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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논문 자료

세계 전쟁사의 미스테리, 명량해전의 진실(3)

by 충실한 해병 2022. 12. 21.

세계 전쟁사의 미스테리, 명량해전의 진실(3)

 

올해는 명량해전(1597년 음 9월 16일)이 발발한지 410년이 되는 해이다.

해마다 해전 발발에 즈음, 해남지역에서는 충무공과 지역 민초들의 극난극복의 의지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명량대첩 축제를 펼쳐왔고, 올해는 전남도에서 이를 주관해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우수영 울돌목 일원에서 열릴 계획이다.

또한 지난 9월 24일에는 거북선 모양의 유람선인 울돌목 거북배가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에서 취항식을 갖고 본격적인 운항에 나섰다.

이 글은 오는 명량대첩 축제의 성공기원과 울돌목 거북배의 취항, 우수영 유스호스텔 개원 등을 축하하기 위해 남기는 글이다. 

13vs133이라는 세계 해전사상 미증유의 명량대첩, 많은 학자들과 사학가들에 의해 이 미스테리 해전은 연구되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논문이나 학설 중 명량해전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못 봤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래의 글 또한 한갓 추정론에 불과하고, 자칫 잘못된 인식은 명량해전의 이해에 있어 오류를 가져 올 수도 있음을 밝힌다. 다만 그곳은 나의 고향이었고, 늘 그곳에서 뛰어 놀았기에 누구보다 그 명량해전이 펼쳐진 우수영 울돌목에 대해선 자부할 수는 있다

 

 ✔ 울돌목(사진)

 

 

 

 

2부에 이어...

 

병법의 신(神)이 정립해둔 병법의

상식과 고정관념까지 깨트려버리고

 

손자가 이르기를“전투를 하는 방법은 적군보다 10배의 병력이면 포위하고, 5배의 병력이면 공격하며 2배의 병력이면 적을 분리시킨 후 차례로 공격하라. 또 맞먹는 병력이면 최선을 다해 싸우고, 적보다 적은 병력이면 도망치며 승산이 없으면 아예 피할 것이 상책이다. 만약 소수의 병력으로 무리하게 싸우면, 강대한 적의 포로만 될 따름이다”라고 했다.

병법의 신(神)조차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에겐 대가의 실기에서 정립된 완벽한 이론조차도 하나의 고정관념일 뿐, 철저하게 무시하고 깨트려 버렸다. 이런 것이 바로 창조다. 늘 틀 속에 존재하는 듯 하지만 결코 틀 안에 나를 가두지 않는 것, 폐일언하고.

1597(정유)년 (음) 9월16일 난중일기로 돌아가 <난중일기- 대장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댔건만 여러 배들이 관망만 한 채 진군하지 않아 사태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아득히 물러나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 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

사실 이 부분부터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고 이순신이 기록한 난중일기 그대로 인식하면 될 것 같은데, 이순신은 구르지마 선단을 �아 함포공격을 감행했고, 또 뒤이어 �아오는 왜 선단의 포위된 채 홀로 분투하는 함대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조선 수군의 첫 함포공격은 30여척의 구르지마 선단이 울돌목을 통과한 후 양도와 울돌목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쯤 이순신의 함대로부터 시작됐다.

건데, 당초 이순신의 함대에서 첫 포격이 시작되면, 양도 뒤편에 엄폐중인 김응함과 안위가 항진하는 왜 수군 앞을 막아서며 포격을 가하기로 했지만, 그들은 어마어마한 왜군의 함대에 겁에 질린 나머지 먼 바다로 물러나 버렸다. 이순신의 선단만이 포탄과 화살을 쏘며 곧바로 구루지마의 후미를 �아 적진 속으로 들어갔다.

산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은 안타까운 마음에“어찌할꼬, 어찌할꼬”탄성만 지른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적이 1000척이라도 우리 배에는

감히 곧바로 덤벼들지 못한다

 

<난중일기-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 수가 없었다. 배마다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감히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에게 쏴라."고 했다>

 

이때의 울돌목 안의 전투상황을 그려보면, 첫머리엔 구르지마 선단이 중간엔 이순신 함대가 그리고 그 뒤는 울돌목을 건너려고 하는 다른 왜 함대가 다가서는 형태였고, 이런다고 볼 때 이순신의 기함 주변은 완전 포위 됐다.

이순신의 함대가 적진 속으로 들어가자, 왜 수군들은 기함에 갈고리를 던져 도선을 시도했다. 하지만 자기들 배보다 훨씬 높은 판옥선과 조선수군의 강한 저항으로 쉽게 오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것 또한 이미 명량해전에서의 싸움이 근접전이 될 것이라 짐작했던 이순신은 칠천량 이후 패잔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판옥선의 갑판 벽을 보다 높이고, 조총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해 거의 거북선과 비슷한 형태로 개조를 했다. 그걸 알고 있던 이순신은 부하들에게‘1000척이라도 우리 배에는 쉽게 덤벼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난중일기-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나 있었다. 나는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니 적들이 더 대어들 것 같아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내리고 또 초요기를 돛대에 올리니,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이 상황은 홀로 분전하고 있는 이순신의 기함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미 적의 예봉이 꺾였는데도, 오로지 적군의 많음에 겁을 먹고 있고 있는 여러 장수들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사명감을 잃은 장수들에게 화가 났다.

이에 장군은 물러나 있던 각 함대를 부르는 전장 집합기인 보라색 초요기를 올리고 호각을 불어 그들을 불러들였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이순신의 사자후와 같은 호통에

 

<난중일기- 나는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를 불러 이르되,“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너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고 하니,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이르되,“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고 하니,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두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안위)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몽둥이로 치기도 하고, 긴 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러이 싸우니 배 위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하게 된데다 안위의 격군 1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는데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얼추 엎어지고 자빠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 하 여적을 쏘아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김응함과 거제현령 안위의 판옥선이 급거 기함에 다가오자 이순신은 대갈일성 했다.

사자후와 같은 이순신의 호통에 정신이 바짝 든 안위가 적진 속으로 과감히 돌진 해갔다.

이어 이순신이 김응함을 엄하게 꾸짖고, 안위의 선단 쪽을 바라보자 안위의 함선에는 이미 왜 수군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도선하기 시작했다.

안위의 군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왜 수군과 난타전을 벌였다. 그 싸움에서 격군들이 물에 빠지게 되고, 안위의 배가 절명의 위기에 빠지자 이순신이 그의 전함을 구하기 위해 쾌속으로 돌진 해 적을 분쇄시켰고, 이어 아군들까지 합세한 가운데 안위를 구해냈다. 그러나 적은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으니...

 

<난중일기- 안위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몽둥이로 치기도 하고, 긴 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러이 싸우니 배 위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하게 된데다 안위의 격군 1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는데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얼추 엎어지고 자빠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 하 여적을 쏘아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안위의 군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왜 수군과 난타전을 벌였다. 그 싸움에서 격군들이 물에 빠지고, 안위의 배가 절명의 위기에 빠지자 이순신은 그의 전함을 구하기 위해 쾌속으로 돌진 해 적을 분쇄시켰다. 이어 아군들까지 합세한 가운데 안위를 구해냈다. 그러나 적은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승부를 결론지을 수

없는 혼미한 상황, 그런데...

 

오전 10시를 전후로 시작된 이 싸움은 왜군 측에서 본다면 쉽사리 끝날 것도 같았지만, 적진 속을 누비며 돌격러시를 감행하는 이순신 함대로 인해 초전은 왜군이 약간 고전하고 있는 상태였다.

2시간 정도가 흐르고, 조선의 전수군이 혼연일체 돼 왜 전투선과 강력한 교전이 이뤄지자 왜 수군들의 인명피해가 속출했다. 또 왜 함대는 20여척 정도가 기능 불능상태, 조선 수군은 13척의 전선 모두 이상이 없었으나 인명만은 적잖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은 승부를 결론지을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대세를 가르는 일이 일어났으니......“

<항복해온 왜놈 준사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이다. 내 배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다"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로 끌어 올리게 했다. 그러니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렸다>

이곳에서 말하는 준사는 항왜(降倭)다. 항왜는 순왜(順倭)라고도 불렀는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을 이르는 말로 전쟁 당시 조선군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조선군은 전쟁 초반 왜 포로들을 그냥 살해했으나 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항왜 유치에 나섰다.

조선이 항왜를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왜 진영에 퍼지자 많은 수의 일본군이 탈영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영에 목책을 설치해 탈영을 방지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무려 1만여 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투항해왔다고.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남아 자손을 낳고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안골포에서 투항 해 온 항왜 준사 또한 명량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이순신의 옆자리에서 선봉에 서 난전에서 죽음을 맞이한 채 바다에 떠있는 마다시(구르지마 미치후사)를 용케 알아봤다. 그리고 크게 소리쳐 이순신에게 이를 알렸다. 

이순신은 1진의 대장이 이미 전사한 것을 알고, 단박에 승기가 왔음을 알았다. 곧바로 거북선 돌격대장이었던 김돌손에게 구르지마의 시체를 끌어 올리게 해 머리를 벤 후 뱃머리에 달아맨 채 명량의 바다를 누볐다. 

이 모습을 본 왜 수군은 자신들을 이끌던 대장의 효수된 머리를 보자, 사기가 곤두박질치며 후퇴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함대의 기적을 목도

감격에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난중일기- 이때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는 침범해오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치며 나가면서 지자총통·현자총통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우리를 에워 싼 적선 서른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로 진을 옮기어 밤을 지냈다.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이때의 시간은 대략 오후 1시~2시 쯤, 이 시간 조류의 흐름은 우수영에서 벽파진쪽으로 흐르며 가장 빠른 11노트(약 시속 20km - 진도대교 가설이후 흐름이 절반 이상 낮아졌다.) 이상. 이순신은 그러한 급물살로 인해 벽파진 쪽에서 대기하던 다른 전투선들이 더 이상 울돌목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을 짐작해 일제히 총공격에 나섰다.

조선의 전함대는 벽파진 쪽에 있던 왜 함대에게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신기전을 쏘며 강력한 공격을 퍼부으며 돌진해 갔다.

울돌목 건너편(벽파진 쪽)에 있던 왜 함대는 이순신의 괴력에 구루지마의 함대가 속수무책 전멸 당하고, 조선수군이 순류를 타고 기세 좋게 다가오니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다. 이 와중에 벽파진 쪽에서 대기하던 왜 함대의 총사령관 도도 타카도라의 안택선도 타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고, 여러 배들이 조선함대의 공격을 받아 기능을 상실했다. 왜 함대가 모조리 물러나자 다시 울돌목으로 돌아온 조선함대는 잔적 소탕에 나섰고, 울돌목 양안의 수많은 피난민들은 산위에서 이순신 함대의 기적 같은 싸움을 목도하면서 감격에 만세를 불렀다.

이순신은 겁먹은 왜군들이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우수영에 머무르려 했으나, 험한 물살에 전선을 잃지는 않을까 염려해 자정쯤 녹진 방향으로 함대를 옮기고 다시 새벽에 무안 암태면의 당사도로 진을 옮기며 “이 싸움은 실로 하늘의 도왔다”고 소회를 밝혔다.(끝) -명량대첩 축제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며... - 땅끝머리

 

  

울돌목의 일출- 김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