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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군사 소식

[국군의 前身 ‘국방경비대’ 창설 70주년] 2016

by 충실한 해병 2022. 11. 9.

지난해 국군의 날 리허설 모습. 현재 국군의 날은 6·25전쟁 당시 국군이 북진해 38선을 통과한 10월 1일로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올해는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前身)인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된 지 70년이 되는 해다. 1945년 8월 광복 후 휴전선 이남에 주둔했던 미 군정(軍政)은 이듬해인 1946년 1월 15일 한국의 치안을 강화하기 위해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만들었다. 조선경비대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출범 후 한국의 정식 국군으로 재탄생한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광복군 출신 인사들이 조선경비대에 참여함으로써 국군은 북한의 인민군이 가질 수 없는 광복군의 전통을 이어가게 된다.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군은 핵과 미사일이라는 북한군의 가공할 만한 비대칭 전력이라는, 창군 이래 가장 파괴력이 큰 북한의 도발에 직면하고 있다. 북한은 새해 벽두 4차 핵실험을 감행하며 군사적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우리 군도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한국형미사일방어(KAMD) 체계 및 킬체인(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을 사전에 탐지하고 선제 타격하는 체계) 구축과 북한을 위협할 수 있는 우리만의 비대칭 전력 개발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한반도 유사시 아직 작전을 지휘할 권한이 없는 우리 군은 주한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을 되돌려 받아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고질적인 방산비리와 병영 악습 철폐, 정예강군을 위한 국방개혁 등도 우리 군이 앞으로 차질 없이 해 나가야 할 과제들이다. 

 


▼ “남한에도 군부대 세워라”… 美군정, 1946년 뱀부계획 가동 ▼

조선경비대가 1948년 8월 15일 서울 시내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경축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미 군정청에 의해 1946년 1월 15일 창설된 조선경비대는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예비대였지만 사실상 군 조직이었다. 조선경비대는 정부 수립 후 국군으로 정식 출범한다.

‘뱀부(bamboo) 계획을 가동하라.’ 

1945년 8월 광복 후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군정청은 그해 12월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창설 계획인 ‘뱀부 계획’을 추진키로 한다. 뱀부 계획은 군 조직이 아닌 경찰의 예비대 전력(2만5000명)을 구축하는 계획이었다. 미 군정이 경찰 예비대로 한국군 조직을 창설한 것은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을 의식한 결정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기 전에 미군이 남한에 정식 군대를 만들 경우 북한을 앞세워 한반도 공산화를 꾀하고 있던 소련의 반발이 불 보듯 했기 때문이었다.




광복군의 법통을 잇다
 

 

당초 미 군정청의 계획은 2만5000명의 2배인 5만 명의 병력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약 7만 명의 미 24군단 병력으로는 한국에 남아 있던 34만 명의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광복 직후 북한에서는 군소 군사단체를 규합해 인민군의 전신인 보안대를 창설하는 군사적인 움직임이 있어 미 군정청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에 미 군정청 치안국장이었던 로런스 시크 준장은 군정청 내에 국방사령부(통위부)를 발족하고 남한 내 군대조직 편성을 위한 기본계획을 마련한다. 국방사령부는 미 군정하에 만들어진 최초의 국방 기구다. 

이 기본계획에 따르면 육군은 3개 사단으로 구성된 1개 군단(4만 명)을, 해군은 해안경비대 5000명, 공군은 수송비행대대 5000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당시 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반대에 부닥친다. 맥아더 사령관이 반대한 것은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 군정청 최고 지휘관이었던 존 하지 중장은 대안으로 뱀부 계획을 진행하게 된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1946년 1월 9일 뱀부 계획을 승인한다. 미 군정청은 국방사령부 내에 남조선국방경비대 임시사무소를 만들고 경남 진해에 있던 해방병단(해군의 전신)을 편입한다. 이후 1월 15일 태릉(현 육군사관학교 터)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창설된다. 

그러나 사실상 군 조직이었던 남조선국방경비대는 국방사령부 내에서 경찰 기능을 맡고 있던 경무국과 함께 있으면서 서로 마찰을 빚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 군정청은 국방사령부를 따로 독립시켜 국방부로 승격시켰지만 예상대로 소련 측은 이에 반대했다. 결국 미 군정 당국은 국방부를 국내경비부라고 이름을 바꾸게 되지만 이번엔 국방의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는 한국 측 반대에 직면한다. 이후 한국 측의 뜻에 따라 대한제국 시절 군 조직을 뜻했던 ‘통위영(統衛營)’에서 이름을 따 통위부로 이름을 바꾸고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이름을 바꿨다. 

통위부의 수장에는 광복군 창설의 주역 유동열 장군이 취임했다. 당시 상당수 광복군 출신 인사들은 강대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움직임에 반대해 군정하의 조직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경비대 사령관에 송호성 장군이 임명되면서 이후 조선경비사관학교에 광복군 출신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남정옥 박사는 “당시 조선경비대에 들어갔던 광복군 출신 사이엔 비록 당장은 경찰의 예비대이지만 정부가 수립되면 국군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육·해·공·해병대의 창설 

 

1949년 10월 공군 창설 뒤 장병들이 미군으로부터 받은 L-4 연락기에 시동을 걸어보고 있다. 동아일보DB

1947년 5월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자 미국 내에서는 더 늦기 전에 유럽 재건에 집중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대신 통위부와 조선경비대를 군 조직으로 키우는 작업에 착수한다.

1948년 8월 남한에서의 단독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한 뒤 통위부는 비로소 국방부로 이름을 바꾸게 되고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재탄생한다. 초대 국방부 장관은 광복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던 이범석 장군이 맡게 된다. 이후 유 통위부장은 모든 권한을 이 장관에게 넘긴다. 국무총리도 겸했던 이 장관은 미 군정 당국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고 미군은 1948년 9월부터 철수를 시작한다. 소련의 통제를 받고 있던 북한은 주한미군이 철수한 틈을 노려 1950년 6·25전쟁을 일으킨다. 

창설 당시 육군은 보병 5개 사단으로 병력은 장교 1403명, 사병 4만9087명 등 총 5만490명이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부대를 늘려 1950년 6·25전쟁 직전까지 9만5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해군의 출발은 광복 후 결성된 개별 군사조직인 해사대에서 시작됐다. 중국과 독일 등에서 항해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손원일과 일본에서 일등기관사로 활동하다가 귀국한 정긍모가 해사대 조직을 이끌었다. 80명으로 시작한 해사대는 해양 인재 양성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항해술과 군사교육을 진행했다. 이후 해사대는 미 군정 당국의 승인하에 자생적으로 조직된 해방병단에 합류한다. 해방병단은 1946년 1월 남조선국방경비대 출범과 함께 해안경비대로 이름을 바꾼다. 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해군으로 재발족한다.

해병대 창설은 1948년 10월 군 내 좌익세력이 봉기한 여수·순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륙작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창설 초기 해병대 규모는 간부 80명과 병사 300명으로 해군기지 경비 임무도 같이 수행했다.

공군의 시작은 1948년 5월 조선경비대 예하 부대로 창설된 항공부대에서 시작됐다. 항공부대는 이후 항공기지사령부로 이름을 바꾸고 같은 해 9월이 돼서야 미 공군으로부터 연락기(L-4) 10대를 인수하면서 비로소 처음 비행기를 갖게 된다. 당시 연락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후방 지역에서 정찰 및 연락 수단으로 쓰던 구형 비행기였다. 우리 항공대원들은 단 한 번의 시승 뒤에 10대의 연락기를 동시에 이륙시키는 데 성공해 당시 미군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항공기지사령부는 육군항공사령부로 재편됐고 이후 1949년 10월 공군으로 독립하게 된다. 공군 창설 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미국에 전폭기를 포함한 항공기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하자 “우리의 비행기는 우리의 힘으로 구입하자”는 구호 아래 모금운동을 벌여 당시 3억5000만 원을 모아 캐나다 정부로부터 1950년 5월 훈련기 T-6 10대를 구입한다. 이 T-6 10대는 국민의 애국심과 국가 건설의 뜻을 담아 ‘건국기(建國機)’로 불린다.


국군 부대에 숫자 ‘4’가 없는 이유
 

광복 후 해사대와 같이 자주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군사 조직 중에는 좌익 성향이 짙은 단체들도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러한 단체들이 국군 창설 과정에서 혼재된 상태로 들어오면서 국군 내 이념 분열의 문제는 한국 정부가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숙군(肅軍) 작업에 나선다. 

숙군의 직접적인 계기는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했던 육군 14연대에 공산세력이 침투해 일으킨 여수·순천 사건이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육군본부 정보국과 헌병사령부는 전군을 대상으로 좌익 척결에 나선다. 남 박사는 “3년이 넘는 6·25전쟁 기간에 부대 단위로 공산군에 항복한 국군이 없었던 것은 전쟁 전에 이 대통령이 단행한 대대적인 숙군 덕분이었다”고 평가했다.

숙군 이후 국군 부대 명칭에 숫자 ‘4’를 넣지 않는 전통도 생겼다. 당시 군에서 발생한 좌익 사건이 ‘4’가 들어간 부대에서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4연대에는 좌익 세력들이 많았다. 여수·순천 사건의 14연대도 4연대의 1개 대대를 기반으로 창설된 부대였다. 당시 4여단의 예하 부대에서는 지휘관들이 월북하는 사건이 많았다고 한다.


한미 특수부대의 모체 켈로부대, 육군의 아버지 밴 플리트 장군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왼쪽)이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1월 부산에 임시로 마련된 경무대(청와대 옛 이름)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국훈장을 받은 뒤 악수하고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의 노력으로 육군사관학교가 다시 세워지고 육군 20개 사단이 창설됐다.

한미 양국군 특수부대의 모체는 6·25전쟁 당시 적 후방을 교란하는 역할을 맡았던 8240부대(켈로부대)다. 미 극동사령부 소속의 이 부대는 북한 지역 한국인들이 자생적으로 조직한 유격부대를 흡수했다. 

‘울팩’, ‘동키’ 등 30개 예하 부대로 구성된 켈로부대는 3만여 명 규모로 주로 연평도와 백령도 등 남한 서북 도서와 북한의 육지 군사 거점 지역으로 위장 침투해 대북 첩보를 수집하고 주요 군 시설을 파괴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포로나 난민을 구출하는 임무도 맡았다.

이들의 활약상은 미 군사(軍史)파견대(MHD)의 6·25전쟁 기록에도 켈로부대 지휘관들의 인터뷰와 함께 포함돼 있을 정도로 미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게릴라전 때문에 중공군은 전선에 투입돼 있던 2개 사단을 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켈로부대가 펼쳤던 작전은 현재 미 특수전의 교범으로 쓰이고 있다. 

6·25전쟁 동안 와해된 한국군의 체제와 군사학교를 다시 정비하는 데는 당시 미8군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역할이 컸다. 그의 건의로 1951년 경남 진해에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되고 국군 20개 사단을 늘린다.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밴 플리트 장군의 헌신은 한미 우호 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밴플리트상(賞)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군과 용산 

6·25전쟁 후 한미는 1953년 상호방위조약을 맺었고, 한미연합사령부(CFC)가 위치한 서울 용산기지는 주한미군의 핵심 기지로 자리 잡았다. 광복 후 창설된 국방부도 용산 지역에 위치해 있지만 인근 주한미군 용산기지는 그동안 한국 땅이면서도 한국 땅이 아닌 곳이었다. 지리적으로 지대가 다른 곳보다 높고 서울의 한가운데인 요충지에 속해 외국군이 주둔했던 단골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에 외국군이 처음 들어온 것은 13세기로 고려 말 당시 몽골군이 한반도를 침략한 뒤 보급기지로 활용했다. 임진왜란 때는 평양전투에서 패한 일본군 병력이, 1892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병력 3000명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이후 일본은 러일 전쟁을 앞두고 1904년 이곳에 수만 명의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시설을 지었다. 한일 강제병합 뒤에 일본은 용산 지역에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관저를 짓고 2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100년 넘게 우리 땅이 아니었던 용산기지 터는 경기 평택으로 미군 이전이 완료되는 2017년 이후 일부 시설물을 제외하고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 南 전투기-전차 화력 우세… 北의 비대칭 무기엔 속수무책 ▼

 

지난 70년간 우리나라는 개인소총도 만들지 못하던 나라에서 87개국에 36억 달러 이상의 첨단무기를 수출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최신예 전차와 전투기 등 우리 군이 보유한 첨단무기를 보면서 북한은 일찌감치 1990년대부터 비대칭 전력으로 눈을 돌렸다. 6일 4차 핵실험을 감행한 북한은 핵무기의 최종 단계인 수소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 군도 이에 대비한 비대칭 전력 개발이 절실하다. 


세계 10위권 방산수출국으로 

지난해 12월 말 방위산업체 현대로템의 경남 창원공장. 육군의 차기 핵심 전력인 K-2 흑표 전차를 생산하는 이곳은 연말에도 생산 라인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각 공정에서 용접 소리와 함께 직원 400여 명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초도 물량 100대 납품을 완료한 현대로템은 올해 우리 고유 기술로 개발한 파워팩(엔진+변속기)이 장착된 K-2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2008년 개발돼 지난해 7월부터 실전 배치된 K-2 전차는 육군의 차기 핵심 기갑 전력으로 세계 방산시장에서 전차 선진국인 미국 독일 제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K-2 전차 기술은 2008년 터키로 4억5000만 달러(약 5409억 원)에 수출되기도 했다. 국내 방산업체 한화테크윈의 K-9 자주포는 2014년 3억1000만 달러 규모의 수출 계약에 이어 올해 인도에 100대 수출(8억 달러 규모)을 앞두고 있다.

2006년 방위사업청 출범 이후 국내 방산 수출 규모는 2억5323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4년 수출 규모는 36억1200만 달러로 14배 성장을 일궈내 방산 수출 세계 10위권 국가가 됐다. 수출품목도 탄약 등 단순 소모품에서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과 호위함 군수지원함 등 첨단무기로 다양해지고 있다. 

수출업체는 2006년 45개에서 2014년 137개로 3배 이상으로 늘었다. 수출 국가는 같은 기간 45개국에서 2배 가까운 87개국으로 확대됐다. 산업연구원(KIET)에 따르면 우리 방산제품의 기술력은 선진국 대비 88%(2013년 기준) 수준이다.

항공기는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사업에 속한다. 국산 고등훈련기 T-50의 경우 1대가 자동차 1000대 수출 효과가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2011년 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필리핀 이라크 페루 등 4개국에 T-50계열 항공기(경공격기 FA-50 포함) 56대를 수출했다. 이제 KAI의 훈련기 수출은 75조 원대 시장인 미국의 고등훈련기(TX) 사업을 겨냥하고 있다.

한국형전투기(KFX) 사업도 지난해 본격 시작됐다. 방사청은 KAI와 계약을 맺고 2026년까지 개발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KFX 개발에 성공할 경우 최대 180조 원의 수출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가 자체 개발한 첨단무기뿐만 아니라 우리 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체 전력을 놓고 비교해도 북한보다 질적으로는 훨씬 앞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국방백서에 따르면 전투기의 경우 북한군이 보유한 전투기는 약 820대로 우리 공군의 2배에 달하지만 대부분 노후한 미그 계열의 전투기다. 북한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4300대의 전차 중엔 6·25전쟁 당시 사용했던 T-34 전차 등이 포함돼 있어 한국군이 보유한 2400대의 전차 전력보다 뒤처진다는 평가가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대비 시급 

문제는 비대칭 전력이다. 북한은 재래식무기 대결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판단하에 전력의 열세를 뒤집을 수 있는 전략무기에 집중해 왔다. 대표적인 무기가 핵과 미사일이다.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수소폭탄 실험의 성공일 가능성은 낮지만 네 번의 핵실험으로 핵의 소형·경량화는 상당한 진전을 이뤘을 것으로 군 당국은 보고 있다. 통상 핵탄두를 무게 1t, 지름 90cm 이내로 만들었을 때 소형화를 이뤘다고 본다. 김대영 한국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은 “북한의 핵반응을 유도하는 고성능 폭약 기술도 갈수록 적은 양으로 큰 파괴력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앞으로 수년 내에 북한의 핵 기술은 완성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북한은 핵 개발과 함께 핵을 실어서 공격할 수 있는 수단도 비대칭 전력으로 개발해 왔다. 미국 본토까지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KN-08은 지난해 10월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서 개량된 모델이 공개되기도 했다. 지난해에만 세 번의 사출시험을 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은 우리 군에 더욱 치명적인 핵 도발 수단이다.

잠수함의 움직임은 정보위성 등 한미 정보자산으로도 파악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은밀하게 한국의 후방지역으로 내려와 원자력발전시설 등을 기습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 군 당국은 북한이 이르면 2, 3년 내 SLBM 기술을 확보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북한은 SLBM을 1기만 장착할 수 있는 신포급(2000t급)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더 많은 SLBM을 쏠 수 있는 3000t급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