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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서울 서측방 104고지 전투

by 충실한 해병 2022. 12. 17.
● 전투시기 : 1950.9.21-9.22
● 전투지역 : 서울
● 주요지휘관 : 고길훈 소령, 뉴튼 중령(Newton)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상 세 설 명
 
1. 서울 탈환작전 개요

  한국전쟁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이룬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은 제 10군단의 공격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에 의해 1950년 9월 15일 감행되었다. 미 해병상륙단이 저항하는 적을 무찌르고 인천 동쪽 외곽에 설정된 교두보로서의 진격을 계속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인천시내의 잔적섬멸 작전을 담당하고 있었다.
  일단 인천시를 포함한 교두보를 확보한 상륙군은 곧이어 서울탈환 작전에 돌입하고 미 해병 1연대는 경인(京仁)가도의 우측지역을, 그리고 미 해병 5연대는 동 좌측지역을 각각 담당하고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해병대는 16일 저녁 2대대를 계속 인천 시내의 잔적섬멸 작전에 임하게 하고 자리를 옮겨 미 해병 5대대의 좌측에 포진한 후 17일 수차에 걸쳐 적의 역습을 물리치면서 김포반도의 잔적(殘賊)을 섬멸하였다.
  미 해병 제1연대가 18일 소사(素砂)를 탈환한 다음 영등포를 향하고 있을 때에 미 해병 5연대와 한국해병 1연대와 2연대는 행주(幸州)쪽으로 한강을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고 19일에 그 준비를 서둘렀다. 19일 야간을 이용한 도하작전은 미리 알게된 적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20일에 도하를 강행하는데 성공하여 능곡에서 수색 방향으로 적을 압박하였다.
  17일 뒤늦게 상륙한 미 제 7사단이 미 제 1연대의 남쪽을 차단하고 엄호하는 가운데 미 해병 1연대는 영등포로 진격을 계속하고 격전을 거듭하였다.
  최초 서울 서측방을 공격하기 시작한 미 해병 5연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울을 사수하려는 북한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연희고지(延禧高地) 일대의 능선상에서 격전이 전개되어 그 전진 속도는 둔화되었다. 그러나 아군의 선전으로 적의 보루는 무너지고 24일에 이르러 연희고지 일대의 능선을 점령하였다. 또한 많은 고전 끝에 영등포를 점령하고 미 보병 제 7사단의 일부가 수원으로 남진하고 있을 24일에 미 해병 1연대는 마포쪽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미 해병 5연대 우측에 배치되었는데 이때에 또한 미 해병 7연대도 21일 사령부와 함께 인천에 상륙한 다음 미 해병 5연대 좌측방에 배치되었다.
  제 10군단장 알몬드(Almond) 소장은 서울 서측방에서 미 해병대가 고전하자 25일 미 보병 제7사단 예하 32연대와 한국 육군 17연대를 서빙고 쪽으로 도하시켜 서울을 북서쪽과 남동 쪽에서 포위하는 태세를 갖춘 다음 일거에 시내 돌입작전을 전개하였다.
  서울 공략의 주공부대인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울 서측방에서 25일까지는 완전히 능선 일대를 확보하였고 일부 부대는 벌써 서울시에 진입하였다. 북쪽은 미 해병 7연대와 한국 해병 5대대이고, 중앙은 미 해병 5연대와 한국 해병 1대대인데 이때에 남쪽은 미 해병 1연대와 한국 해병 2대대가 배치되어 마치 반원모양의 궁형(弓形) 태세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25일 밤 미 보병 제 32연대와 한국 육군 제 17연대가 남산을 점령하였을 때 공격을 개시한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서대문 방면과 마포 일대에서 공세를 취하였으나 적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진은 불가하였고 26일 아침까지도 변동은 없었다. 다만 원효로와 삼각지 일대를 담당한 한국 해병 2대대가 국부적인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그 일대를 확보하였을 뿐이다.
  26일 전투는 철수를 위해 시간을 얻기 위한 적의 지연전술을 분쇄하는 전투였다. 적은 수많은 바리케이드와 지뢰를 매설하고 아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아군의 선전으로 저녁에는 서울의 3분의 1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 해병대는 27일 아침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또한 서울시 일원의 잔적을 완전히 섬멸, 29일에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환도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에서 한국군 제 17연대는 한국 해병과 임무를 교대하여 서울시 경비에 임하고 미 해병대가 경의가도(京義街道)와 경원(京元)가도를 따라 진격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경춘(京春)가도를 따라 진격하였다. 이것은 서울 탈환 후 내륙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진격이었는데 10월 3일 미 해병대가 의정부에, 한국 해병대가 북한강에 진출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경춘가도를 따라 진격한 한국 해병대는 금곡을 점령하고 북한강에 이르렀다.
  한편 제 10군단의 일부 부대인 미 제 7사단 31연대는 북상하는 제 8군과의 연계작전을 위해 남진하여 서울이 완전 탈환되기 전 26일 수원 남쪽에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2. 서울 서측방 104고지 전투

  9월 21일
  미 해병 1연대(연대장 대령 풀러(Puller))가 영등포에서 고전 끝에 거의 시가를 확보할 무렵 서울 서측방을 담당한 미 해병 5연대(연대장 머레이(Murray))와 한국 해병대는 수색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도로와 철로를 따라 07:00를 기해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아군의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 해병 1대대(대대장 소령 고길훈)가 중앙을 담당하고 미 해병 5연대 1대대(대대장 중령 뉴튼(Newton))가 좌측, 3대대가 우측방을 담당하여 서로 공격대형을 유지하면서 적의 주방어 진지를 돌파하려고 작전하고 있었다. 이날 영등포의 적은 미 해병 제 1연대의 공격으로 서울쪽으로 퇴각하였으며 24일 미 해병 제 1연대는 한강을 도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기한 바와 같이 미 해병 5연대의 중앙에서 행주를 도하한 다음 서울 북서쪽에서 직접 서울 시내 쪽을 공격한 한국 해병 제1대대는 서울 탈환전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를 치루어야만 되었다.
  미 해병 5연대와 한국 해병대가 담당한 목표들은 서울 홍제동에서 한강 연안의서 서교동쪽으로 뻗어 야산으로 연결되어 있는 고지대인 105고지(N)와 105고지(C), 105고지(S)로 불리는 3개의 105고지로 형성되어 있었다.
한국 해병대 1대대는 20일 00:30에 약간의 적 저항을 물리치고 수색을 무혈점령한 후 104고지선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이때 미 해병 5연대 좌측을 담당한 미 해병 3대대는 안산(295고지)으로 향하고 미 해병대는 105고지(S)를 향해 공격하였는데 한국 해병 1대대는 처음으로 104고지를 공격하게 되었으며 이 고지의 점령은 서울로 돌입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고지를 공격한 한국 해병 1대대 장병 중에는 장항, 군산 지구에서 또는 진동리, 통영(충무시) 지구 등 전투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분대장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역전에서 승리만을 거둔, 말하자면 일기당천이 용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21일 01:00 104고지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게 된 한국 해병대 1대대는 고지 앞을 흐르는 하천과 개활지가 적에게 유리한 자연 장애물이 되고 있는 방면, 아군에게는 기동에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는 불리한 조건 밑에서 싸우게 된 것이다. 즉 적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준비된 방어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고 각종 화기로서 아군의 공격을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4고지가 서울 방어를 위해 매우 중요한 지점인 것을 알고 있던 적은 단시일내에 어떠한 공격이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해병대가 104고지에 공격을 개시하고 곧 적의 진지에 돌입하여 진내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적의 저항은 유례없이 치열하였으니 그들의 최후 발악은 극도에 달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2시에 걸쳐 벌어진 이 전투에서 아 해병대는 용전에 용전을 거듭하였지만 이 때문에 손실을 보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봉출 중위의 제 3중대가 주공이 된 이 공격에서 제 1대대는 백병전을 전개하고 18:00 드디어 이 고지를 점령하였으나 애석하게도 8명의 전사자와 20명의 부상자를 낸 것이다. 적은 이 고지의 전투에서 최후까지 발악 저항하였지만 결국 진지를 아군에 의해 돌파당하게 되자 그 뒤쪽에 있는 고지로 패주하였다.

  9월 22일
  104고지에서 패주한 적은 04:00를 기하여 역습을 감행하여 왔으니 필시 적의 독전이 심한 까닭이었으리라. 약 600명으로 추산되는 적은 120mm 박격포와 기타 화기의 지원을 받으면서 3시간 동안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내습하여 왔으나 한국 해병 1대대는 상하일치된 용전 끝에 이 역습부대를 격멸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국 해병대는 지금까지 체험하지 못한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104고지를 공격한 제 2중대가 예상 외로 빨리 정상을 점령하고 배치되어 있을 때 적은 고지 4부 능선에서 뒤따라 104고지 후방으로 이동한 대대본부에 대해 사격을 가하여 왔던 것이다.
  또하나는 적의 역습이 있기 전에 104고지 오른쪽에 있는 터널 속에서 피아의 정찰대가 서로 마주치게 된 일인데 이때 이미 한국 해병대는 북한군의 사병은 삭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까닭으로 피아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해병들은 적들의 머리를 만져 보고야 적임을 확인하고 이들을 모조리 사로잡았다는 사실이다.
  한국 해병대는 이 정찰대의 보고와 포로 진술에서 적은 104고지에 대하여 역습하리라는 징후와 한국 해병대의 다음 목표인 연희고지에 많은 병력을 집결 배치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한국 해병대는 104고지를 점령하려고 적의 끈질긴 저항을 물리치고 이를 점령할 수 있었으며 이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외국 신문기자와 통신원들이 다수 참관하였기 때문에 한국 해병대의 용감성을 세계에 널리 소개하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104고지는 해병 1대대가 점령한 아군의 서울 돌입을 위하여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