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오른팔은 나라에 바치고, 남은 삶은 어린이를 위해…"
"아이들이 동물을 만지는 모습에 너무 행복합니다"
두 번의 유치장 신세 동생이 숨진 이곳동물원은 곧 제 삶
◆해병
"따쿵!" 1967년 8월 17일 저녁 6시 베트남 추라이 벌판에 총성(銃聲)이 울려 퍼졌다. 저격수의 총격을 신호로 베트콩의 박격포가 쏟아졌다. 최실경(崔實京·63) 해병 청룡부대 상병은 좋은 표적이었다. 그는 공석(空席) 중인 하사관 대신 사병들을 이끌고 정찰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헬기 안이었다. 월남전에 파병된 해병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따쿵 소리를 들으면 살아있는 것이다. 그 소리를 못 들으면 저 세상 사람이다.' 피에 물든 군복 속에 자기 오른팔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온통 박격포 파편(破片)이 박혀있었다.
작전명은 '베트남 선거 보호작전'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틈탄 베트콩의 준동(蠢動)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양민(良民)을 구분할 수 없었다. 순진해 보이는 그들의 집에서 총기가 쏟아져 나왔다. 정글에는 죽창과 부비트랩이 도사리고 있다.
최 상병은 1966년 10월 18일을 잊지 못한다. 부산항에서 탄 영국 선박 에피호(號)는 8일간의 항해 끝에 그를 전장(戰場)에 내려놓았다. 10개월간 그는 베트남 정글을 헤집고 다녔다. 부상을 당하기 며칠 전에는 최고의 용사(勇士)에게만 준다는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스물한 살 청년 최실경은 더 이상 귀신 잡는 해병이 아니었다. 살 길 막막한 상이(傷痍)군인에 불과했다. 다낭 미군병원, 퀴논 육군후송병원, 필리핀 미 클라크 공군병원에서 진해 해군 병원을 거치는 동안 그의 뇌리에 사라지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8살 어린 동생 영규였다.
최실경은 경북 상주에서 2남의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 강점기 때 만주에서 일본군에게 혹독하게 두들겨 맞았다. 그 후유증으로 말이 어눌했다. 보통보다 덜 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의 가족을 이끈 것은 억척스런 어머니였다. 부부는 스무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그랬던 가정에 암운(暗雲)이 몰려왔다. 최실경이 12살 때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뜬 것이다. 그 많던 땅이 하루아침에 사기꾼들에게 넘어갔다.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는 멍하니 당하고만 있었다. 큰아들은 무력했다. 코흘리개 둘째 아들은 하루종일 칭얼댔다.
가족은 충북 음성의 고모 집으로 갔다. 어머니 잃고 땅 잃은 가족이 고향을 등지던 날 눈보라가 몰아쳤다. 어린 실경은 결심했다. "내가 자라면 반드시 부모님이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 그렇지만 이 무력한 가족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냉혹한 현실이었다.
아버지는 동네 머슴으로 갔다. 큰아들도 머슴살이를 했다. 겨우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공부할 시간은 없었다. 풀 베고 나무 해오다 보면 하루 해가 갔다. 14살 때인 1960년 실경은 친구와 무작정 상경했다. 기차를 훔쳐 타고 용산역에 내렸다. 호주머니에는 3000환이 있었다.
"당시 국수 한 그릇이 300환, 꿀꿀이 죽 한 그릇이 500환 할 때였어요. 친구를 따라 미아리로 갔어요. 길거리에서 숱하게 잠을 잤습니다. 지금까지 안 해본 게…. 구두닦이만 안 했어요. 아이스케키 장사, 콩나물 공장, 두부 공장까지 참 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던 한 고교 야간반 토목과에 입학했다. 하루 끼니 잇느라 허덕였지만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가난한 고학생 실경에게 용기를 줬다. "너는 설계도 그림을 잘 그리니 이것만 잘해도 사는 거 걱정할 필요 없다."
고교 졸업 후 그는 해병대 175기로 자원했다. 진해에서 훈련을 끝내고 포항에 배치됐을 때 월남전 파병 모집 공고가 났다. 그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지원서를 냈다. 누군가에게 들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월남에 가면 두 가지 길뿐이다. 죽어 돌아오든가 돈 벌어오든가."
그런데 오른팔이 사라지면서 모든 게 허사가 됐다. 토목기사가 되겠다는 꿈, 동생을 고모 댁에서 찾아와 함께 살겠다는 꿈, 잃어버린 부모의 땅을 되찾겠다는 꿈…. 1968년 9월 의병 제대 날 그는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는 쓸쓸한 거리로 내몰렸다.
◆역경
전상자(戰傷者)에게 나라가 준 보상은 54만원이었다. 선금(先金)으로 27만원을 주고 나머지는 5년 뒤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월남에서 받은 급료를 한푼 안 쓰고 집으로 보낸 10만원을 보태니 수중에 37만원이 있을 뿐이었다. 외팔 인생을 기댈 동아줄이었다.
일시불로 받은 보상금 외에 그는 매월 1200원씩의 연금을 받았다. 그것도 한꺼번에 주는 게 아니라 6개월치를 모아 지급하는 식이었다. 그가 제대하던 1968년 쌀 한 가마니 값이 3800원쯤 했다. 젊은 최실경의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치밀기 시작했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젊은이들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던 시절이었습니다.
"클라크 미군 기지에서 겪은 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팔과 다리를 다친 백인 병사 1명, 흑인 병사 1명이 저와 같은 병실에 있었어요. 저보다 부상의 정도가 더 심해 보였는데 TV로 중계되는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를 보더니 흥에 겨워 고함을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저는 속으로 '나보다 병신(病身)들인데 왜 저러나' 싶어 한국군 장교에게 통역을 부탁했습니다."
―그들이 뭐라 하던가요.
"자기들은 몸을 쓸 수 없게 됐지만 나라에서 자기 가족을 보살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기쁘다는 거예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그 말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제 처지와 너무 달랐어요."
―6개월 연금을 받으면 쌀 두 가마니 값이군요.
"당시 연금을 우체국에서 탔습니다. 6개월에 한 번 상이용사들끼리 만나잖아요. 쌀 두 가마니 값을 받으면 너도 나도 흥분하는 겁니다. 울분을 달래려다 보면 막걸리 판이 벌어져요. 몇 잔 마시면 6개월치 연금이 금새 바닥을 드러내는 거죠."
해병으로 월남 갔다가 팔 잃어…
모든 꿈 접고 제대하는 날 쓸쓸한 거리로 내몰렸지만
후손들에게 도움될 거라 믿어
낚시터 하며 동물들 키우다 2000년 동물원 만들게 돼
―나라에서 취업 알선은 안 해줬습니까.
"취업 알선은 해줬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었지요. 취직이 되면 연금 지급이 중단된다는. 제가 양평동에 있던 펩시콜라 경비원으로 일한 적이 있어요. 1년도 안 돼 그만뒀습니다. 그 일 해서는 앞날이 없어 보였습니다."
―나라가 원망스러웠겠군요.
"지금의 국가보훈처가 당시 원호처(援護處)였습니다. 동지들과 농성도 해봤어요."
―상이군인들의 불만에 찬 행동을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어요. 국민들이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는 게 상이 군인 하면 '깽판 부렸다'고 기억하는 겁니다. 당시 나라에서는 저희들에게 밀가루 한 됫박 줘서 거리로 내보냈어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어요. 저희들이 왜 참은 줄 아십니까?"
―왜 참았습니까?
"그나마 우리가 흘린 피를 국가건설에 쓰겠다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의지를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우리 피가 후손들에게 그만한 대가로 쓰이겠구나…. 그래서 우리가 광화문에 있던 원호처에 훈장을 다 반납하면서 '차라리 빵을 달라'고 외치다가도 참은 겁니다."
―참기로 한 뒤 어디로 갔습니까.
"저를 포함해 16명의 해병 상이군인들이 당시 고양군 지축리로 갔어요. 당시 지축리에는 공동묘지가 많았어요. 묘지 중에 이장(移葬)한 곳을 골라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요."
―주거환경이 형편없었겠네요.
"담은 인근 미군부대에서 주워온 블록으로 막았습니다. 하늘은 당시 '루삥'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막았어요. 방 두 칸에 10평 남짓 됐을 겁니다. 나중에 고양군에서 그 땅을 불하(拂下)해줬습니다. 몇 년 뒤에는 보훈처에서 저리 융자 조건으로 취락개선사업을 했어요. 처음에 16명으로 시작된 자활촌(自活村) 멤버가 30명까지 늘었는데 아직 그곳에 2명이 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며 생계를 이었습니까.
"돼지도 기르고 오리도 길렀습니다. 서울 인근의 서대문, 고척동, 의정부, 안양교도소에서 짬밥을 수거해 먹이로 줬지요. 고양군에는 개천이 많았어요. 제방을 쌓으면 건달들이 매일 몰래 파가는 겁니다. 당시 군수가 저희들에게 막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건달들과 싸우면서 골재 채취를 대신 했지요."
―그 일을 언제까지 했습니까.
"저는 1978년 자활촌을 떠났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테마 동물원 쥬쥬(ZooZoo) 터를 빌려 골재업을 했어요. 저 안 해본 거 없습니다. 고양에 신도택시라고 있지요? 제가 만든 택시회사예요. 보험 일도 해봤습니다. 중고 자동차 매매업도 해봤어요. 몸 열 개를 쪼개는 것처럼 물불 안 가리고 일했습니다."
―1980년쯤에 처음으로 본인의 땅을 마련했지요.
"그 일을 2년쯤 할 때 땅 주인이 세 들어 사는 제게 '땅을 사라'는 거예요. 당시 제가 6000평을 평당 7000원에 계약했는데 계약금 내고 나니 잔금 갚을 도리가 없었어요. 돈이 없다고 하니 주인이 '2년 뒤에 갚아라'고 해요. 살았다 싶더군요. 고마운 분이었어요. 체신부 차관을 지내고 나중에 데이콤 사장도 한 이응효씨입니다."
◆극복
돈이 조금씩 쌓여갈 때쯤 이번에는 자연재해가 최실경을 덮쳤다. 1984년 일어난 대수해(大水害)가 그것이다. 최실경의 땅은 황톳물에 잠겼다. 모든 것이 떠내려갔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도 기구한 팔자(八字)를 탓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게 낚시터였어요. 우리 낚시의 패턴을 바꿔보고 싶었어요. 제가 가축 기를 때부터 동물을 좋아해 한 마리, 두 마리 들여온 게 꽤 됐어요. 낚시터에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온 아이들이 그걸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지금 동물원이 그때 그 인연으로 생긴 겁니다."
―어떤 동물을 모은 겁니까.
"양어장에 사슴을 키웠고요, 희귀한 새들도 많았어요. 무지개 꿩, 화계(花鷄), 소 공작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국제멸종위기동물협약에 가입하지 않을 때여서 국내에 들여오는 데 문제는 없었습니다."
―왜 동물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사람에게 너무 실망해서요. 동물은 닦아주고 잘 기르면 빛이 나잖아요. 사람은 안 그런데."
―동물원은 언제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나요.
"제가 벽제레저낚시터를 1998년까지 했습니다. 2000년 11월에 창설했지요. 처음에는 200여종에 800마리였는데 지금은 240종 2000마리로 늘었습니다. 맹수류로는 호랑이, 사자, 곰이 있어요. 손가락만 한 도마뱀부터 크기가 천차만별이죠."
―왜 '테마동물원'이라는 말을 붙였습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동물을 만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지요. 그래야 아이들이 동물에 대해 친근감을 느낄 수 있잖아요."
―동물원 때문에 2차례나 구속된 적이 있지요.
"당시 이 땅이 그린벨트였습니다. 토지형질 변경 절차가 무척 까다롭습니다. 2002년에 도시계획법 위반으로 22일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나중에 벌금 700만원 내고 나왔지요. 장기휴가 다녀온 셈이지요."
―구치소 다녀온 분들은 '휴가 다녀왔다' 아니면 '대학원(大學院) 다녀왔다'고 하더군요.
"2006년 10월에도 구속영장이 발부됐는데 영장실질심사에 기각돼 5시간 동안 유치장에 있다 나왔어요."
―그때는 또 무슨 일로 들어간 겁니까.
"동물천막과 비닐하우스 문제였습니다. '그린벨트 훼손' 하면 엄청난 범죄 같잖아요. 영장이 기각된 뒤 검찰에서 영장을 재신청했습니다. 언론사에서 모두 취재를 나왔어요. 그런데 한 방송사 기자가 취재를 끝낸 뒤 오히려 저보고 '이게 왜 구속감이냐'며 의아해했어요."
―두 번이나 곤욕을 치르고도 동물원을 할 생각이 났습니까.
"2006년에 문을 닫으려 했습니다. 아내도 '그러다 당신 죽는다' 자식들도 '아버지 그러다 돌아가신다'며 그만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겁니다."
―뭡니까, 그게.
"저희 동물원에 대한 보도를 본 김문수(金文洙) 경기도지사가 동물원으로 찾아온 겁니다. 그분이 '지방자치단체는 경기도 내에 많은 돈을 들여 해놓은 문화시설을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 최실경 원장이 지자체에 돈을 달라고 했느냐. 상(賞)을 줘야 할 일을 왜 벌(罰)을 주느냐. 법이 잘못됐으면 고쳐야 할 것 아니냐'고 한 겁니다."
―그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것이군요.
"김 지사는 제게 계속 '규모를 더 키우라'고 했어요. 저는 집어치울 생각이었기 때문에 '못하겠다'고 버텼지요.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쉽게 바뀌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고양시장이 우리 동물원 바로 옆에 화훼관광단지를 개설하기로 했습니다. 동물원 증설 허가도 내줬습니다. 증설공사가 끝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김 지사는 그 후 관심을 끊던가요?
"김 지사가 처음에 '내가 도울 테니 시민을 위해 역할을 해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어요. 그런데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줬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 분이 대권(大權)에 대한 꿈만 꾸는 분인 줄 알았는데 참으로 바닥을 아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래
국내에는 사설(私設) 동물원이 2개뿐이다. 최실경은 "사설 동물원은 제가 하는 것 하나로 봐야 한다"고 했다. 에버랜드는 사설이라기보다 재벌(財閥)이 운영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의 동물원은 생각만큼 세련되지 못하고 곳곳에 엉성한 점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부심을 가지는 듯했다. "대학에 동물 관련 학과들이 많잖아요. 그렇지만 그 인력들을 흡수할 만한 곳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사비를 들여 싱가포르, 태국을 돌아다니며 동물원을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그 꿈을 실현시킨 데는 그런 이유도 있는 겁니다."
―마치 정치인처럼 이야기하십니다.
"제가 동물원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 제 동생이 여기서…. 물 청소를 하다 전기에 감전돼 쇼크사한 겁니다. 동생이 숨진 이 곳을 제가 어떻게 떠나겠어요."
―그런 일이 다 있었습니까.
"동생은 저를 아버지처럼 따랐어요. 자식 둘을 남겨놓고 저 세상으로 갔는데…, 다행히 아이들이 잘 자랐습니다. 동생이 남겨놓은 막내가 서른이 넘었으니까요."
―어렵게 지금까지 왔으면서 좋은 일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고양시 인근 중·고교에 장학금을 냈지요. 그게 사전 선거운동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아 그만두기는 했지만요."
―정치도 했습니까?
"고양시의원을 지낸 적이 있지요. 임기를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요."
―왜 정치를 했습니까.
"제 아이들이 저를 상이군인 아버지로 기억하는 게 싫었습니다.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요. 이제는 정치 안 할 겁니다."
―시의원 할 때만 장학금 내고 지금은 아무 일도 안 합니까.
"방법을 바꿨어요. 미인가(未認可) 사회복지시설에 있는 고아들이나 노인들에게는 동물원을 무료로 개방합니다. 지금 제 사무실에 쌓여있는 견학요청서가 한 뼘을 넘을 겁니다. 동물원 내부 규정에도 그런 조건이 명시돼 있습니다. 연간 그런 조건으로 동물원을 찾는 어린이와 노인들이 2만명쯤 됩니다. 저는 아이들이 동물을 만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행복해요. 단, 저는 국가 예산 받는 단체에는 무료 견학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좋습니까.
"저는 그래요. 제 팔 하나는 국가에 헌납했고 제 삶은 어린이를 위해 바쳤다고요. 보람 있는 인생 아닌가요?"
―지금도 인간이 싫고 동물만 좋습니까.
"인간이 싫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사실 젊어서 여러 가지에 실망했으니까요. 저는 사람 사귈 때 진실합니다. 제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먼저 사과하고 그런데도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막 화를 내는 성격이에요."
―1년에 동물원을 찾는 관람객이 얼마나 됩니까.
"연간 35만명쯤 됩니다. 그 정도로는 유지비와 동물 사료비도 안 돼요. 연간 80만명은 찾아와야 될 텐데."
해병이 작전을 펴듯 빠른 질문과 대답이 끝난 후 기자는 최실경과 동물원을 돌아봤다. 촬영을 위해 데려온 여섯살 '오랑이'라는 암컷 오랑우탄이 갑자기 기자의 돋보기를 낚아채더니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옆에는 생후 6개월 됐다는 아기 호랑이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최실경은 "오랑이 말고 '우탄이'라는 열살 난 수컷 오랑우탄이 있는데 이제 그 녀석을 힘으로 당하지 못해요. 며칠 전 그 녀석에게 KO당했어요"라고 했다. 무슨 소리냐고 직원들에게 물어봤다. "동물도 나이 들면 장난을 싫어하잖아요? 우탄이가 원장님을 집어 던졌어요, 글쎄."
작열하는 한낮의 태양 속에 동물원에는 먼지가 뽀얗게 날리고 있었다. 최실경은 앵무새와 호랑이를 만지며 오랑이와 뽀뽀를 했다. 63년의 삶,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세월의 한(恨)을 오랑우탄은 알아차렸는지 거친 입맞춤을 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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