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쟁사의 미스테리, 명량해전의 진실(1)
올해는 명량해전(1597년 음 9월 16일)이 발발한지 410년이 되는 해이다.
해마다 해전 발발에 즈음, 해남지역에서는 충무공과 지역 민초들의 극난극복의 의지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명량대첩 축제를 펼쳐왔고, 올해는 전남도에서 이를 주관해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우수영 울돌목 일원에서 열릴 계획이다.
또한 지난 9월 24일에는 거북선 모양의 유람선인 울돌목 거북배가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에서 취항식을 갖고 본격적인 운항에 나섰다.
이 글은 오는 명량대첩 축제의 성공기원과 울돌목 거북배의 취항, 우수영 유스호스텔 개원 등을 축하하기 위해 남기는 글이다.
13vs133이라는 세계 해전사상 미증유의 명량대첩, 많은 학자들과 사학가들에 의해 이 미스테리 해전은 연구되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논문이나 학설 중 명량해전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못 봤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래의 글 또한 한갓 추정론에 불과하고, 자칫 잘못된 인식은 명량해전의 이해에 있어 오류를 가져 올 수도 있음을 밝힌다. 다만 그곳은 나의 고향이었고, 늘 그곳에서 뛰어 놀았기에 누구보다 그 명량해전이 펼쳐진 우수영 울돌목에서 잘 아는 것에 대해선 자부할 수는 있다.
![](https://blog.kakaocdn.net/dn/eODPfv/btrUgid1G8t/Jr7i7WMO5ceUPlZpLGpAjk/img.jpg)
(울돌목 거북배. 취항식 전)
명량 하루전...
전략적으로 볼 때, 일본은 임진왜란 중 딱 한번 끝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정유년 (음) 7월 16일 왜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격파했을 때, 일본의 전 함대가 신속하게 집결해 서해로 빠져 제물포나 인천으로 들어가 수륙양진으로 한양을 공격했더라면, 임진왜란은 사실상 왜군의 승리로 끝났을지 모른다.
선조는 칠천량 패전이후 보름이 넘어서야 이순신에게 통제사 임명교지(음 8월3일)를 내렸다. 이순신은 다시 보름 사이에 발 빠른 행보를 보이며 13척의 전함을 수습해 조선 수군을 재건했다.
일본에게서 최선의 승부 호흡은 조선에게 어쩔 수 없이 불가피했던 한 달의 시간, 그 시간 안에 승부를 내는 것이었고, 만약 이때 일본이 총 공세에 나섰다면 사실상 조선은 없었다.
그러나 왜군은 대세를 가를 수 있는 상황에서 승부의 호흡을 보여주지 못했다.
본론으로 돌아가,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은 아들 면을 잃었다.
가등청정의 분기가 얼마나 탱천했으면, 별동대를 구성해 충남 아산 이순신의 본가에 들이쳐 그의 막내아들을 쳤을까? 그 만큼 명량해전은 왜 수군에게 중요했다.
명량해전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실지 칠전량 해전이 없었거나 조선수군이 패하지 않았다면, 왜 수군은 절대로 경상도 이서의 바다는 넘지 못했을 거고 그것은 왜 육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조선수군이 왜 수군 본영(부산)을 압박했을 것이며 전라도와 충청도가 다시금 적에게 유린되는 일도 없었을 터였겠지만, 역사는 심술쟁이처럼 칠천량의 치욕을 안겨주며 또 다시 왜군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원균의 칠전량 패전 이후, 당시 천안까지 진출해 있던 왜 육군은 왜 수군들의 뱃길이 더디자, 하루속히 보급품을 싣고 한강으로 올라와 달라고 연락을 하는데, 이미 그때 왜 수군은 해남의 어란진과 진도의 벽파진 전투에서 충무공이 재건한 조선수군에 농락 아닌 농락을 당하고 있었다. 왜 수군은 한참을 농락 당한 후에서야 충무공의 완전한 복귀를 알아챘고, 그제야 왜 육군에게 이 같은 소식을 알렸다.
늦게나마 충무공의 복귀사실을 인지한 왜 수군은 조선수군을 치고 서해로 나가 곧장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 전투선과 보급선, 수송선 등 전함대에 급히 해남 송지 어란진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왜 함대는 명량해전이 있기 10여일 전부터 속속들이 어란진으로 집결했다.
어란진에 집결한 구루시마 미치후사,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야스하루 등 왜 수군수뇌부가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이날 회의에서 해적출신인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당항포 해전에서 전사한 형님에 대한 복수심에 분기탱천하며 선봉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가 이렇게 자원한 이유는 명량해협의 좁은 해역이라면 보나마나 근접전일터이고, 근접전이라면 노략질로 잔뼈가 굵은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 이순신 또한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 쉽사리 물리 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전에 관한한, 앉아서 천리 맑은 눈으로 일 만 리를 보는 이순신을 상대로 나선 것은 분명 왜 수군의 오판이었고 용감히 무식이었던 구르지마의 만용이었다.
마땅히 명량을 피했어야 했다. 아니 그보다 이순신을 피했어야 했다. 그렇게 했더라면 이후의 이야기는 또 틀려졌을 것이다.
풍신수길이 한산도 대패이후 왜수군에 “쪽팔려도 이순신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치라”고 명을 내렸다. 그의 이러한 명령은 제 아무리 세계 최강의 군대라 할지라도 이순신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고, 해전에서만큼은 이순신이 그 어떤 물리력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왜 수군이 이순신을 치기 위해 작전회의를 펼칠 쯤, 명량해전 하루 전(음 9월15일)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여러 장수와 병사들에게 일장훈시를 내렸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은 살려고 생각하지 마라. 만약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이가 있으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고, 조금이라도 너그럽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며 재삼 엄중히 말했다>
그리고 난중일기는 <이 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줬다>고 적고 있으며, 다음 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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