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투시기 : 1950.9.19-9.22
● 전투지역 : 서울 영등포 ● 주요지휘관 : 배로우 대위(Robert Barrow)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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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세 설 명 | ||||
1. 서울 탈환작전 개요
한국전쟁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이룬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은 제 10군단의 공격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에 의해 1950년 9월 15일 감행되었다. 미 해병상륙단이 저항하는 적을 무찌르고 인천 동쪽 외곽에 설정된 교두보로서의 진격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인천시내의 잔적섬멸 작전을 담당하고 있었다. 일단 인천시를 포함한 교두보를 확보한 상륙군은 곧이어 서울탈환 작전에 돌입하고 미 해병 1연대는 경인(京仁)가도의 우측지역을, 그리고 미 해병 5연대는 동 좌측지역을 각각 담당하고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해병대는 16일 저녁 2대대를 계속 인천 시내의 잔적섬멸 작전에 임하게 하고 자리를 옮겨 미 해병 5대대의 좌측에 포진한 후 17일 수차에 걸쳐 적의 역습을 물리치면서 김포반도의 잔적(殘賊)을 섬멸하였다. 미 해병 제1연대가 18일 소사(素砂)를 탈환한 다음 영등포를 향하고 있을 때에 미 해병 5연대와 한국해병 1연대와 2연대는 행주(幸州)쪽으로 한강을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고 19일에 그 준비를 서둘렀다. 19일 야간을 이용한 도하작전은 미리 알게된 적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20일에 도하를 강행하는데 성공하여 능곡에서 수색 방향으로 적을 압박하였다. 17일 뒤늦게 상륙한 미 제 7사단이 미 제 1연대의 남쪽을 차단하고 엄호하는 가운데 미 해병 1연대는 영등포로 진격을 계속하고 격전을 거듭하였다. 최초 서울 서측방을 공격하기 시작한 미 해병 5연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울을 사수하려는 북한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연희고지(延禧高地) 일대의 능선상에서 격전이 전개되어 그 전진 속도는 둔화되었다. 그러나 아군의 선전으로 적의 보루는 무너지고 24일에 이르러 연희고지 일대의 능선을 점령하였다. 또한 많은 고전 끝에 영등포를 점령하고 미 보병 제 7사단의 일부가 수원으로 남진하고 있을 24일에 미 해병 1연대는 마포쪽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미 해병 5연대 우측에 배치되었는데 이때에 또한 미 해병 7연대도 21일 사령부와 함께 인천에 상륙한 다음 미 해병 5연대 좌측방에 배치되었다. 제 10군단장 알몬드(Almond) 소장은 서울 서측방에서 미 해병대가 고전하자 25일 미 보병 제7사단 예하 32연대와 한국 육군 17연대를 서빙고 쪽으로 도하시켜 서울을 북서쪽과 남동 쪽에서 포위하는 태세를 갖춘 다음 일거에 시내 돌입작전을 전개하였다. 서울 공략의 주공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울 서측방에서 25일까지는 완전히 능선 일대를 확보하였고 일부 부대는 벌써 서울시에 진입하였다. 북쪽은 미 해병 7연대와 한국 해병 5대대이고, 중앙은 미 해병 5연대와 한국 해병 1대대인데 이때에 남쪽은 미 해병 1연대와 한국 해병 2대대가 배치되어 마치 반원모양의 궁형(弓形) 태세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25일 밤 미 보병 제 32연대와 한국 육군 제 17연대가 남산을 점령하였을 때 공격을 개시한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대문 방면과 마포 일대에서 공세를 취하였으나 적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진은 불가하였고 26일 아침까지도 변동은 없었다. 다만 원효로와 삼각지 일대를 담당한 한국 해병 2대대가 국부적인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그 일대를 확보하였을 뿐이다. 26일 전투는 철수를 위해 시간을 얻기 위한 적의 지연전술을 분쇄하는 전투였다. 적은 수많은 바리케이드와 지뢰를 매설하고 아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아군의 선전으로 저녁에는 서울의 3분의 1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 해병대는 27일 아침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또한 서울시 일원의 잔적을 완전히 섬멸, 29일에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에서 한국군 제 17연대는 한국 해병과 임무를 교대하여 서울시 경비에 임하고 미 해병대가 경의가도(京義街道)와 경원(京元)가도를 따라 진격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경춘(京春)가도를 따라 진격하였다. 이것은 서울 탈환 후 내륙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진격이었는데 10월 3일 미 해병대가 의정부에, 한국 해병대가 북한강에 진출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경춘가도를 따라 진격한 한국 해병대는 금곡을 점령하고 북한강에 이르렀다. 한편 제 10군단의 일부 부대인 미 제 7사단 31연대는 북상하는 제 8군과의 연계작전을 위해 남진하여 서울이 완전 탈환되기 전 26일 수원 남쪽에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2.영등포지구 전투 해병 5연대가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갈 채비를 하고 있던 19일 오후, 해병 1연대는 그 뒤를 따라 인천에서 올라온 미 제 7사단 32연대에게 점령지역을 넘겨준 다음 영등포를 향해 진출을 서둘렀다. 그보다 앞서 해병 5연대 1대대는 이날 영등포 시가를 바라보는 곳까지 밀고 나아가 몇몇 고지들을 이미 점령해 놓은 다음, 그곳을 물려받을 해병 1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병 5연대 1대대는 그 지역을 넘겨준 다음 지체없이 행주산성을 마주보는 도하지점으로 되돌아가 연대의 주력과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해병 1연대 1대대의 선두병력이 도착하여 차량에서 내린 것은 땅거미가 지고 난 다음이었다. A 중대는 부랴부랴 118고지로 올라가 그곳을 물려받았고 뒤에 C 중대가 올라왔다. 그러나 80고지와 85고지를 물려받을 병력들은 수송이 훨씬 늦어져서 밤 9시가 되도록 소식이 전혀 없었다. 해병 5연대 1대대는 두 고지를 비워놓고 철수를 개시했다. 그들이 6~8마일 가량을 걸어서 본대로 돌아갈 예정 시간을 지키려면 더 이상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영등포 시가와 그 언저리에 투입되어 있던 북한 공산군은 그날 낮 미 해병 5연대 1대대에게 빼앗긴 세 고지들을 다시 찾기 위해 어둠이 짙어지자 역습을 개시했다. 영등포 시가의 서쪽에는 넓은 논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그 한중간쯤에 갈천 냇물이 남에서 북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여러 개의 무리들로 나뉘어 이 들판을 건너온 북한 공산군은 텅 비어있던 80고지와 85고지에 손쉽게 올라선 다음 118 고지를 공격했으나 그곳에 올라가 있던 미 해병 2개 중대에 의해 격퇴당했다. 자정을 넘어 이튿날인 20일 새벽, 미 해병 1사단 1대대는 어이없이 빼앗긴 두 개의 작은 고지를 되찾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85고지 하나만을 되찾는 데에도 적지 않은 출혈을 당해야 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북한군은 다시 1개 대대쯤의 병력을 내세워 역습을 개시해 왔다. 이와 함께 적의 T-34 전차 5대가 김포로 나아가는 도로를 따라 서쪽을 향해 굴러오더니 곧장 미군이 배치된 참호선으로 달려들었다. 일병 고니건은 3.5인지 바주카포를 메고 적 전차로 다가가 2대를 연달아 부순 다음 세 번째 전차를 겨누다가 쓰러졌다. 이 전투에 뛰어든 북한군은 섬멸되었다. 날이 밝았을 때 논두렁과 산비탈 위에는 300명을 헤아리는 적병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침 9시 45분 미 해병 1연대는 영등포의 서쪽 들판가에 반달처럼 둘러서서 시가를 바라보는 고지들을 점령했다. 반달의 북쪽 끝과 남쪽 끝 두군데가 시가지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고 가운데 쪽은 들판이 넓었다. 제 1대대는 북쪽 끝에서 지난밤의 격전을 통해 지켜낸 세개의 고지들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한강물이 바라보였다. 제 2대대는 반달의 남쪽 끝 부분에 있는 고지 일대를 맡았는데, 그 옆으로는 영등포에서 인천으로 가는 경인국도가 빠지고 있었다. 제 3대대는 연대의 예비로 두었다. 군단장 아몬드 소장으로부터 영등포 시가를 포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 연대장은 아침부터 그날 밤까지 포병 사격과 항공 폭격을 시가에 퍼부었다. 21일 아침 날이 새기가 무섭게 해병 1연대는 또 한차례의 맹렬한 준비 포격을 퍼부은 다음 반달의 양쪽 끝에서 시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북쪽 끝의 제 1대대는 85고지와 80고지를 내려와 들판과 갈천을 건넌 다음에 불바다가 된 영등포 시가의 북서쪽 모퉁이로 다가섰다. 그러나 북한군은 냇둑과 논둑에 기대어 물러서지 않았다. 미 해병대의 공격은 주춤거렸고 그러는 사이에 입은 피해가 적지 않았다. 한편 시가의 서남쪽 모퉁이를 향해 공격해 들어오던 제 2대대는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의 박격포와 야포사격이 쏟아지는 가운데, 미 해병대는 들판과 냇물을 건너오는 사이 85명을 잃은 다음 시가지 가까운 곳에 이르러 마침내 멈춰서지 않을 수 없었다. 연대의 예비로 있던 3대대가 이날 오후 2대대의 공격을 이어받아 앞으로 나섰다. 포병의 지원도 한층 더 맹렬해졌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산군은 어느 쪽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처럼 양쪽에서의 격전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 아무도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져 공격의 물꼬을 터놓았다. 그곳은 영등포의 바로 서쪽에 넓게 펼쳐진 들판이었다. 뚫고 들어가려는 쪽과 이를 막아내려는 쪽이 다 같이 남북 양쪽의 격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 제 1대대의 A 중대는 118고지를 슬그머니 내려와 한가운데의 들판을 조용히 가로지른 다음 갈천의 냇둑 뒤에 붙어섰다. 거기서 공격 대형을 갖추어 펼쳐선 A 중대는 둑을 넘어 가슴까지 올라오는 갈숲을 헤치고 냇물을 건넜다. 또 하나의 둑을 넘어서자마자 잽싸게 들판을 가로질러 시가지로 뛰어들었다. 남과 북 양쪽에서는 포성이 요란했으나, 시가지의 한복판은 뜻밖에도 조용한 편이었다. 적진 한가운데로 깊숙이 뛰어든 A 중대는 아군과의 연락과 접촉이 끊어져 이미 고립된 상태였다. 중대장 배로우(Robert Barrow) 대위는 A 중대를 되돌려 본대로 돌아가는 대신에 우연히 얻어진 좋은 기회를 살려 대세에 이바지 할 큰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전투에서는 흔히 가장 나쁜 조건이 가장 좋은 조건으로 돌변하는 수가 있다. 배로우 대위의 A 중대가 바야흐로 그러한 조건을 맞 이하고 있었다. 때마침 북한군의 증원부대가 서울 쪽에서 영등포를 향해 포장된 국도를 타고 달려 내려오던 참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A 대가 사격을 개시하자 북한군은 숱한 사상자를 내버려둔 채 혼쭐나서 흩어지고 말았다.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 중대는 어느덧 시가지를 벗어나 영등포의 동쪽 변두리에 나와 있었다. A 중대는 경인국도에서 갈라지는 도로 한줄기가 높이 30자쯤의 크고 넓은 둑 위로 뻗어 있음을 발견하고, 그 둑 위에 걸터앉아 사주방어선을 폈다. 어느 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더라도 융통성 있게 대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것이다. 이날 오후에도 영등포의 공상군은 시가지 서남쪽과 서북쪽에 정신이 팔려 그들 등 뒤에 들어와 있는 A 중대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어둠이 깔리자 적 전차 5대가 A 중대를 덮쳐왔다. 미 해병은 바주카포로 맞서서 1대를 깨뜨리고 다른 2대에도 피해를 주었다.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다른 2대는 직사포와 기관총을 연달아 쏘아대며 미 해병들이 들어앉아 있는 참호선에서 30미터밖에 안 되는 둑리 위를 다섯 번이나 왔다갔다 하다가 시내 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밤 9시가 되자 사주방어선의 북쪽 둘레에 자리잡은 3소대 앞에 다시 북한군 보병부대가 나타나더니 다섯 차례에 걸쳐 파상 공격을 해왔다. 3소대가 이를 모두 물리치고 나니 자정이 되었다. 이튿날 아침, A 중대의 방어선 둘레와 경인국도의 삼차로 언저리에는 275명의 북한군이 쓰러져 있었고 그들의 자동화기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영등포의 북한군은 그들의 등뒤에 들어와 있던 미 해병 1개 중대가 21일 밤 자정을 넘기도록 물러서지 않고 버텨내자, 자정을 넘기면서 영등포 방어를 포기하기로 하고 날이 밝기에 앞서 주력을 빼냈다. 22일 해병 1연대는 마침내 영등포를 점령했고 끊어져 있는 한강 인도교까지 수색정찰대를 내보냈다. 영등포를 방어하고 있던 적은 제 9사단 87연대와 제 18사단의 일부로 밝혀졌다. 제 87연대는 인천 상륙이 개시되던 다음날인 16일에 김천을 떠나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낮에는 터널 속에 숨고 밤에만 움직여 20여일에 영등포에 닿았다는 것이 포로의 진술이었다. 이 연대의 어느 한 대대는 이번 전투에서 80%에 이르는 인원이 죽거나 다치는 손실을 입었다는 것이다. 한편 인천항에서는 21일 미 해병 1사단의 마지막 연대인 7연대가 뭍에 오르기 시작했고, 저녁 6시부터는 미 제 10군단장인 아몬드 소장이 스트러블 제독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아 서울 탈환작전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이날까지 인천항에서 뭍에 오른 인원은 모두 49,568명, 차량이 5,356대, 군수물자가 22,222톤에 이르렀다. 22일에 미 해병 1사단은 수도 서울에 들어서기 위한 작전을 예하부대에 내려 보냈다. 해병 1연대는 영등포에서 곧장 한강을 건너 해병 5연대의 왼쪽에 붙어 전선의 맨 북쪽을 맡고, 해병 5연대는 전선의 한가운데를 맡는다는 이러한 계획은 해병사단이 다른 지상군 부대의 도움을 받지 않고 3개 해병 연대만으로 서울 서쪽 변두리의 북한군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려는 매우 의욕적인 것이었다. 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해병사단의 작전 계획에 한 가지 사항을 덧붙였다. 서울 탈환 작전에는 국군 제 17연대와 한국 해병대가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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