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투시기 : 1950.10.19-11.26
● 전투지역 : 전남 목포 ● 주요지휘관 : 김종기 소령, 김용국 대위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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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세 설 명 | ||||
1. 목포지구 전투의 개요
목포지구의 전투는 서남해안의 교통의 요지인 목포에 해군 경비부의 재설을 서두르고 아울러 목포근방의 치안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진해지구 후방 요원들로 구성된 백부대(부대장 소령 백남표)를 함정 편으로 목표에 파견하여 제 20연대와 보조를 맞추어 잔적섬멸에 전념한 전투이다. 2. 목포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제 2대대장 소령 김종기 부대대장 대위 김용국 제 5중대장 중위 심포학 제 6중대장 중위 박성철 제 7중대장 중위 정광호 제 8중대장 중위 서연남 *적군 패잔병 약 20,000명(그 중 500명이 무장하고 나머지는 철창 혹은 작창 등을 소지) 3. 목포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가. 전투전의 개황 당시 목포지구에는 약 20,000명(북한군 및 지방적색분자)이 집결되고 있었으며, 이들은 월출산, 국사봉 일대에 둔입하여 영암을 비롯한 장흥-함평-무안-영산포 및 나주 등지에 출몰하는 등, 그들의 준동은 날로 격심하여 갔으므로, 이와 같은 적정에 따라 당시 육군 제 11사단 예하 20연대가 삼랑진 지구로부터 진평-하동-구례-곡성-담양을 거쳐, 10월 15일 광주에 진격함으로써 호남지방의 잔적 섬멸전은 시작되었다. 나. 작전계획 한국 해병대가 미 해병대와 더불어 수도탈환작전을 서두르고 있을 무렵인 9월 26일, 맥아더 UN군 총사령관은 그의 권한으로서 합동계획부대와 작전부대에 대하여 38도 분계선 이북에까지 전선을 전개하는 계획을 시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작성된 작전명령「9-50」은 미 제 10군단을 계속 맥아더 사령부의 독립부대로서 원산에 상륙시켜, 서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미 제 8군과의 연계작전을 시도하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미 제 10군단의 일원으로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던 한국 해병대와 미 제 1해병사단은 수도 서울 수복작전에 이은 외곽방어선의 완성을 끝으로 10월 6일 인천으로의 이동을 개시, 다음날인 7일에는 부대집결을 완료하게 되었다. 원산에 상륙, 돌격하려는 미 해병 제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이 10월 10일 예하에 하달한 작전명령「6-50」은 상륙일을 당초 15일로 예정하였으나, 해군에서의 지원주정의 지연 도착 등 불가피한 사정으로 18일로 연기되었다가 다시 20일로 수정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거창한 계획은 10월 1일 한국 육군 제 1군단이 이미 38도 분계선을 돌파, 북진하고 있었고, 10월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하게 됨으로써 작명「9-50」은 완전히 수정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고, 따라서 미 해병사단의 작명「16-50」또한 철회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나 미 제 10군단을 원산에 기습상륙이 아닌 행정상륙으로 귀결된 최종결정에 따라 인천에 집결하여 부대정비를 실시 중이었던 한국 해병대의 주력은 10월 13일 승선을 완료하고 원산을 향해 출항하게 되었다. 해병 2대대(대대장 소령 김종기)는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해군본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해병대 작명으로서 목포지구의 잔적섬멸과 치안을 확보하고, 아울러 해군 목포경비부 재설작업을 돕기 위하여 10월 18일 18:00 LST 단양호에 탑승, 목포를 향해 출항하고 다음날인 19일 08:00 목포항에 무사히 도착할 수가 있었다. 다. 목포지구의 전투 10월 19일 목포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부두에 도착한 해병 2대대는 8중대, 5중대, 6중대, 7중대 순으로 하선하여, 즉시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산정 국민학교에 대대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진해에서 선견되어 목포경비부 재설과 치안유지에 힘써 온 해군의 백부대로부터 목포시의 치안과 경비임무를 정식으로 인수하게 되었다. 목포지구의 상세한 적정을 재빨리 파악하고 당면한 하역작업 등 분주한 일정 속에서도 해병 2대대는 주어진 사명과 수도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한 자랑스러운 부대라는 시민들의 기대에 호응하기 위해 제 7중대(중대장 중위 정광호)를 예비대로 하고, 제 5중대(중대장 중위 심포학)와 제 6중대(중대장 중위 박성철), 그리고 제 8중대(중대장 중위 서연남)로 하여금 시 외곽일대에 배치하여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잔적과 적색분자들의 내습에 대비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10월 20일 대대는 불투명한 적정을 수색하기 위하여 5중대에서 2개 분대를 차출하여 목포시 동북방 용강리 부근을, 그리고 6중대에서 1개 소대를 차출하여 영암부근의 적정을 수색케 하였다. 이리하여 이들로부터 적의 패잔병들이 해남 부근에서 산악지대를 따라 월출산(809고지)과 목포에서 40km 떨어진 국사봉(513고지)을 연결하는 선을 따라 패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 대대장은 곧 대대 주력으로 하여금 이들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0월 21일 이날 대대장은 7중대를 제외한 대대 주력을 직접 지휘하여 06:00, 차량편으로 목포를 떠나 해남부근에 진출하였으나, 적들은 이미 산악지대로 패주하여 버린 후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대대는 18:00에 목포에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날 기동에서 곤란을 당한 것은 패주하는 적들이 모든 교량을 파괴하였기 때문에 차량기동대에 많은 제한을 주었으나 역전의 용사들로 구성된 대대는 이를 무난히 극복할 수가 있었다. 10월 22일 계속적인 UN군의 진격으로 초조하게 된 적들은 점차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최후발악을 일삼았는데, 그들은 양민을 꾀어 국군이 진주하면 죽는다고 산으로 납치하는가 하면 학살과 약탈, 방화를 자행하였다. 이들은 또한 산악지대로 잠입하게 되었기 때문에 전술에 있어서 게릴라전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여 그의 만행은 날로 심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약 100명의 패잔병과 지방 적색분자들이 영합하여 집단적으로 영암부근에 출몰하여 양민을 학살하는 한편, 식량을 약탈하고 있다는 정보를 제 2대대가 입수하게 된 것은 바로 이날 밤이었다. 10월 23일 22일 입수된 정보로 날이 밝기만을 기다린 대대장 김종기 소령은 5중대장 심포학 중위에게 명령을 하달하고 2개 소대로 하여금 영암에 출동케 하여 패잔병과 악질적인 지방 적색분자들을 섬멸케 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중대장 심포학 중위는 2개 소대를 인솔하고 05:00경 목포를 떠나 영암으로 향하였으나, 이 작전을 알아챈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국사봉(513고지)등 산악지대로 뿔뿔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예측한 심포학 중위는 은밀히 매복조를 적의 퇴각로에 이미 배치 완료하였으므로 이들 매복조는 패주하는 적을 불시에 공격하여 적 사살 8명, 포로 49명의 전과를 거두게 되었다. 10월 24일~29일 기간 중 해병 2대대는 적의 조직적인 위협으로부터 목포시를 경비하기 위하여 시 외곽경계에 임하는 한편, 각 중대에서는 수색정찰대를 편성, 부대본부를 중심으로 당일, 또는 익일까지 귀대할 수 있는 거리를 수색정찰하면서 새로운 적정 탐지에 노력하였다. 10월 30일~31일 패잔병과 악질적인 지방 적색분자들로 구성된 잔적들이 식량약탈은 물론 양민을 납치, 학살을 목적으로 삼망면 일대에 출몰하였다는 주민들의 제보에 따라 대대는 5중대의 1개 소대를 출동시켜 가증스러운 이들의 만행을 사전에 봉쇄하고, 나아가 이들을 격멸하기로 하였다. 이 소대는 그동안 쌓은 잔적 섬멸의 경험에 입각하여 사전 용의주도한 계획을 수립, 가능한 퇴각로를 차단, 출몰지역을 에워싸, 적 다수를 사살하고, 지방 적색분자 59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둘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다음날까지 부근 일대를 수색, 새로운 적정을 찾았으나, 별다른 상황을 발견하지 못해 31일, 본대로 귀대하였다. 11월 1일~5일 1일 역시 제 5중대는 대대장 명령에 따라 차량으로 중대장 이하 150명이 영암에 출동하여 이로부터 3일간 중대지휘소를 각처에 전전하여 설치하면서 유격활동으로 부근일대에서 출몰하는 패잔병들과 영합된 이 지방 적색분자들의 만행에 대비하고 아울러 이들 적을 섬멸하기에 전력하여 기간 중 중대는 민간인으로 변장한 패잔병과 악질적인 적색분자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3일에는 또한 대대의 각 중대가 1개 소대씩의 수색대를 또다시 편성하고, 목포이동 내륙지방에 출동하여 적정탐색전을 전개하였으니, 이 탐색전은 대대가 목포를 떠나 원산 지구에서 작전 중인 해병대 주력과 합세하기 위해 선편으로 떠나기 까지 계속되었다. 11월 6일 전날과 같이 대대의 각 중대 수색대가 출동, 적정탐색에 전념하던 이날, 제 7중대에서 차출되어 출동한 수색정찰대는 나주군 고막원에서 적을 발견하고 지방민들의 협조를 얻어 지금까지 저지른 엄청난 죄상에서 용서받지 못함을 자각하고 연명책으로 산악지대로 도피하였으나, 이미 퇴로를 잃고 거지꼴이 된 적색분자와 패잔병이 혼합된 적 27명을 사로잡아, 약탈과 방화 등 온갖 수법을 다해 발악하려든 이들의 만행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다. 11월 7일~8일 해병 제 2대대에 의한 목포지구의 잔적 및 지방 적색분자의 탐색전이 진척이 되고 이렇듯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적의 집단적인 만행도 그 자취를 점차 감추게 되었으나, 반면 적은 영암 남북쪽 국사봉과 월출산 등 인적이 드문 지세를 이용, 본거지를 구축하고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디. 이와 같은 상황 속에 대대는 숨을 돌려 이들 본거지를 색출하고 격멸, 분쇄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판단, 그 본거지의 위치탐지에 전 대대 역량을 총동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적은 국사봉 모처에 숙소까지 마련한 근거지를 두고 있음이 확실하게 되어 대대는 이 근거지 섬멸을 8일부터 감행키로 계획하게 되었다. 8일 대대는 부대본부와 해군 경비부대의 자체경비를 위하여 8중대에서 중기관총 1문을 배속시켜 목포에 잔류케 하는 조치를 취한 다음, 우선 제 6중대를 선발대로 영암으로 향발케 하였다. 제 6중대는 22:00 영암에 도착하고, 곧 적의 본거지로 알려진 국사봉 가까이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적의 내습에 대비하고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11월 10일~11일 아무런 상황 없이 10일을 맞이한 제 6중대는 이른 아침부터 상세한 적정파악과 부근의 주요도로 연변과 교차지점 등을 경계하면서 주력부대 도착에 대비하는 등 기초 작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11일에도 중대는 대대의 선발대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이날 특히 장병들의 지친 몸을 원기백배하게 한 것은 악몽 같은 적 치하 속에서 풀려난 지방민들이 정성껏 장병들의 취사를 돕는 등 협력가능한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다해 이 작전을 지원한 것이었다. 한편 목포지구에서 잔적 격멸작전을 벌이고 있는 제 2대대와는 달리, 인천을 떠나 동해안으로 출동한 해병대 주력은 이날 북한땅 고성, 원산, 마전리 등지에서 패주하는 적을 몰아 분전하고 있었다. 11월 12일 제 6중대가 선발대로서 영암부근에 활동하고 있을 때, 제 5중대는 정보원 6명과 위생병 2명을 대동하고, 중대의 선봉으로 주력부대가 영산강을 도하하고 무사히 영암에 도착할 수 있도록 요소요소에 경비를 세우는 등 활동을 벌여 주력부대의 차량편 영암기동을 엄호하였다. 이윽고 이날 제 7중대를 제외한 대대주력은 영암에 도착 즉시, 부대를 정비하고 국사봉을 지향, 포위형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사봉의 적 섬멸전을 시작한 대대 장병들에게는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잔적들의 천인공노할 만행들을 목도할 수 있었다. 11월 13일 전날에 이어 국사봉 포위 공격을 계속한 대대는 정밀탐색을 통해 패잔병 10여명을 사로잡고, 본거지로 짐작되는 움막을 모조리 파괴하고, 적이 버린 식량 등을 노획할 수 있었지만, 당초 20,000명가량으로 추산되었던 적의 주력을 모조리 포착, 섬멸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국사봉에 잠입한 적들은 점차 전세가 불리하여 더 이상 한 곳에 집결되어 있을 수가 없었고, 또한 해병 2대대의 공격이 더욱 격화되었기 때문에 이미 그 주력은 지리산과 화순 등지로 도피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11월 14일~25일 14일 대대주력은 목포로 귀대하고, 일부병력은 영암에 잔류시켜 잔적색출과 양민들을 보호하는 한편, 영산포와 나주 등지에도 경계 병력을 파견, 주둔시켜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지방경비에 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은 14일 이후 25일까지 대대장 명에 의해서 계속되었으며, 작전 섬멸전이 실효를 거두고 치안이 완전 회복하게 됨으로써 대대는 대망의 북진작전을 전개 중인 해병대 주력과 합세, 차기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11월 26일 작명에 따라 목포에 집결 완료한 대대는 계속 치안유지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하고, 그동안 맺은 두터운 정을 못내 아쉬워하는 목포시민과 인근주민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광휘에 찬 북진작전에 가세하기 위하여 LST 단양호로 기적 소리 요란하게 진해를 경유하여 목포를 떠나 원산으로 향하였다. 4. 목포지구 전투의 결과 목포지방을 위시한 호남지방의 패잔병과 적색분자들을 섬멸하고, 치안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제 2대대장 김종기 소령은 해군으로 원대복귀하게 되어 새로이 염봉생 소령이 대대장에 취임하였다. 목포항을 떠난 제 2대대는 긴 항해 끝에 11월 30일 뒤늦게 원산항에 상륙하게 되었다. 원산에 도착한 해병대의 예비대로서 그 지휘소를 원산 명석 국민학교에 설치하였다. 그 뒤 대대는 함흥 부근에서 제 5대대(대대장 중령 김대식)와 합세하여 작전 임무를 수행하다가 중공군의 침략으로 제 5대대와 함께 함흥 연포비행장을 떠나 비행기로 차기 작전에 대비 진해로 떠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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