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53 해병대 역사 - 해병대와 한국전쟁 해병대는 창설된 지 불과 1년 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원하는 구국의 선봉군으로 진동리 지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에서 연전연승함으로써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얻어냈으며,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빛나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특히, 북괴군의 발악적인 최후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 해병대는 동년 9월 15일 한반도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북진의 혈로를 타개하였고,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감행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하는 수훈을 세었다. 동년 10월 7일 북진의 선봉이 되어 원산ㆍ함흥지역에서 분전하던 해병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잠시 철군하였고, 1951년 1ㆍ4후퇴 시 재 반격 작전을 개시하던 .. 2022. 11. 12. 해병대 역사 - 장항.군산.이리지구전투(‘50.7.15~7.21) 장항·군산·이리지구전투(’50. 7 .15∼7. 21) 북괴의 남침으로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해병대는 1950년 7월 초 천안을 점령한 북괴군 제6사단 제 13연대가 서해안을 우회하여 호남지역으로 남하할 때‚ 해병대 고길훈 부대는 제주기지를 떠나 7월 16일 군산에 상륙‚ 장항 북쪽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북괴의 금강 진출을 저지‚ 격파하였고 7월 20일까지 군산‚ 이리 방면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의 남침을 저지하였다. 2022. 11. 12. 해병대 역사 - 진동리 지구전투(’50.7.31~8.13) 진동리 지구 전투(’50. 7 .31∼8. 13) ’50. 8. 3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북괴군 제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적 제6사단의 예봉을 꺾어 침공을 저지하였으며‚ 창군 이래 최대의 전공을 세워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다. 동년 8월 7일부터 미 육군 제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특수임무부대가 진주고개로 지향된 대규모 반격 작전(1950.8.7 ∼ 8.12)을 전개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진동리 마산 간의 보급로를 타개하고 야반산‚ 수리봉‚ 서북산 일대의 적을 완전히 격퇴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하였다. 2022. 11. 12. 해병대 역사 - 통영상륙작전(‘50.8.17~9.22) 통영상륙작전(’50. 8. 17∼9. 22) 낙동강 방어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북괴군 제7사단이 거제도를 점령하고 전략 요충지 마산과 진해를 해상에서 봉쇄하기 위하여 통영에 침입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 8. 17일 18:00. 7척의 해군 함정의 지원 아래 장평리 해안에 한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2일 만에 전술 요충지 통영을 탈환한 뒤‚ 원문고개에서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방어하였다. 이 작전에서 해병대는 작전의 승패를 가름하는 매일봉 고지를 적보다 5분 먼저 점령하여 인해 전술로 공격하는 적을 격멸하고‚ 통영 시내의 잔적을 소탕하면서 적의 유일한 공격로인 원문고개를 조기에 탈취 확보하여‚ 여러 차례의 공방전에서 적 대대를 격퇴함으로써 낙동강 교두보선의 서측방.. 2022. 11. 12. 해병대 역사 - 인천상륙작전(’50.9.15~9.20) 인천상륙작전(’50. 9. 15∼9. 20)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괴군 최후의 발악적인 8월‚ 9월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한 작전으로서‚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에서 적을 몰아내고 조기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계획 아래 1950. 9. 15‚ 유엔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척의 대 함대를 동원하여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를 선두로 세계 전사에 천연히 빛날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에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는 48시간 동안 항공모함 함재기 200대의 공중 폭격과 함포 사격을 실시하면서‚ 9.15 06:30 미 해병대 제5연대 제3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으로 녹색해안에 상륙‚ 월미도를 탈취하였다. 동일 17:30부터 한·미 해병대가 400여 척의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4회에 걸.. 2022. 11. 12. 해병대 역사 - 해병대 창설(‘49.4.15) 해병대 창설(’49.4.15)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과 여 · 순 반란사건의 전훈에 따라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높아‚ 1949. 4. 15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하였다. 그 뒤 1949. 5. 5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당시 초대 사령관 신현준 중령 휘하 380명은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26명과 하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해군 13기에서 특모한 해병대 병 1기생)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 한다’는 해병대 정신으로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1949. 8. 1장교와 하사관을 해군에서 증원 받고‚ 해군 14기 중 440명을 해병대 병 2기로 특모하여‚ 해병대는 2개 대대 규모로 .. 2022. 11. 12. 해병대 비화 - 창설 비화 1 2022. 11. 3. 해병대 역사 창설기 여수 10.19 사건의 결과에 따라 상륙전을 담당할 부대의 필요성을 검토하여 미국 해병대를 모방하여 1949년 4월 15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에 위치한 덕산 비행장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다. 그들을 지휘할 최초의 해병 사령관은 신현준 중령, 해병 참모장은 김성은 통제부 교육부장이었다. 초기 핵심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육군의 장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부대원은 해군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8월 1일 해군에서 장교와 부사관을 증원받고, 해군 병 14기 중에서 440명을 해병대 병 1기로 특별모집받아‚ 2개 대대 규모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8월 15일 광복절 4주년 기념식에서.. 2022. 11. 3.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