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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전투

해병대 전투 - 마산 서측방 정찰전

by 충실한 해병 2022. 12. 17.

● 전투시기 : 1950.8.2-8.3
● 전투지역 : 경남 마산
● 주요지휘관 : 윌슨 준장(Vennard Wilson), 챔프니 대령(Arthur S. Champney)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1. 마산 서측방 정찰전의 개요

  마산 서측방 정찰전은 낙동강 서부방어작전중 하나이다. 미 제8군 사령부에서는 8월 1일 모든 한.미 지상군에게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왜관에서 북으로 올라가 낙정리를 거쳐서 동해안의 영덕까지에 이르는 동부 산악지대는 아군이 맡았으나, 낙동강 서부, 다시 말하면 왜관 동북쪽의 작오산(303고지)을 최우단으로 하여 마산 진동리 진해만에 이르는 낙동강 연안 부근 일대는 미군이 방어 책임을 담당하였다. 마산 서측방 정찰전은 그 방어전투의 일원으로 부산의 서쪽 관문으로 알려진 마산을 거쳐서 부산을 점령하려던 적의 기도를 미 제25사단이 분쇄한 전투이다.

 

2. 마산 서측방 정찰전의 주요 지휘관

*아군
미 제25사단장 소장 킨(Willian B. Kean)
부사단장 준장 윌슨(Vennard Wilson)
제 24연대장 대령 화이트(Horton V. White)(1950.8.6 교대)
대령 챔프니(Arthur S. Champney)
제1대대장 소령 카아손(Eugene J. Carson)
제2대대장 중령 코올(George R. Cole)
제3대대장 중령 코올리(John T. Corley)
소령 브레이어(Melvin R. Blair)
제27연대장 대령 마이캘리스(J H. Michaelis)
제1대대장 중령 체크(Gilbert J. Check)
제2대대장 중령 머치(Gordon E. Murch)
제3대대장 중령 디 챠우(George H. De Chow)
제35연대장 대령 피셔(Henry G. Fisher)
제1대대장 중령 티터(Bernard G. Teeter)
제2대대장 중령 윌킨스(Wilkins)
제3대대장 소령 울포크(Robert H. Woolfolk)
배속부대
미 제29연대 제1대대장 중령 윌리슨(Wesley C. Wilison)
민 부대장 대령 민 기 식
김 부대장 중령 김 성 은
병력 약 15800명
장비 전차 5대

*적군
북한군
제6사단장 소장 방호산
제1연대장 대좌 김후진
제13연대장 대좌 한일래
제15연대장 대좌 김현기
포병연대장 중좌 박해민
병력 약 5000명

 

3. 마산 서측방 정찰전의 진행과정

  가. 마산 서측방의 정찰전 전 상황

  진주를 내 놓고 철수한 미 제19연대장은 7월 31일 오후에 진주 동쪽(진주-마산사이 도로) 약 10km 지점에 있는 장군대산(482고지) 남쪽의 진주 고개 마루턱에서 제1대대 병력을 수습하고 있었다. 한편 제2대대는 의령(宜寧) 방면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미 제19연대장은 이날 저녁 무렵에 사봉면 무촌리의 죽항 부락 부근에 연대지휘소를 두었다. 여기서 마산에 이르는 도로가 남북으로 갈리는데 북쪽 길은 군북-가야를 거쳐 마산에 이르고 남쪽 길은 대정리(창원군 진전면)와 진동리를 거쳐서 마산에 이르게 된다.
이 남북으로 뻗은 두 개 도로의 중앙지대에는 의영-군북-대정리에 이르는 도로와 가야-함안-진동에 이르는 종심 도로가 있다.
  진주-마산 사이의 도로는 미 제19연대가 방어진을 형성하였으나 진주-사천-고성-진동에 이르는 도로는 무방비 상태였다.
  이날 (7월 31일) 20:00에 미 제19연대장은 제24연대장 처치(Church)소장에게서 통신을 받았는데 중리(마산 서북쪽 7km 지점 창원군 내서면)에서 미 제25사단의 27연대장과 함께 곧 만나자는 것이었다. 사단장은 제19연대장의 부대 상황 보고를 들은 다음 구두 명령을 하달하였는데 이때 명령이 분명치 않아서 큰 혼란이 일어난 일이 있었다.
  명령 수행이 끝나자 제19연대장은 지휘소(무촌리 위치)로 돌아갔고 제27연대장은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제27연대는 왜관에서 군 예비대로 있다가 창녕을 거쳐 마산으로 이동 중이었다.)
  8월 1일 03:00에 부대가 도착하자 제27연대장은 중암리 서쪽에 있는 고개 마루턱에 방어 진지를 점령할 것을 명령하고 장교 3명을 거느리고 새벽에 중암리 서쪽의 큰어식재(괘방산=455고지)에 도착하여 지형 정찰을 하고 있었다.

  나. 마산 서측방의 정찰전 경과 개요

  (1)괘방산(큰어식재)의 충돌

  8월 2일
  제29연대 1대대장은 8월 2일 아침에 배속된 전차 1개 소대와 장갑차 그리고 22대의 트럭으로 차량화정찰대(車輛化偵察隊)를 편성하고 C중대원 5명씩 전차와 장갑차에 태웠다. 05:30에 중암리를 출발한 정찰대가 큰어식재에 배치된 제19연대 1대대의 진지를 통과하여 선두전차가 100m 가량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200m 앞에서 기관총(3정) 사격을 갑자기 받게 되었다.
  전차에 올라탔던 병사들은 차에서 내리다가 모두 총을 맞았고 일부는 도량에 뛰어들었으나 그곳에는 적병들이 숨어 있었고 여기서 전투가 벌어졌다.
  적병들은 사방에서 전차에 기어올랐으나 이들을 사살하고 기관총으로 사격을 하면서 400m를 전진하던 중 적의 박격포탄이 선두전차에 명중하여 승무원 2명이 전사하고 전진이 멈추어졌다.
  고개를 넘었던 반수가량의 장갑차와 트럭들은 파괴 또는 불타고 말았다. 이것은 후미의 트럭이 적의 대전차포의 사격을 받고 불에 타서 회전불능에 빠졌기 때문이다.
  차량에 분승(分乘)하였던 병사들은 뛰어내려 도로변 논둑에 산개하였으나 사방의 적에게 포위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뒤에서 보고 있던 제29연대 1대대장은 고개에 배치된 제19연대 1대대장에게 저수지와 그 전방은 모두 적들이라고 경고해 주었다.
  큰어식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게 된 부대들은 전날 밤중에 야간행동을 하다 보니 부대 사이에 간격이 생긴 것을 모르고 있었다. 민 부대는 오봉산(524고지)에서 흐른 350고지, 229고지와 연결되는 229고지와 좌측방을 점령함으로써 제19연대 1대대 진지와는 1.5km나 간격이 생기고 있었다.
  그리고 제19연대 1대대는 오른쪽 괘방산(455고지)의 산정(山頂)까지를 점령하게 되어 있었는데 산정에 올라가던 B중대가 8부 능선에서 주저앉아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에 점령할 생각에서였다.
  한편 적은 2일 날이 밝기 전에 이미 산정을 다른 쪽에서 공격 점령하고 있던 중 B중대를 발견하고 기습 공격하여 중대장 이하 몇 명이 전사하였다. B중대를 공격한 적은 고지에서 내려오면서 길 부근에 혼합되어 배치된 제29연대 1대대의 B중대(62명)와 제19연대 1대대사방에서 사격을 하고 제19연대 1대대와 민 부대의 간격을 이용 침투한 적이 후방의 박격포 진지를 무너뜨리고 도로를 차단하였다.
  제29연대 D중대의 박격포는 몰려드는 적에게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켰다.
  제29연대 1대대 C중대는 괘방산을 탈환함으로써 오른쪽의 적을 구축(驅逐)하였다.
  그리고 제19연대 1대대와 민 부대 사이의 계곡으로 침투한 적에 대하여는 예비대로 있던 제19연대 2대대가 역습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이때 민 부대를 적으로 잘못 알고 약간 혼란이 있었다.
  제19연대장은 민 부대 뒤에 제29연대 3대대를 배치함으로써 이쪽에는 5개 대대가 집중되어 있어서 피아의 구별이 어려웠다.
  오후에 이르러서 적의 공격은 일단 중지되었는데 미군의 손실은 90명이 넘었고 적의 손실은 알 수 없었다. 적은 제6사단 13연대의 약 1개 대대 가량의 병력이었음이 판명되었다.

  (2) 체크(Check) 정찰대(제27연대 1대대)의 충돌

  8월 2일
  04:00에 미 제27연대 1대대장 체크(Check) 중령은 미 제8야전포병대대 A포대와 셔만(Shermans) 전차 1개 소대(4대)의 배속을 받아 대대는 차량화로서 정찰대를 편성하고 진동리를 출발하여 진주쪽으로 향하여 전진하였다.
  중간목표는 무촌리의 도로교차점이었다. 대천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길가에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자고 있던 적 약 30명을 발견하였으므로 곧 이들을 급습하여 대부분 사살하고 그 중의 2명은 포로로 하였고 도망자는 몇 명 안 되었다.
  오후 좀 지나서 선두 전차부대가 무촌리를 지났을 때 마침 장군대산의 진주고개를 넘어서 내려오고 있는 적의 보급차량부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적은 차량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보급품은 식량, 피복, 탄약, 의약품 등이 10여개 차량에 가득 차 있었다.
  이 때 미군 정찰기로부터 “적의 후속하는 차량 대종대(大縱隊)가 고개에서 회전하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이리하여 선두 전차 4대가 고개로 향하였는데 때마침 미군 전폭기 편대가 적의 차량부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정찰대의 주력인 대대는 전진을 중지하고 차량은 부대로 복귀시키고 도보정찰로 전환하였다.
  제27연대 1대대장은 적이 발사한 대전차포의 공격을 받고 궤도가 파괴된 전차를 수리시킨 다음 운전병이 부상당하였으므로 병사 중에서 불도저 운전 경험자를 뽑아서 운전을 시키면서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적의 반격으로 전진은 중지되었고 일부의 적은 배후로 우회하여 전후방에서 협격을 받게 되었다.
  한편 제27연대장은 07:00 쯤 해서 제19연대장에게서 그 연대의 상황을 연락 받고 있었다. 얼마 후 체크(Check) 정찰대의 후방이 차단되고 봉암리 고개의 E중대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상황을 보고 받았다.
  8월 2일 15:00 경에 제27연대장은 포로의 진술과 적정을 종합 판단한 결과 현재의 적은 제6사단의 일부 선견대이고 사단 주력은 장군대산 고개에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하게 괴었다. 정찰 목적을 달성한 제27연대장은 체크(Check) 대대장에게 명령하기를 “귀 대대는 복귀할 것. 대대 후방은 적에게 차단되었으므로 전차를 선두로 하여 돌파하고 포 사정거리에 도달하면 지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체크 대대장은 불탄 전차를 다른 전차로 끌게 하여 앞세우고 나머지 전차와 장갑차량을 후위로 하면서 보병은 양 측방 고지를 전진하기로 하고 철수를 시작하였다.
  하늘에는 미군 전투기가 엄호하고 있었으나 적은 요지에서 기관총으로 사격을 해왔다. 전차포로 이를 제압하고 또 보병은 이를 공격하는 등 적의 봉쇄지역을 돌파하면서 봉암리에 이르렀을 때 지원포병은 철수부대의 후미를 따르고 있는 적 약 1개 대대로 추산되는 병력에게 포사격을 하여 250명이나 사살하였다.
  체크 대대는 01:00 쯤 본부가 있는 진동리 초등학교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극도로 지쳐있었고 이때의 사상자는 30명이었다.
  체크 정찰대장은 보 · 전 · 포 · 공병 등의 여러 부대를 훌륭하게 지휘하였다는 전공으로 십자훈장을 받았다.

  (3) 진동리의 역전승

  제27연대가 있는 진동리는 마산 서남쪽 17km 지점에 있으며 이곳은 함안에 이르는 분기점이다. 체크 대대는 진동 초등학교에서 숙영을 하였는데 교정에는 제11포병대대의 A포대가 포진하고 부근에는 제8포병대대가 있었다.

  8월 3일
  아침 교사(校舍)안에서 혹은 교정에서 장병들의 식사가 거의 끝나 가고 있을 무렵 07:00 쯤 학교 뒤편의 254고지 능선 아래쪽에서 불의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보초병은 적이 접근하는 것을 한국군이 지원 오는 줄 알았고 또 일부는 잠자고 있다가 기습을 받게 된 것이다. 기관총 · 다발총 · 수류탄이 집중되자 학교 안은 수라장이 되었다.
  연대장과 대대장은 병사들을 독려하여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연대장은 집중포화 속에서 태연히 학교 운동장 중앙에 나가서 사격을 멈추게 하고 빨리 지휘체계를 정리하여 중화기의 엄호사격 밑에 소총부대가 적을 공격하라고 하면서 목표를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박격포탄이 적진에 날라가고 전차도 출동하고 포대는 근거리 사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적은 계속 집중사격을 해 왔다.
  A중대장은 적이 있는 고지를 공격하여 적의 기관총 2정을 격파하고 적을 사살하였는데 이것은 연대장이 교정에서 지휘하기 전의 일이었다. A중대장은 발에 부상을 입고 내려와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다시 고지로 올라갔다. A중대가 고지를 점령하였을 때 진동리 북쪽 1km 지점의 함안 도로에 약 30대의 차량에 탑승한 적이 하차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포착하자 제8포병대대는 계곡에 집중사격을 퍼부어 이들을 거의 모두 사살하고 말았다.
  12:00에는 체크 대대가 적의 고지를 점령하였는데 이때에 적도 역습으로 집요한 공격을 가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 측의 집중포화로 완전히 격퇴되고 말았다.
  체크 대대의 손실은 전사 13명 부상 40명이었다. 13:00에 적은 600여명의 시체를 남기고 퇴각하였는데 대부분은 제8포병대대의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
  적의 제6사단은 2일 낮에 정찰한 결과 진동리의 연대지휘소와 포병진지가 보병들의 엄호 없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적 제1연대를 서북산 남쪽으로 침투, 우회시켜 진동리를 기습하려고 하였다. 적의 사단장은 방호산은 체크 대대가 철수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대대가 진동리로 돌아온 것은 모르고 있었다. 진동리를 3일 새벽에 1개 대대로서 점령하고 주력은 단숨에 마산으로 진출하려고 계획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들이 판단과 달리 기습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체크 대대의 반격으로 기습대대가 섬멸하는 위기에 빠지게 되자 적 제1연대장은 급히 1개 대대를 차량으로 증원시켜왔다. 그러나 이것도 하차지점이 노출되어 순간에 괴멸되고 말았다.
  이날 밤(8월 3일) 미 제27연대의 통신대에서는 적이 도로변의 체신 전화선을 이용하여 통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고 엿 들어 본 결과 적의 사단장 방호산이 제1연대장에게 작전 실패에 관하여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적의 사단의 보급소가 서북산 북쪽 광산촌인 둔덕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과 예비대인 제15연대가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동시에 알게 되었다.
  적 제6사단이 마산 나아가서는 익산으로 진격하려는 몽상은 북쪽도로를 공격하던 제13연대가 괘방산 일대에서 참패를 당하고 제1연대의 공격도 허사로 돌아가게 되어 개전 이래로 동북 의용군으로서 기고만장한 허세도 무참하게 깨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타격으로 말미암아 적 제6사단장은 전투력이 반감되고 그들의 공격기동의 핵심이었던 전차부대도 연료부족으로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미 제27연대장은 탁월한 지휘와 진동리의 승리로 중령에서 대령으로 특진하는 영광을 받게 되었다.

 

4. 마산 서측방의 정찰전의 결과

  미 제29연대 1대대는 2일 오후 적의 공격이 일단 중지되자 다음 임무를 대기하여야 하였고, 우리 해병대는 7일 미 제25사단의 명에 의하여 09:00 마산에 집결하였다.
  마산에 집결한 김 부대는 깜짝 놀랐다. 여기에는 김 부대에 대한 영예로운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즉 8월 5일부로 김성은 부대 전 장병은 일 계급씩 특진한다는 특별 승진 명령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후 해병대는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었으며 서부 지구전투사령부 작전명령 제8호에 의하여 당시 미 제25사단에 배속 중이던 민기식 부대는 경찰부대와 협력하여 진동리 지구 전투를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해병대는 다시 진해 통제부로부터 155명의 병력 보충을 받아 부대 전투력을 증강한 다음 마산을 출발하여 8월 7일 19:00에 전진,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