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투시기 : 1950.9.18-9.21
● 전투지역 : 경기 김포 ● 주요지휘관 : 고길훈 소령, 오세동 대위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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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세 설 명 | ||||
1. 서울 탈환작전 개요
한국전쟁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이룬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은 제 10군단의 공격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에 의해 1950년 9월 15일 감행되었다. 미 해병상륙단이 저항하는 적을 무찌르고 인천 동쪽 외곽에 설정된 교두보로서의 진격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인천시내의 잔적 섬멸작전을 담당하고 있었다. 일단 인천시를 포함한 교두보를 확보한 상륙군은 곧이어 서울 탈환작전에 돌입하고 미 해병 1연대는 경인(京仁)가도의 우측지역을, 그리고 미 해병 5연대는 동 좌측지역을 각각 담당하고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게되었다. 한편 한국 해병대는 16일 저녁 2대대를 계속 인천 시내의 잔적 섬멸작전에 임하게 하고 자리를 옮겨 미 해병 5대대의 좌측에 포진한 후 17일 수차에 걸쳐 적의 역습을 물리치면서 김포반도의 잔적(殘賊)을 섬멸하였다. 미 해병 1연대가 18일 소사(素砂)를 탈환한 다음 영등포를 향하고 있을 때에 미 해병 5연대와 한국해병 1연대, 2 연대는 행주(幸州)쪽으로 한강을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고 19일에 그 준비를 서둘렀다. 19일 야간을 이용한 도하작전은 미리 알게된 적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20일에 도하를 강행하는데 성공하여 능곡에서 수색 방향으로 적을 압박하였다. 17일 뒤늦게 상륙한 미 제 7사단이 미 제 1연대의 남쪽을 차단하고 엄호하는 가운데 미 해병 1연대는 영등포로 진격을 계속하고 격전을 거듭하였다. 최초 서울 서측방을 공격하기 시작한 미 해병 5연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울을 사수하려는 북한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연희고지(延禧高地) 일대의 능선상에서 격전이 전개되어 그 전진 속도는 둔화되었다. 그러나 아군의 선전으로 적의 보루는 무너지고 24일에 이르러 연희고지 일대의 능선을 점령하였다. 또한 많은 고전 끝에 영등포을 점령하고 미 보병 제 7사단의 일부가 수원으로 남진하고 있을 24일에 미 해병 1연대는 마포쪽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미 해병 5연대 우측에 배치되었는데 이때에 또한 미 해병 7연대도 21일 사령부와 함께 인천에 상륙한 다음 미 해병 5연대 좌측방에 배치되었다. 제 10군단장 알몬드(Almond) 소장은 서울 서측방에서 미 해병대가 고전하자 25일 미 보병 제 7사단 예하 32연대와 한국 육군 제 17연대를 서빙고 쪽으로 도하시켜 서울을 북서쪽과 남동쪽에서 포위하는 태세를 갖춘 다음 일거에 시내 돌입작전을 전개하였다. 서울 공략의 주공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울 서측방에서 25일까지는 완전히 능선 일대를 확보하였고 일부 부대는 벌써 서울시에 돌입하였다. 북쪽은 미 해병 7연대와 한국 해병 5대대이고, 중앙은 미 해병 5연대와 한국 해병 1대대인데 이때에 남쪽은 미 해병 1연대와 한국 해병 2대대가 배치되어 마치 반원모양의 궁형(弓形) 태세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25일 밤 미 보병 제 32연대와 한국 육군 제 17연대가 남산을 점령하였을 때 공격을 개시한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대문 방면과 마포 일대에서 공세를 취하였으나 적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진은 불가하였고 26일 아침까지도 변동은 없었다. 다만 원효로와 삼각지 일대를 담당한 한국 해병 2대대가 국부적인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그 일대를 확보하였을 뿐이다. 26일 전투는 철수를 위해 시간을 얻기 위한 적의 지연전술을 분쇄하는 전투였다. 적은 수많은 바리케이드와 지뢰를 매설하고 아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아군의 선전으로 저녁에는 서울의 3분의 1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 해병대는 27일 아침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또한 서울시 일원의 잔적을 완전히 섬멸, 29일에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에서 한국군 제 17연대는 한국 해병과 임무를 교대하여 서울시 경비에 임하고 미 해병대가 경의가도(京義街道)와 경원(京元)가도를 따라 진격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경춘(京春)가도를 따라 진격하였다. 이것은 서울 탈환 후 내륙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진격이었는데 10월 3일 미 해병대가 의정부에, 한국 해병대가 북한강에 진출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경춘가도를 따라 진격한 한국 해병대는 금곡을 점령하고 북한강에 이르렀다. 한편 제 10군단의 일부 부대인 미 제 7사단 31연대는 북상하는 제 8군과의 연계작전을 위해 남진하여 서울이 완전 탈환되기 전 26일 수원 남쪽에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2.신리-김포지구 전투 미 해병 5연대(연대장 중령 머레이(Murray))와 같이 인천시가 전투를 끝마친 한국 해병대는 경인가도를 따라 진격하여 부평을 점령한 다음 계속 패주하는 적을 격멸하였다. 이날 해병대 사령부는 구 부평에 지휘소를 설치하였으며 이 때 미 해병대 일부는 효성리를 경유하여 한강변에 있는 정곡리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상륙부대가 서울 탈환을 목표로 경인가도를 진격함에 따라 패병이 측면으로 도주하였으므로 김포반도 쪽은 적으로부터 역습을 받을 우려가 있고 특히 김포 비행장에 대한 엄호를 위하여 김포지구 일대의 차단과 방어를 위해 작전 섬멸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9월 18일 한강 도하 작전준비로 여념이 없는 한국 해병대의 김윤근 소령이 지휘하는 3대대는 9월 18일에 미 해병 5연대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독립적으로 김포와 부평간의 모든 지역을 경비하고 잔적을 색출 복멸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제 3대대는 당일로 기동하여 17:00에는 박촌리까지 진출하였다. 같은 날 인접부대로 있던 고길훈 소령이 지휘하는 제 1대대는 연희리를 거쳐 정곡리로 진출하고 있었고, 인천에 주둔하면서 계속 인천시의 잔적 색출과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제 2대대는 뒤늦게 상륙한 미 제 2공병단에게 인천의 경비임무를 인계한 다음 07:00부터 주력은 진격을 시작하여 15:00에는 이미 부평에 진출하여 미 해병 5연대와 합동 작전을 수행하는 가운데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9월 19일 김포 반도 쪽에서는 약 2개 대대의 적 병력과 부평 지구에서 퇴각하러 온 잔적이 합류되어 그 일부의 적이 한강을 넘어간 반면 나머지 병력 약 500명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다시 반격을 시도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것은 아군이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서북방에 있는 문산가도로 진격하게 되면 그들의 퇴로가 막히고 서울은 마치 독안에 든 쥐같이 고립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김포 지구의 패병으로 하여금 신리(김포 비행장 서북방 약 8km 지점)를 거점삼아 한국 해병대의 진격을 끝까지 막아 보려고 한 것이었다. 제 3대대는 김포 지역의 잔적 섬멸을 위하여 김포 수로 제방 북서쪽의 넓은 지역을 목표로 우선 일차적으로 부평-김포읍간 지역을 탐색 격멸한 다음 제 2단계로 김포읍 이북지역에서 강화도까지 평정키로 작전 계획을 세웠다. 9월 20일 구 부평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3대대가 김포 반도의 잔적섬멸 작전을 하기에 앞서 이에 필요한 정보와 적의 동태를 탐지하기 위하여 정보 참모부 예하에 있던 첩보부대 70명을 우선 부평과 강화도에 이르는 지역에 출동시켰다. 오세동 대위가 지휘하는 첩보부대는 이날 새벽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김포읍을 중심으로 깊숙이 잠입하게 되었고 본부를 김포읍 안에 있던 우체국 건너편에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첩보부대는 잔적을 섬멸하면서 적정을 살피던 중 갑자기 약 150명으로 추산되는 적으로부터 기습을 받게 되었는데 이 기습으로 말미암아 아군은 첩보 부대장을 비롯하여 4명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고 부대 일부는 박촌리의 제 3대대 본부로 급보를 전하게 되었다. 제 3대대는 남아있는 첩보부대를 구축하고 잔적 섬멸을 계속하기 위하여 박촌리를 출발하고 해질 무렵에는 김포읍 남방에 위치한 157고지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때마침 주민이 제공한 정보로 적은 신리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김포 비행장을 탈취하려 한강을 도하한 약 1개 대대의 병력이 재편성되어 역습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제 3대대는 적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적이 집결하고 있는 신리 일대의 81mm와 60mm 박격포의 일제 사격을 가하여 2개 중대로 포위를 하는 동시에 제 9중대로써 적진에 돌격케 하여 백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적은 때마침 아침식사를 준비하려던 참이었는데 불의에 박격포 세례와 해병들의 과감한 육박전에 몰리는 바 되어 문자 그대로 혼비백산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싸움에서 적 120명을 사로잡았으며 저항하는 많은 적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의 적은 죽음을 무릅쓰고 김포와 한강 쪽으로 제각기 흩어져 도망쳤는데 이들마저 우리 측 공군기의 출격으로 그 대부분이 섬멸되고야 말았다. 한편 소총중대에서 신리 일대에 집결한 적을 섬멸하다 대대본부는 김포 가까이로 전진하고 정중철 중위가 인솔하는 제 12중대(화기중대)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김포시가의 잔적 격멸작전을 전개 하였다. 적은 시가지를 중심으로 하여 들판의 무성한 벼 포기 사이와 촌락 안에 은신하면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채 살아남기 위한 최후 저항으로 쥐구멍만을 찾고 있었다. 이와 같이 김포 시가전이 전개되자 처음에 적은 사격전으로서만 저항하였으나 그 사격이 산발적으로 점차 그 기세가 누그러지게 됨에 따라 즉시 시가 안으로 돌입한 해병들은 적을 무더기로 생포하거나 발악하는 적을 사살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리에서 잡은 포로를 제외하더라도 제 3대대는 이곳에서 180명에 가까운 적병을 포로로 하였다. 제 12중대는 김포 시가전 중 어느 지하실에서 작전 지휘를 하고 있던 적 지휘관(대좌)을 사로잡았는데 중대장 정중철 중위가 이 포로를 심문 중 경계를 소홀히 한 탓으로 탁상위에 무심코 놓았던 카빙총을 이 포로가 뺏는바 되어 정 중위는 이 포로에 의해 억울하게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야말로 포로 취급상 방심에서 오는 큰 과오가 아닐 수 없었다. 9월 21일 이날까지에도 김포반도 제 1단계 섬멸전을 일단 끝마치게 되었으며 이곳에 있는 적의 주력부대도 거의 섬멸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제 3대대는 곧 제 2단계 작전에 착수하고 김포읍 이북과 한강 연안지역 및 강화도까지 평정과 전적을 섬멸하게 되었다. 김윤근 대대장은 대대본부를 문주산 남방에 있는 통진 초등학교에 옮기고 문주산과 성동리 부근, 그리고 한강 하류 일대에 뻗혀 수색전을 전개한 결과 숨어 있던 패병을 사로잡거나 또는 사살하여 서울 탈환전에 있어서의 그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되는 김포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고 치안의 확립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이때 강화도에서는 소수의 적이 남아있어 지방 적색분자들과 같이 호응하면서 무고한 양민들을 몹시 괴롭히고 있었던 까닭으로 대대장은 양민들의 안녕을 위해 어려운 중에서도 육동욱 소위 지휘 하에 11중대 1소대를 강화읍에 파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육소위는 소대를 이끌고 민간 범선을 이용하여 강화도에 도착하였으며 이들은 인근 고지에 박격포사격을 가함으로써 국군의 진주한 사실을 도민에게 널리 알리는 한편 아직도 숨어 있는 적에게 위협을 가하였던 것이다 이 소대는 진주를 반겨 환호하는 도민들에게 선무 공작을 아울러 실시하고 이미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치안대 업무를 지도한 다음 당일로 원대로 복귀하였다. 이 다음부터 강화도는 첩보부대 요원이 간간이 출입하면서 적색분자들의 활동을 적발 분쇄하였을 뿐 별다른 치안상의 괴로운 일은 없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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