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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 의정부 탈환 작전

by 충실한 해병 2023. 1. 2.
● 전투시기 : 1950.9.29-10.3
● 전투지역 : 경기 의정부
● 주요지휘관 : 신현준 대령, 김대식 중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상 세 설 명
 
1. 의정부탈환작전 개요

  의정부탈환작전은 크게 서울 탈환작전의 일원이다. 이것은 서울 탈환 후 내륙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진격이었는데 한국 해병대가 경춘가도를 따라 진격하여 금곡을 점령하고 북한강에 이르는 전투를 치뤘고, 10월 3일 미 해병대가 의정부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


2. 서울 탈환작전 개요

  한국전쟁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이룬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은 제10군단의 공격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해병대에 의해 1950년 9월 15일 감행되었다. 미 해병상륙단이 저항하는 적을 무찌르고 인천 동쪽 외곽에 설정된 교두보로서의 진격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인천시내의 잔적섬멸작전을 담당하고 있었다.
  일단 인천시를 포함한 교두보를 확보한 상륙군은 곧이어 서울탈환작전에 돌입하고 미 해병 제1연대는 경인(京仁)가도의 우측지역을, 그리고 미 해병 제5연대는 동 좌측지역을 각각 담당하고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해병대는 16일 저녁 제2대대를 계속 인천 시내의 잔적섬멸작전에 임하게 하고 자리를 옮겨 미 해병 제5대대의 좌측에 포진한 후 17일 수차에 걸쳐 적의 역습을 물리치면서 김포반도의 잔적(殘賊)을 섬멸하였다.
  미 해병 제1연대가 18일 소사(素砂)를 탈환한 다음 영등포를 향하고 있을 때에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해병 제 1,2 연대 행주(幸州)쪽으로 한강을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고 19일에 그 준비를 서둘렀다. 19일 야간을 이용한 도하작전은 미리 알게된 적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20일에 도하를 강행하는데 성공하여 능곡에서 수색 방향으로 적을 압박하였다.
  17일 뒤늦게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미 제1연대의 남쪽을 차단하고 엄호하는 가운데 미 해병 제1연대는 영등포로 진격을 계속하고 격전을 거듭하였다.
  최초 서울 서측방을 공격하기 시작한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해병대는 서울을 사수하려는 북한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연희고지(延禧高地) 일대의 능선상에서 격전이 전개되어 그 전진 속도는 둔화되었다. 드러나 아군의 선전으로 적의 보루는 무너지고 24일에 이르러 연희고지 일대의 능선을 점령하였다. 또한 많은 고전 끝에 영등포을 점령하고 미 보병 제7사단의 일부가 수원으로 남진하고 있을 24일에 미 해병 제1연대는 마포쪽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미 해병 제5연대 우측에 배치되었는데 이때에 또한 미 해병 제7연대도 21일 사령부와 함께 인천에 상륙한 다음 미 해병 제5연대 좌측방에 배치되었다.
  제 10군단장 알몬드(Almond) 소장은 서울 서측방에서 미 해병대가 고전하자 25일 미 보병 제7사단 예하 32연대와 한국 육군 17연대를 서빙고 쪽으로 도하시켜 서울을 북서쪽과 남동 쪽에서 포위하는 태세를 갖춘 다음 일거에 시내 돌입작전을 전개하였다.
  서울 공략의 주공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해병대는 서울 서측방에서 25일까지는 완전히 능선 일대를 확보하였고 일부 부대는 벌써 서울시에 돌입하였다. 북쪽은 미 해병 제7연대와 한국 해병 제5대대이고, 중앙은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 해병 제1대대인데 이때에 남쪽은 미 해병 제1연대와 한국 해병 제2대대가 배치되어 마치 반원모양의 궁형(弓形) 태세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25일 밤 미 보병 제32연대와 한국 육군 제17연대가 남산을 점령하였을 때 공격을 개시한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대문 방면과 마포 일대에서 공세를 취하였으나 적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진은 불가하였고 26일 아침까지도 변동은 없었다. 다만 원효로와 삼각지 일대를 담당한 한국 해병 제2대대가 국부적인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그 일대를 확보하였을 뿐이다.
  26일 전투는 철수를 위해 시간을 얻기 위한 적의 지연전술을 분쇄하는 전투였다. 적은 수많은 바리케이드와 지뢰를 매설하고 아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아군의 선전으로 저녁에는 서울의 3분의 1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 해병대는 27일 아침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하였으며, 또한 서울시 일원의 잔적을 완전히 섬멸, 29일에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에서 한국군 제17연대는 한국 해병과 임무를 교대하여 서울시 경비에 임하고 미 해병대가 경의가도(京義街道)와 경원(京元)가도를 따라 진격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경춘(京春)가도를 따라 진격하였다. 이것은 서울 탈환 후 내륙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진격이었는데 10월 3일 미 해병대가 의정부에, 한국 해병대가 북한강에 진출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경춘가도를 따라 진격한 한국 해병대는 금곡을 점령하고 북한강에 이르렀다.
  한편 제10군단의 일부 부대인 미 제7사단 31연대는 북상하는 제8군과의 연계작전을 위해 남진하여 서울이 완전 탈환되기 전 26일 수원 남쪽에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3. 의정부 탈환작전

  9월 29일
  미 해병 제1사단은 이날 20:00에 작명 13-50을 명령받아 서울 근교에 반월형의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계획의 내용은 즉 제1연대는 서울 북동쪽으로, 제5연대(연대장 Murray 중령)는 영천을 지나 개성-서울 국도를 따라 서울 서남쪽을, 그리고 제7연대(연대장 Litzenberg 대령)는 북쪽인 의정부를 각기 공격하여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9월 30일
  의정부로 통하는 가도 좌측 고지를 확보하고 잔적을 섬멸하기 위해 공격을 계속한 제7연대의 2대대는 정릉, 우이동 일대로 진격하였고 동1대대는 창동과 도봉동 일대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10월 1일
  제5연대의 일부는 경춘국도를 따라 22km지점까지 진격하였으나 정찰전에 불과하여 퇴각하는 적의 낙오병을 사로잡는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제1연대도 역시 별로 이렇다 할 상황은 전개하지 않았다. 북쪽을 공격한 제7연대는 한국군 제23중대를 배속받아 주로 전초중대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이들은 전차와 포병, 공병 등으로 증강되고 있었다.

  10월 2일
  제7연대는 서울-의정부 중간지점까지 진출할 수 있었으나 그 동안은 별다른 싸움은 없었고 다만 가도 좌측을 공격하던 제3대대의 정찰대가 그 전날 북한군이 무참하게 학살한 참혹한 주민시체 30구를 발견하였을 뿐이었다. 이 시체 중에는 여자 7명과 어린이 1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포로진술에 의하면 이들은 모구 국군가족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일이었겠는가? 제3대대 외에도 우측 고지를 제1대대가 그리고 좌측 고지를 제2대대가 예비로서 진격하게 된 이 공격에서 미 해병사단은 이날 산발적인 적의 중화기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아군의 전진속도를 지연시키기 위한 것으로 믿어진 적의 사격은 도로우측을 공격한 제1대대에 의해 도로 양쪽고지에 구축된 동굴 속에 은거하고 있던 적의 지연전술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미 해병7연대는 이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항공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전차와 보병의 합동작전으로 동굴 속의 적을 복멸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날 제3대대도 숨어있는 적으로부터 소화기의 집중사격을 받아 그 전진이 잠깐동안 중 저지되었으나 여기에서 배속된 전차는 적탄이 비 오듯 하는 속에서 공병들이 도로상의 지뢰를 제거하는 동안 기동할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사격을 계속하였으며 지뢰가 제거되자 곧 전차소대의 한 전차는 전진하여 적이 숨어 있는 초가집 2채를 사격하여 그 속의 적5명을 모조리 복멸하고 말았다. 제3대대는 계속 좁은 골짜기의 동쪽에서 소로를 따라 흐르는 개울을 건너서 그 건너편에 있는 114고지를 점령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진은 여의치 않았다.

  10월 3일
  적의 저항으로 전진이 잠시 좌절되었던 3대대는 이날 아침 전차와 항공기의 지원을 얻어 다시 진격을 시작하고 적 차량 8대중 7대를 파괴하여 버렸다. 이날 아군작전을 지원한 미 해병대의 항공기중 2대가 적탄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었는데 그중 한 대는 아군지역에 불시착하였고 나머지 한 대는 격추된 후 조종사가 전사하였으니 아까운 일이었다. 또한 이날 제7연대는 능선 상에 배치된 적을 저지하기 위하여 167발의 야포를 사격하였고 70000발의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동쪽과 서쪽으로 중앙의 도로와 병행해서 형성된 소지 능선을 제1 및 제3대대가 진격하는 동안 제2대대는 도로를 따라 급진하였으며 적의 보급품 집적소로 판명된 지대를 지나면서부터 적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국도를 따라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이날 17:00에 폐허가 된 의정부에 제2대대가 먼저 돌입하고 여기를 점령함으로써 이 작전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제7연대의 의정부 점령에 있어서 길잡이 역할을 한 한국 해병대 제5대대의 23중대는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주로 좌측의 산악지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권양기 중위가 지휘하는 이 중대는 다른 해병대가 북한강으로 공격하는 동안 계속 미 제7연대와 행동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이 중대는 자하문 밖에서 삼각산 줄기를 타고 의정부로 진격하였으며 그 동안 적 200여명을 포로로 하여 후송하는 공을 세웠던 것이다.
  서울탈환작전을 종식시킨 10월 3일 12:00경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헬리콥터 편으로 미 7연대의 의정부로의 진출을 관망하고 있었고 다른 연대의 진출도 돌아보고 있었다.
  이로써 사실상 이날 저녁을 기해 미 제10군단의 작전임무는 끝을 맺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미 해병대는 서울 수복이후 다음 날인 4일까지의 전투에서 의정부 방면에서의 세 차례에 걸친 적과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불과 7명의 사상만을 내는 희생으로서 소기의 작전목적을 달성한 셈이 되었다. 이와 같이 소기의 임무를 완수한 미 해병사단은(한국 해병대 포함) 10월 4일 작명 15-50을 예하에 하달한 다음 임무를 위하여 그 병력을 곧 인천으로 집결시켰는데 각 부대기동의 자세한 일지는 다음과 같았다.
  미 해병 제1연대 - 10월 5일 18:00
  미 해병 제11연대 - 10월 6일 17:00
  미 해병 제5연대 - 10월 6일 오후
  한국 해병대 - 10월 7일 오후
  미 해병 제7연대 - 10월 7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