 적은 대부분이 패주하고 약 5000명이 남아 있다가 그나마도 제 1중대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여 산중으로 도주한 뒤였다. 한편 이날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과 참모장 김성은 중령은 헬리콥터 편으로 제 1대대의 작전지역을 시찰하였다.

  11월 15일
  11:00를 기하여 고미성리 작전을 끝낸 제 1대대는 고성으로 귀환하여 고성일대에 대한 경비에 임하게 되었다. 한편 이날 입수된 첩보에 의하면 약 1500명의 적이 단발령(금강산 서방 18km)에 근거를 두고, 그 일대에 출몰하여 약탈과 학살 등을 자행하면서 주민들을 극도로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적정에 비추어 해병대 사령관은 차기 작전을 위한 명령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10:00에 고성에 비래한 미 제 10군단장은 각급 참모들로부터 한국 해병대의 제선사항을 들은 다음, 11:00 고성을 떠났다.

  11월 16일
  이날 사령관 신현준 대령은 해군 본부와의 업무 연락과 해병학교를 시찰하기 위하여 미 항공기 편으로 11:00에 고성을 출발하였다.
  한편 제 1대대는 사령부 작전명령 제 37호에 따라 부대대장 김종식 대위로 하여금, 제 2중대와 제 4중대의 1개 소대를 인솔케 하여, 장전과 통천간의 해안도로에 출몰하는 소규모의 적을 격멸토록 부대를 출동시켰다. 이에 따라 열차 편을 이용하여 통천에 도착한 이들은 즉시 제 4중대 소속 1개 소대병력을 통천 발전소에, 그리고 제 2중대는 철교를 준비하는 임무를 띠고 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또한 이날 마전리에서 적과 교전하고 있던 제 3대대는 양덕(평안남도)에 주지한 UN군과의 연계를 맺기 위하여 동양으로 이동을 개시하였는데, 이동 도중에 아무런 적의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무사히 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11월 17일
  이날 사령부는 통천지구에 파견되어 작전중인 제 1대대 2중대와 4중대의 1개 소대에 병력을 증가시켜 동해안 통로를 위협하는 적들을 격멸토록 하는 작전명령을 「요지명령」형식으로 17:00을 기하여 시달하였다.

  11월 18일
  제 1대대는 07:00에 통천방면에서 활동 중인 김진식 대위가 지휘하는 대대의 일부병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요지명령」을 하달하여 전날 고성에 도착한 제 5대대 23중대를 17:00에 열차편을 이용하여 통천으로 향발시켰다. 대대를 출발한 제 23중대는 장전에 이르러, 소총 1개 소대만을 육로 차량기동으로 계속하여 통천으로 향하게 하고, 중대의 주력은 남해리(장전 북방 10km)에서 숙영하며 고성과 통천으로 연하는 도로를 경비토록 하였다.

  11월 19일
  이서근 소위가 인솔하는 1개 소대 병력의 야간과 주간 행동으로 신대리에 도달하였을 때, 이 지역에서 준동하던 적의 패잔병과 조우하게 되어 피아간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으나,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던 해병대의 충천한 사기 앞에서는 적수가 될 수 없었던지, 16:00에 이르러 적들은 뿔뿔이 신대리를 버리고 산중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적 사살 7명, 다발총 3정, M1 소총 1정, 그리고 수류탄 5개와 전화기 1대 및 탄창 2개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고성 지구의 해병대가 맹활약을 하고 있는 동안 제 3대대 또한 동양 지구에서 적정 수색에 여념이 없었다.

  11월 20일
  통천에 파견된 기종식 대위가 지휘하는 제 1대대의 일부 부대는 09:00 통천발전소가 있는 중대리(통천 나서방 11km)에 일부 병력을 출동시켜 정찰을 실시케 하였고, 한편 대대본부에서는1개 소총소대를 신암리 방면에 파견에 적정을 탐색케 하였으나, 적과의 조우는 없었다.

  11월 21일
  중대리에 파견되어 발전소 부근에서 활약 중인 부대로부터 09:30에 「중대리 제 3 발전소 동남방 3km지점에 적이 출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는 보고에 따라 통천 파견 대장 김종식 대위는 곧 23중대를 중대리에 급파하여 적정을 탐색케 하였다. 11월 22일에서 24일에 이르는 기간 중 김종식 대위가 지휘하는 1개 부대는 통천에서, 대대본부와 그 밖의 부대는 고성에서 각기 잔적 출몰에 대비한 탐색전을 전개시키고 있던 제 1대대는 비교적 평온한 적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결과는 지금까지 간성 및 고성, 그리고 통천에서 작전활동을 전개한 해병대의 맹렬한 공격에 의하여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 패주하던 잔적들이 점차로 동해 지구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11월 22일
  참모장 김성은 중령은 미 고문관과 같이 본대와 멀리 떨어진 통천 지구에서 활약하는 제 1대대의 일부 작전지역을 시찰하기 위하여 09:00에 헬리콥터 편으로 통천으로 향발하였다가 17:00에 고성으로 귀대하였으며, 또한 출장 중이던 신현준 사령관 역시 16:30에 사령부로 귀임하였다.

  11월 24일
  해군 본부로부터 해병대에 지급될 군수물자가 FS 선박 편으로 15:00에 원산항에 입항하였다는 연락을 받은 해병대 사령부는 4대의 차량을 동원하고, 황영식 소위로 하여금 1개 분대병력을 인솔하여 이 보급물자를 수령토록 원산으로 향하게 하는 한편, 예하 각대에 보급하기 위한 작명 제 38호를 발하였다.
  한편 이날 참모장 김성은 중령은09:30에 요무 연락차 원산으로 향하였고, 문평에 주류학던 제 5대대(대대장 중령 김대식)는 미 해병사단의 명에 의하여 임무를 교대하고 안변으로 이동하였다.

  11월 25일
  고성에 주둔하고 있던 제 1대대는 이날 09:00에 온정리와 신풍리 방면에 각각 1개 소대의 정찰대를 출동시켜 적정을 수색케 하였는데, 배동혁 소위 지휘 하의 1개 소대는 고성과 양양간의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출하여 부근일대의 적정을 살피게 하였고, 다른 1개 소대는 온정리 방면으로 출동시켜 역시 적정 탐색에 주력토록 하는 한편 09:30에는 신탄리(고성 남방 30km, 고미성리 남방 5km)에 또 다른 1개 소대병력을 파견하여 적정을 탐색토록 하였다.
  한편 통천에서 활약 중이던 김종식 대위의 부대는 통천 중대리 소재 제 3발전소에 파견중인 2개 소총소대를 제 4발전소로 이동시키고 그 일대를 수색 및 경비토록 하였으며, 사령부의 지휘를 벗어나서 별개 작전에 참여하고 있던 제 5대대는 안변에 대대 지휘소를 설치하고 신고산 방면에 적 300여명이 출몰하였다는 정보에 따라 1개중대를 출동시켜 이들을 격멸토록 하고 있었다.

  11월 26일
  고성과 통천 및 안변과 동양리 등지에서 분산되어 각기 별개 작전을 벌이고 있을 때 사령부에서는 미 제 10군단 작전명령 7호를 수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해병대 고성과 통천에서 작전 중인 사령부와 제 1대대(제 23중대 제외)를 안변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작전명령 제 39호를 기초하고 15:00를 기하여 예하에 하달하였다.


4. 간성-고성 지구 전투의 결과


  고성과 통천 등지에서 계속 부대를 주류 시키면서 금강산 일대에 출몰하는 적 패잔병을 탐색, 격멸하는 한편, 동해안 가도와 철도 경비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사령부와 제 1대대는 이 지방에서 평온을 되찾게 되자, 미 제 10군단 작명 제 4호에 따라 안변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다음 날인 11월 27일에 제 1대대 병력은 철도편으로, 그리고 사령부 본부중대는 육로로 각각 09:00를 기하여 고성을 떠났으나, 도중에 차량 고장으로 예정대로의 부대이동은 불가하여 뒤늦게 안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미 제 10군단의 작전명령 수정으로 부대는 승차한 그대로 안변을 출발하여 23:00에 원산에 도착하게 되었다.
  한편 지금까지 전남 목포에서 주류하며 작전임무를 수행하던 제 2대대(대대장 소령 염봉생)가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본대와 합세하기 위하여 원산에 상륙하였기 때문에 원산에 도착한 해병대 병력은 더욱 보강된 형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11월 29일에는 신고산 방면에 출동하였던 제 5대대도 원산으로 복귀하여 명산 초등학교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날로 증가되어 가는 적정에 비추어 미 보병 제 2사단에서 작성한 원산 방어 계획에 따라 한국 해병대는 원산 방어에 주력하는 한편, 제 2, 제 5대대를 12월 2일 함흥으로 출동시키고, 동양리에 머무르고 있던 제 3대대로 하여금 마전리에 출동케 하였다가 다시 원산으로 복귀토록 하였다. 그 후 해병대는 중공군의 침입에 따르는 전세의 변동으로 제 1, 5대대만을 원산에 잔류시키고 함흥으로 이동하여 장진호방면으로 이동하는 미 제 10군단 예하 미군 부대들이 엄호 임무를 수행하다가 이를 완료하게 됨으로써 함흥과 흥남 등지에서 해로와 공로를 진해까지 작전상의 이동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이번 작전을 통하여 한국 해병대가 거둔 종합 전과는 적 사살 33명, 포로 5명, 귀순 16명, 다발총 3정, M1 소총 1정, 기타 소총 15정, 수류탄 5개, 전화기 1대, 실탄 200여발, 탄장 2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