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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자료

해병대 회고 - 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21-아아! 전함 백두산 1

by 충실한 해병 2023. 3. 21.
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21-아아! 전함 백두산 1

해군은 전투함을 가져야 진정한 해군이다. 전투 수단을 갖지 못한 군대를 어찌 군대라 하겠는가.

건국 초기 해군의 가장 큰 염원이 전투함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미국에 출장가서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PC 701)을 인수해 오는 역사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1949년 10월 여의도 공항에서 뉴욕으로 날아가 임무를 수행했다. 갔다 와서 또 702·703·704함 인수단에 참여했다.당시 해군에는 36척의 함정이 있었다. 미국이 무장해제시킨 일본 해군 소해정(JMS)과 미국 해군이 사용하던 소해정(YMS)이 주력이었다.

나머지는 잡역선과 증기선, 상륙용 주정이어서 함정이라 할 수도 없는 배들이었다. 기뢰 제거를 목적으로 건조된 소해정은 작기도 하지만 설계상 함포를 장착할 수 없다.초대 해군총참모장이 된 손원일 제독은 몹시 전투함을 갖고 싶어 했다. 해군과 관계되는 사람만 만나면 입버릇처럼 전투함 타령을 했다.

그러나 소꿉장난 같은 당시의 국가재정 형편으로는 전투함 구매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우리의 조선시설과 기술 수준으로는 자체 건조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자연히 미국에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손제독은 미 군사고문단과 미 대사관 요원을 만날 때마다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에 보유했던 작은 배들도 그런 노력의 결실이었다.

전투함 확보위한 모금운동 펼쳐

노력이 결실을 보는 듯했다. 49년 초 미 국가안보회의에서 한국 해군에 약간의 함정과 무기를 제공한다는 결정이 난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뒤에 알고 보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무드 때문에 미국은 ‘전투함은 외국에 팔지도 양도하지도 않는다’는 정책을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오는 방법뿐이었다. 결론은 그렇지만 예산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당시에는 외화가 너무 귀해 정부도 그 정도의 달러를 구할 방법이 없는 시절이었다.“애드미럴 손. 전투함을 구할 묘안이 없을까?”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손제독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애드미럴’이란 제독이라는 뜻으로, 이대통령은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손제독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말에 더욱 부담을 느끼던 손제독의 뇌리에 유성처럼 스쳐가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해방헌금(海防獻金) 운동이었다. 일제가 해군력 강화를 위해 범국민적인 모금운동을 벌여 군함을 건조한 일이 떠오른 것이다.

해군·부인회 앞장서 목표액 달성

그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우선 해군이 모범을 보여야 국민이 호응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49년 6월 1일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결성했다. 스스로 위원장이 돼 운영규정을 만들었다. 장교는 봉급의 10%, 병조장은 10%, 하사관·수병은 5%씩 매달 봉급에서 떼어 기금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장교 월급이 얼마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생활급에도 턱없이 모자랐던 기억뿐이다. 그래도 불평불만은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전투함을 갖고 싶었다. 전투함 보유는 해군 장사병 모두의 하나같은 열망이었던 것이다.

여자들도 팔을 걷어붇었다. 남자들이 하는 일을 구경만 할 수 없다면서 해군부인회가 나선 것이다. 손제독 부인 홍은혜 여사가 이끄는 부인회에서는 각자 수예품·의류·식품 같은 현물을 모아 바자회를 열었다. 그런 행사가 끝나면 길거리에 나가 팔았다.

천막을 치고 밤새 재봉틀을 돌려 만든 작업복·장갑·머플러 같은 것을 군에 납품하기도 했다.그렇게 모인 돈이 1만5000달러였다. 4개월이 못 돼 목표액을 채운 것이다. 손제독은 그 돈을 가지고 경무대로 들어갔다. 9월 중순의 일이다.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정리= 문창재·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