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예비역들의
원상회복요구에 대한 검토
2007년 10월 18일
보 고 자 : 상임특보 전 도 봉
해병대 예비역들의
원상회복요구에 대한 검토
▲ 배경
해병대 창설 주역이었던 초대 사령관 신현준 (당시 대위 중대장, 예비역 중장, 작고), 김윤근 (당시 구데타 출동부 대장, 예비역 중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등은 만주 봉천 군관학교에서 박정희중위와 같은 중대에 있었던 연고로 1961년 5.16 구데타 주역으로 참여하게 되었음.
1972년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군사정권 연장을 위한 일련 의 조치와 함께 구데타에 가담했던 해병대가 가장 큰 불 만세력으로 등장하자
1973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해병대를 해체, 해군 의 일개 병과인 상륙병과로 흡수 . 통합하였고 해병대의 불 만을 무마하기 위해, 해군 참모총장 을 보좌하는 허울뿐인 제2참모차장 제도 (현역 중장)를 두고 해군이 독자적으로 해병대를 지휘관리 해왔으나 해병대 측의 끈질긴 요구로 해군총장의 성향에 따라 때로는 완전 위임하기도, 때로는 완전 장악 지휘 관리하는 등 굴곡을 계속하여 왔음.
▲ 경과
○ 1987년 신 군부 등장 후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예비역들 의 불만을 흡수하고 노태우 후보 지지를 유도하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이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케 하였 으나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허울뿐인 것이였음.
○ 1996년 김영삼 문민정부 시 원상회복 요구는 절정에 달 하였고, 현역과 예비역이 공동으로 국민 서명운동, 의원 입법발의로 국방부, 국회 등 관계 요로에 해병대의 원상 회복을 요구하였으나, 군사정권을 종식하고 하나회 등 군 부 구데타 가능성을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던 차에, 5.16군사 구데타의 주역이었던 해병대의 원상 회복요구 는 70만 예비역은 무시할 수 없으나, 시기에 맞지 않는 다 는 이유로 거부 되었으며, 당시 원상회복 운동에 참여 하였던 현역들은 지휘계통을 문란 했다는 이유로 전원 징 계 및 전역 조치되고 다시 수면 하로 잠적 하였으나, 70 만 예비역들에 의해 줄기차게 계속 요구되어 왔음.
○ 싸우는 방법, 역사, 전통, 문화, 의식세계가 확연히 다 른 군을 해군총장이 지휘관리 함에 따른 서로 상이한 조 직간의 갈등 . 마찰, 전력관리 소홀, 전투력의 상실, 사 기저하등 여러 가지 문제가 노출되었으나 국가 통수권자 만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으로 금기시 되어왔음.
○ 해군과 해병대는 한 뿌리에서 출발한 한 형제지간이나 지금은 형제간도 자식 간도 아닌 이상한 법체계로 인하여
갈등은 계속 지속되고 있음.
아버지와 아들 간에도 출가하여 가정을 꾸리면 마음대로 할 수 없거늘, 한 형제간에는 더욱 독자적으로 꾸려갈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할 것임.
▲ 결론
해병대도 과거를 반성하고 변화하여 국민의 신뢰 와 사랑 을 회복 하였고, 6.25동란과 월남전등 전평시 공헌과, 특히 주변강국의 해군력 증강과 우리 해군이 연안 해군에서 대 양해군으로 참모총장의 지휘 폭이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게 되어, 해병대 지휘권의 해병대로의 이양은 더욱 절실함.
▲ 건의
해병대를 73년 이전의 해병대로 회복
200백만이 넘는 유권자가 열광하고 미치도록 공약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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