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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전주-임실-남원지구 전투

by 충실한 해병 2023. 1. 2.
● 전투시기 : 1950.7.20-7.24
● 전투지역 : 전북 임실, 남원
● 주요지휘관 : 신태영 소장, 유해준 중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상 세 설 명
 
1. 전주-임실-남원지구 전투의 개요

  호남으로 진출한 적 제 4사단(사단장 소장 이권무)은 월등한 화력과 병력으로 경찰과 새로 편성된 부대로 구성된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소장 신태영)가 지키고 있는 전라북도 전주-임실-남원지구로 침입해 들어왔다.
  열악한 장비와 병력으로 전차를 앞세운 적의 막강한 화력을 막아내던 아군은 끝내 전주-임실-남원지구를 적의 손에 빼앗기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2. 전주-임실-남원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서해안지구 전투
사령관 소장 신태영(겸 전북편성 관구 사령관)
신편 제 7사단장 대령 민기식
제 3연대장 중령 박현수
신편 제 9연대장 중령 유해준
신편 제 30연대장 김용주
육본특공대장 소령 배동인
기갑연대 기병중대장 중위 박익균
고길훈부대(해병)장 소령 고길훈(7. 22에 김성은 부대로 개칭)
김성은부대장 중령 김성은
민부대장 대령 민기식(7. 20에 개칭)
독립대대장 소령 김병화(7. 20에 김부대로 개칭)
오부대장 대령 오덕준
전북경찰전투사 사령관 경무관 윤기병
전북지구편성관구 사령관 소장 이응준
신편 제 5사단장 대령 이형석
신편 제 15연대장 중령 김병휘
이부대장 중령 이영규
신편 제 26연대장 중령 이백우
전남경찰전투사 사령관 경무관 이응권

*적군
제 4사단장 소장 이권무
제 16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 6사단장 소좌 방호산
제 13연대장 대좌 김후진
제 14연대장 대좌 한일래
제 15연대장 대좌 김현기
포병연대장 중좌 박해민


3. 전주-임실-남원지구의 진행과정

  7월 20일
  이날 새벽에 승세를 몰아 방향을 전주 및 광주에 이르는 양개 도로를 따라 지향함으로써 이리에서 전주로 축차로 물러나게 된 군경부대는 이를 저지할 상황이 되지 못하여 임의로 지연전을 펴면서 남원을 목표로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전날 밤부터 전주를 공격하기 시작한 적은 심야에 이르러 그 병력이 더욱 증강된 듯 아군진지에 포화를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적 포탄이 작열하는 가운데 전주를 방어하던 군경부대는 이날 02:00를 기하여 예정대로 축차로 진지에서 이탈하여 철수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 때에 부산-참례-잔주 도를 따라 물러나면서 지연전에 참가한 바 있는 경찰 1개 중대는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면서 지정된 밖슬재를 점령하고 전북 경찰 혼성 병력 2개 중대 규모는 03:00에 용운재(임실 북족 2.5km)를 점령하고 병력을 전개하여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서해안 지구 전투 사령부가 남원으로 이동하였으며 또 신편 제 7사단 독립 대대와 기병 중대가 사령부를 따라 물러났으나 이 철수에서 민기식 대령은 신편 제 7사단 사령부 요원들과 같이 전주에 있는 각 은행보유화폐의 반출을 주선하고 아울러 그간 낙오병과 국군입대를 자원한 장정을 모아 훈련한 바 있는 200명을 인솔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적은 이날 04:00부터 전주 시내에 돌입하여 이를 강점하였는데 이때에 전황을 알지 못한 채로 시내에 잔류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적에 의하여 구금상태에 빠지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적은 여기를 점거하자 추산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임실로 통하는 국도 상에 투입한 듯 12:00에 임실 북쪽에 선발대로 보이는 한 무리가 섬진강 상류를 도하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런데, 적은 섬진강 상류 남안에서 곧 철수하고 더 이상의 남침을 중지한 듯 하였으나 그 까닭은 분명치 아니하다.

  7월 21일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날은 특히 기상이 악화되어 우군 항공기가 출격치 못하였다.
  당면의 적은 이날 09:00부터 탐색전을 벌이는가 하더니 야음과 더불어 공격을 재개한 듯 섬진강 상류를 도하하여 경찰만이 배치된 진지를 압박하므로 이를 감당할 처지가 못 된 경찰 혼성부대는 접적만을 유지하였을 뿐 또다시 수의로 물러나게 되었다.
  1500명의 신병으로 부대를 새로 편성하여 훈련에 정진하고??????????????헇벼퇇딠?? 있던 동연대(연대장 중령 김용주)는 이날 적침이 임박하자 민기식 대령으로부터 『후방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목표없는 후퇴명령을 받았다. 당시에 연대는 제 3, 9, 15, 26의 4개 연대가 동월 17일에 육군본부에서 제 1~제4교육대로 개칭되는 조치에서 벗어났으므로 그대로의 명칭에 있었는데, 그 편성은 3개 대대로 구성되어 제 1대대장에는 강인로 소령(겸 부연대장)이, 제 2대대장에는 김광정 소령이, 그리고 제 3대대장에는 박관영 대위가 각기 임명되어 있었다. 연대는 이 철수명령을 수령하자 곧 부대 이동준비를 완료하고 보급품을 자동차로, 각대는 도보로 이동키로 하고 이날 오전 중에 남원을 떠나 구례 경유 진주로 향발하였으니 이들이 구포에 도착한 것은 동원 28일이었다.

  7월 22일
  이날도 당면의 적은 정읍을 지향하는 듯 하였으나 피아간에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탐색전만이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해병 1개 대대가 별명으로 여수에 상륙하여 민부대를 부원케 되었다.
  20일에 전주를 수중에 넣은 다음 계속 광파를 남원 쪽으로 몰아붙인 당면의 적은 이날도 역시 임실 북쪽에서 아군의 동정에 관하여 주시하는 듯 큰 규모의 침공은 없었는데, 정읍으로 지향한 적의 공파는 14:00에 태인(정읍 동북쪽 11km)을 유린한 다음 정읍을 노렸으며, 동시에 신태인(정읍 북쪽 11km, 태인 서북쪽 5.5km)에는 군산 및 이리로부터 남하한 것으로 보이는 기갑부대를 포함한 북한군 제 6사단 주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16:00에는 김제에서 남침한 것으로 보이는 1개 중대규모가 고부(정읍 서쪽 8.5km)에 돌입하므로 이곳을 방어하던 경찰대와 격전을 전개한 끝에 17:00에는 드디어 이곳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날 덕유산 일대에서 출몰하던 공비 2개 중대 규모가 진안(전주 동쪽 24km)을 습격하였으나 여기를 지키던 경찰대는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채 일전도 시도하지 못하고 장수(임실 동북쪽 21km)로 철수하는바 되었다.
  이상과 같은 적정으로 미루어 보건데 호남 지역을 공략한 적은 우선 주력으로써 광주를 침탈하고 이어서 남해안을 우회하여 순천 서쪽 일대에 진출할 때까지 다른 무리를 임실 북쪽에 배치하였다가 남원-순천 간의 아군 측방을 동시에 공격하려고 기도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아군 지휘부는 이와 같은 적정 분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도를 분쇄할 근본적인 대책이 없었던 까닭에 전황은 적이 주도하는 바에 따라가는 악순환만을 거듭하였다. 이날 08:00에 서해안 지구 사령관 신태영 소장은 보원 부대의 내착에도 불구하고 당면의 적정으로 미루어 현 병력으로서는 적침을 저지할 방도가 없다고 판단한 결과 현 전선에서 가능한 한 지연토록 하다가 사불여의하면 덕유산-지리산-백운산을 연하는 선으로 물러나 험준한 지세를 이용코 유격전으로 이행키로 결심하였다.
  이때의 신태영 소장의 관할 하에 있는 서부전선은 대체로 무주(임실 동북쪽 35km)-진안-임실-정읍-고폐를 연결하는 형세를 보였으나, 적이 실제로 배병된 곳이란 임실 정면과 정읍 두곳만으로서 그 나머지는 거의 개방된 실정이였으며 그나마 정읍 정면의 상황은 정확히 알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전북 지구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무주-진안-장수(진안 서쪽 20km)부근은 행정 경찰만이 지역 방어에 임하는 까닭에 그 취약성이 비할 데 없었다.
  당면의 전황으로 보아 이 전선의 지구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국군의 주력과 미군이 배치된 동부와 중부전선의 서측방에 해당하는 이곳이 노출된 경우, 전세가 급전될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이의 엄호는 아군작전상의 긴박한 요청이기도 하였다.
  이에 그는 임실 동쪽에서 지역 방어에 임하는 경찰과 이를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군을 우지구대로, 민부대를 좌지구대로 분류하면서 요지 다음과 같은 서해안 지구 전투사령부 작명 제 1호를 하달하였다.
●작전명령 제 1호
『① 서해안 지구 전투부대는 군주력방면의 공세를 조성하기 위하여 그 서측익을 엄호하려 한다.
② 우지구대(경찰 부대 및 미군 일부)는 진안 북쪽 및 그 서쪽 고지 일대를 점령하여 당면의 적을 저지한 다음 축차로 지연??????????????헇벼퇇딠??전으로 이행하면서 장수 쪽으로 견제 억류하라.
③ 좌지구대(민부대, 이영규 부대)는 민부대 지휘 하에 임무 북쪽 고지선을 점령하여 서쪽으로부터의 적을 침투를 견제 하면서 당면의 적을 저지하라. 부득이할 경우 지연전을 펴 남원-운봉에서 축차 진지를 점령한 연후에 함양 서쪽을 고수하라.
④ 해병대대는 함양에서 별명을 대기하라.
⑤ 여는 함양에 위치할 것이다.』

  이때에 여수에 상륙한 해병대(고길훈 부대)는 이 명령을 받지 못한채로 다만 해군본부 작명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남원역에서 승차한 채로 밤을 새운 이영규 부대는 민기식 대령으로부터 당면의 적정을 설명 받아 이날 08:30에 또다시 임실 북쪽으로의 열차운행으로 북상케 되었으나 이때의 상황은 임실까지 운행이 가능하였으므로 그 이상은 북진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부대는 임실에서 전원 하차하여 용운재 일대를 점령하였는데, 이때 여기에 진지를 점령하고 있어야할 경찰 혼성 부대의 소재를 알지 못하여 합세할 수가 없었다.
  이 후에 부대는 적의 대 규모 침공이 없었으므로 계속 진지를 점령하면서 종일 적 수색에 나섰으며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피아가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7월 23일
  이날 당면의 적은 주력으로 하여금 정읍으로 곧장 가게 하려는 가운데, 임실 정면에서는 견제에만 치중한 듯 하므로 전주-임실 국도 부근의 전황은 커다란 변동이 없었다. 민기식 대령은 이날 여수로부터 보원한 해병대와 또 부산에서 서북진한 오덕준 부대를 의명 통합 지휘하게 되자 적을 반격코자 명령을 하달하였으므로 아군 상황은 대체로 이들의 부대기동이 주가 되었다.
  전날 여수에 상륙하여 출동 준비를 마친 김성은 부대는 이날 03:00에 열차 편으로 출발한 다음 10:20에 남원에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리 전투에서 실종된 김한수 소위와 4명이 적에게 사로잡혀 후송되는 도중에 적지를 탈출하여 남원으로 복귀하였으므로 이를 수용하고 적중돌파의 노고를 위안하였다.
  이리하여 민기식 대령으로부터 명령을 대기하였던 바 16:00에 전기 반격 명령을 수령하게 되자 부대는 다시 열차 편으로 17:00에 떠나 1시간 뒤에는 오수리(남원 북쪽 13km)에 이른 다음 적정이 없으므로 임실을 목표로 북진하였는데, 부대가 임실에 당도한 것은 다음날 01:20이었다.
  육군본부는 호남 지역에서의 전황이 악화되기에 이르자 동월 20일 당시에 경남편성 관구 사령관 이종찬 대령에게 『보병 1개 대대를 남원에 급파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하달한 바 있음은 전술한바 같거니와 이러한 조치로 급편 된 부대가 오덕준 부대였는데, 이 부대가 해병대에 이어 이날 15:00에 남원에 진출하여 서해안 지구 전투사령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본시 이 부대는 동월 7일에 제 5, 7사단이 광주와 전주에서 신편될 대를 같이하여 부산에서 신편케된 제 9사단(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모체로 탄생된 부대로써 당시에 그 예하에 있는 제 23연대(연대장 임유성 중령)가 부산에서, 제 27연대(연대장 김익열 대령)가 마산에서 신병을 모집하여 각기 편성중에 있었다. 이때 육군 본부로부터 구두명령을 받아 동 사단의 참모장으로 부임한 오덕준 대령은 곧 전기작명을 수령하였으므로 동월 17일에 육군본부 조치에 의거 제 8교육대로 호칭케 된 제 23연대의 정찰병력, 퇴원자 그리고 학도병중에서 650명을 선발한 다음 홍정룡 중령을 대대장으로 하여 4개 중대를 편성하고 홍석표, 김정서 양 대위 등을 중대장에 보하였으며, 손관도, 예철수, 이준학 세 소령 등을 각기 참모로 부서한 바 있었다.
  이리하여 부대는 부산 창고에 보관중인 M1소총으로 무장하고 징발차량 20대에 분승하여 동월 21일에 마산으로 향발하였다. 부대는 이곳에서 제 9교육대로 명명된 제 27연대 병력중의 일부를 뽑아 보충하고 다음 날인 22일에 열차편으로 진주에 진출하여 하루를 보낸 다음 이날 진출한 것이다.
  그러나 부대원의 자질은 충분한바 못되어 진주 재편시에는 병력이 1000명에 달하였으나 이동중에 많은 이탈자를 보게 된 듯 남원 진출시에는 그 병력이 700명 선을 상회하였다.
  민기식 대령은 오덕준 부대의 ??????????????헇벼퇇딠??지원을 얻자 이날 지체 없이 회심의 반격전을 결행키로 결심한 것이지만 장병들의 피로도를 고려하여 우선 예비로 남원에 배치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남원에서의 정황은 한때 활기에 차있었으나 전남 지구에서의 상황이 각각으로 악화되어 이날 17:00에 광주가 적수에 떨어지고 계속 그들의 추봉이 화순(광주 동남쪽 10km)과 나주(광주 서남쪽 20km)를 지향하였으며, 또한 그의 일대는 장성(광주 북쪽 16km)에서 분진하여 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담양(장성 동쪽 17km)에 침입한 다음 남원을 직충코자 정찰을 하고 있었으니, 이들이 임실정면에서의 적과 서로 호응한다면 남원 또한 지탱키 어려운 상황으로 일변하게 될 것이다.

  7월 24일
  이날을 전후하여 당면의 적은 공세로 이전하여 양면에서 남원을 압박하므로 민부대는 결국 계획한 반격을 한번 펴보지도 못한 채 저지전으로 전환하다가 마침내 예봉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부대는 이날도 전날에 이어서 섬진강 남쪽 고지 일대를 점령하고 당면의 적과 대치 중이었는데, 적은 불소에 이르러 종전가지의 침묵을 깨고 돌연 화력을 발휘하면서 도처에서 강을 건너 공격 태새를 취하므로 이 사실을 민부대장에게 보고한 다음 우세한 적에게 압도된채로 접적을 유지하면서 간조에 오수리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부대는 여기에서 분산된 병력을 수습코자 하였으나 곧 이어 속행되는 적의 추격으로 말미암아 급거 남행 열차편으로 남원 경유 구례로 물러나는바 되었는데, 이때가 대체로 09:00였다.
  이때에 민부대와의 통신의 두절로 남원의 상황은 알 길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 뒤의 부대행동은 수의에 맡겨지는바 되어 자연 민부대장의 지휘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성은 부대는 임실로 진출하는 즉시로 진지를 점령키로 하였는데 이날 02:00에 남원에 위치한 민부대장으로부터 공격 중지 명령과 동시에 즉시 남원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부대는 적과 일전도 시도하지 못하고 다시 열차편으로 04:00에 남원에 환도하였는데, 이때에 오덕준 부대는 정창으로부터 남원으로 침공하는 적을 저지코자 출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한동안 남원역에서 대기하던 김부대장은09:00에 민부대장으로부터 구두명령을 받았는데, 그 요지에 이르기를 『귀 부대는 즉시 남원 동북쪽 고지 일대를 점령하고 철수하는 부대를 엄호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김성은 부대는 곧 목표인 동북쪽 고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목표의 진지를 점령하려는 찰나에 적의 포성이 들려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민부대 주력은 남원을 뒤로 하고 퇴각을 재촉하기 시작하였는데 일문의 포도 보유하지 못한 군대의 비탄이 과연 어떠하였으랴.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병 부대가 200고지~52고지(남원 북쪽 2km)를 점령하였을 때에는 민부대의 주력이 남원에서 이미 물러나게 되었으며 정창으로부터 침습한 그들의 선봉이 이미 남원 일각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해병 부대는 이미 엄호의 임무를 달성하였으므로 축차로 물러나 운봉(남원 동쪽 12km)을 목표로 강행군하게 되었다. 이때에 부대는 30도를 넘는 더위를 극복하고 30리의 산길을 넘었으며 운봉에 당도하게 된 것은 이날 13:40이었다.
  민부대의 상비대로서 남원에 배치된 오덕준 부대는 이날 01:00에 민기식 부대장으로부터 『임실에 진출하여 공격부대를 증원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받자 곧 대기하는 차량에 분승하여 임실을 목표로 북진케 되었다.
  그러나 부대가 오수리를 지나고 있을 무렵에 추달된 명령에 이르기를 『적이 광주로부터 하동으로 진출하니 그 방면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즉시 서원으로 환도하였는데, 이때에 손관도 소령이 적의 전화를 도청한 결과 그들이 정창으로부터 침습하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부대는 적을 선제공격하기 위하여 곧 상동리(남원 서쪽 3.5km)로 급파하여 병력을 전개한바 적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도로를 따라 유연하게 남원으로 지향한 듯이 진격하는 것이었다.
  부대는 곧 이들에게 화력을 집중하여 많은 손실을 주었으나 그들도 또한 완강성을 보였으므로 교전 1시간만에 부대는 ??????????????헇벼퇇딠??결국 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 까닭으로 사수하는바 되고 장교의 호령과 저지에도 아랑곳없는 가운데 삼삼오오로 운봉방향으로 퇴각하는바 되었다. 병력과 화력에 있어서 현격한 차가 있을진대 그 싸움의 결과가 곧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된다는 것은 어찌할 도리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4. 전주-임실-남원지구 전투의 결과

  7월 24일에 남원이, 다음날인 25일에는 구례와 순천을 그리고 26일에는 여수를 차례로 상실하게 되어 적선은 또다시 경남지역으로 물러나는바 되었거니와 이때(26일) 또한 북쪽인 장수가 소수 경찰의 액수 속에 제 4사단(사단장 이권무 소장)의 침공을 받고야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북한군은 서남부 전선에서 호남과 영남의 지경을 이루는 덕유산(1508 고지)-지리산(1918 고지)-백운산(1218고지)선으로 진출하였으며 다음으로 이 험준한 지세를 가로지르는 4개의 통로인 장계리(전주 동쪽 31km)-안의(함양 북쪽 11km)와 남원-운봉-함양 및 구례-하동, 순천-안동 등을 침로로 삼아 영남 지역으로 침공할 발판을 굳치게 되었다.
  이에 이르자 그들은 낙동강 북쪽과 서쪽 지역으로 급속히 진출키 위한 이른바 제 4차 작전(7. 21~8. 20)을 완수코자 장계리-안의 사이 침로에 새로이 그들 제 4사단을, 여타의 그 남쪽 침로에는 전주-광주 등 호남지역을 석권한 제 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을 계속 전개하고 일기에 마산-부산으로의 침공을 획책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덕유산-지리산-백운산 선은 공격자와 방어자간에 중요한 요충이 된 셈인데, 당시의 아군 배치는 장계리-안의 간에 단 일병의 배치도 없었으며, 남원-운봉-함양 간에는 남원으로부터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축차로 물러난 연대규모의 민부대(김승화 부대, 오덕준 부대, 김성은 부대 통합 지휘)가 접적만을 유지하는 실정이었다. 또한 구례-하동간은 이영규 부대가 소수의 병력으로 지연전을 감행하였으며, 순천-하동 간은 완전히 개방된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는 속수무책인 채로 동월 25일 16:00에 작명 제 70호를 하달하고 전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을 영남서부지역으로 급파하여 민기식 부대와 이응준 부대를 통합 지휘토록 한 다음 영남 지역으로 침입하는 적을 저지 격멸케 하는 임기를 편법을 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