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방어전은 6·25전쟁 중 마산을 지켜내기 위해 미 육군과 미 해병대, 우리나라의 국군과 해병대, 그리고 전투경찰대가 수행한 방어작전이다. 이는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6·25전쟁 중 가장 무더웠던 기후 속에서 길고 치열하게 실시한 전투였다. 마산방어전 중에 진동리전투는 낙동강 방어전선 중 제일 남단의 전장으로써 같은 시기의 왜관 다부동과 포항전투에 비해 국지적이고 덜 알려졌지만,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50km거리에 있어서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던 절체절명의 방어지역이었다.
▲ 마산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진주가 실함되고 마산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미 제8군사령관은 ‘북한군이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 빠른가? 아니면 미 증원군이 부산에 도착하는 것이 더 빠른가?’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했다. 워커 장군은 미 제24사단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미 제5연대전투단을 마산에 증원시켰고, 8월 1일에는 대구 상주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5사단의 마산 이동을 명령했다. ▲ 8월 1일 진주로부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진주고개를 점령하고 있던 미 제1-19대대가 북한군의 추격을 물리쳐 철수는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이들은 철수하여 미 제1-19대대는 진주-검안리 간의 도로를 통제하기 위해 괘방산의 능선을 점령하였다. ▲ 8월 2일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마산을 향해 동진하고 있는 적을 중암리 일대의 민기식 부대와 협조하여 진동리 서측에서 저지하라는 명령을 수행했다. 8월 1일 저녁 이동을 개시해 고사리 일대에 도착한 후 2일까지 진지를 구축하면서 정찰대를 보내 적정을 파악했다. ▲ 8월 3일 8월 3일 오전 4시경, 적의 정찰대대가 야음을 이용하여 전차를 앞세우고 진동리를 향하여 행군하고 있었다.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침묵을 지키며 적의 접근을 기다렸다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해병대의 강력한 공격에 적은 분산되어 전차와 다수의 무기 및 시체를 남기고 도주하였다. 개전 이후 무패를 자랑하던 북한군 제6사단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해 그 예봉을 꺾어버린 전투였다. ▲ 8월 4~5일 김성은 부대장은 야간숙영 지점에서 함안을 향해 적진돌파를 결심하고 8월 4일 오전 6시에 전술행군을 시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적과 조우 없이 무사히 함안에 도착하였으며, 진동리에 있던 제1중대도 함안에 도착함으로써 김성은 부대는 모든 부대원이 함안에 집결할 수 있었다. 8월 5일, 우리 해병대는 미 제25사단의 트럭을 이용하여 함안을 출발한 후 진동리에 도착했다. | Tip | ▲ 킨 특수임무부대 이 무렵 미 제8군은 북한군의 주공이 대구로 지향되어 있다는 것을 탐지하고 있었다. 새로 편성된 북한군 3개 사단이 대구를 공격해 온다면 대구방어가 위험하게 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었다. 한편, 미군도 8월 8일에는 미 제2사단의 주력과 중(中)전차 3개 대대의 증원부대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을 감안한 워커 장군은, 마산 정면에서 UN군으로서는 최초의 공세를 취하기로 결심하였다. 워커 장군은 8월 6일에 미 제25사단장인 킨 소장에게 임시해병여단을 배속시키고, 진주를 향하여 공격한 후 부산교두보의 남측방인 남강 남안-진주고개-사천선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이 작전을 ‘킨 작전’이라 명명했다. 킨 작전의 목적은 마산 정면의 북한군을 격파하여 부산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대구 정면으로 집결하고 있는 북한군과 남하중인 북한군을 유인하여 대구 정면의 압력을 완화하며, 부산교두보 남측의 방어선을 진주고개-사천선으로 추진시키는 데 있었다.\ ▲ 8월 6일 해병대 7중대는 진동리와 마산을 통하는 도로 북쪽의 340고지에 대한 공격임무를 부여받았다. 아군이 적진에 접근하자 적은 기관총 및 자동화기로 완강히 저항하여 왔다. 이 고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마산-진동리간 보급로가 차단되어 진동리 일대의 아군 부대는 자연히 무력해질 뿐만 아니라 마산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 해병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8월 6일 오후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 8월 7일 킨 특수임무부대는 예정대로 8월 7일 아침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북한군 제6사단도 공격을 개시하여 상호 충돌하였다. 진동리에는 하루 종일 박격포탄이 집중되었고, 주변의 포병진지와 보급소 등에도 많은 포탄이 떨어졌다. 우리 해병대는 마산에서 진해 통제부로부터 추가적으로 155명을 보충 받아 부대를 증강한 후 마산을 출발하여 8월 7일 저녁 진동리에 도착하였다. 부대는 도착 즉시 미 제25사단에 다시 배속되어 곧바로 수색정찰에 임했다. ▲ 8월 8~9일 적 제6사단은 미군의 공격을 알아채자 즉시 방어로 전환했다. 진동리에서는 미 제24연대의 제2대대와 제3대대, 그리고 미 제3해병대대가 항공지원에 힘입어 255고지를 가까스로 탈취했다. 우리 해병대가 점령하고 있던 진동리 서북쪽 고지의 진지에도 9일 점심나절부터 적의 포탄이 떨어지더니 10일 새벽 3시경부터 진지의 모든 정면에서 적이 공격해 왔다. 적은 진동리부터 함안 방향으로 4km 떨어진 고지에서부터 포격을 가하며 돌진해 왔으나 우리 해병대원들의 강력한 반격으로 물러났다. ▲ 8월 10일 미 제5연대전투단은 점점 증가하는 북한군의 저항을 격파해 나가면서 봉암리 일대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10일 밤 북한군은 야영중인 연대를 포위하고, 한밤중에 공격을 가해 왔다. 이 야간공격은 UN 공군기의 공중공격이 시작된 새벽녘까지 계속됐다. 진동리 서북쪽 고지에 있던 우리 해병대는 현 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하고 진동리에 집결하였다. 김성은 부대의 임무는 적 후속부대를 제압하여 이를 격퇴함으로써 좌일선에 있는 미 해병부대와 협조하여 적을 서측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 8월 11~13일 11일 미 해병 항공기 콜세어기들이 고성 근처에서 북한군을 타격해 다량의 병력을 파괴했다. 덕분에 제5해병연대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진출할 수 있었지만, 봉암리 계곡에서 적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아 포병의 큰 피해를 입었다. 8월 11일 김성은 부대는 성공적인 작전 수행으로 진동리에서 함안으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하는 작전상 요지를 확보했다. 12일에는 함안과 중암리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적을 공격해 제압하고 진해 이동을 명받아 13일 밤 마산을 출항했다. ▲ 8월 14일 이후 8월 14일 미군은 서북산 능선에 주진지를 선정했다. 700m가 넘는 산에 보급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수송수단은 노무자들이었다. 북한군과 처절한 고지 쟁탈전으로 서북산 정상은 8월 말까지 공식적으로만 19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나 결국 미 제25사단은 진동리 일대의 거의 모든 고지들을 지켜내 마산 방어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 통영으로 향하는 김성은 부대 진주에서부터 단숨에 마산을 공략하고 부산으로 최종적인 공격을 가하려고 했던 적은 마산 정면에서 의외로 미군과 우리 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자 그 시선을 통영으로 돌렸다. 손원일 해군총참모장의 명령 아래 김성은 부대장은 통영에 있는 적을 직접 공격하여 섬멸하고 적이 증원해 오더라도 폭이 좁은 원문고개를 굳게 지키고 있으면 충분히 격퇴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 통영상륙작전 개시 8월 17일 오후 김성은 부대는 상륙 성공 후 다음 날 18일 새벽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통영상륙작전 승패의 관건이 되는 망일봉을 점령했다. 도주하던 적은 원문고개를 넘으려다 해병대에게 전멸 당했다. 그리고 이날 정오경부터 해상의 함정의 지원 포격 속에 해병대는 통영 시내에 남아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던 적들을 모두 소탕했다. ▲ 통영상륙작전의 의미 통영상륙작전은 당시 국군의 모든 작전이 전적으로 미군에 의존한 상황 속에서 국군이 완전히 단독으로 실시하였다는 점, 그리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수세에 있던 UN군과 국군 중에서 최초로 공격작전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상륙작전을 감행했다는데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작전이 끝나고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마가렛 히긴스 기자가 ‘이들은 악마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내용의 원고를 작성하여 이 기사로 인해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해병대의 대표적인 표어가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 마가렛 히긴스 기자 사진과 그녀가 작성한 원고에 썼던 ‘그들은 심지어 악마까지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글자가 씌어져 있다. (통영상륙작전 기념관 앞) ▲ 그날의 전투 흔적을 탐사하다 6·25전쟁 당시 전투의 흔적을 찾기 위해 6·25전쟁 마산지구 전투흔적 발굴팀 배대균(예·해군소령) 배신경정신과 원장과 손담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지회 사무국장은 직접 현장을 답사하고 있다. 이들은 서북산과 여항산, 진동리와 함안 일대를 조사하며 탄흔 발굴 및 무기 출토, 증언 수집 등을 하고 있다.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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