指揮官 便紙 11
우리 海兵隊(해병대)의 評判(평판)---[제 9호 96. 10.24 ]
친애하는 해병대 장병 및 군무원 여러분!
오늘은 해병대의 評判(평판 : Reputation)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해결을 요구하고 지난날의 경험 속에서만 해답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半世紀(반세기)의 전통을 가진 해병대라 불리우는 조직 속의 새로운 思考(사고)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해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병대는 참으로 좋은 軍隊(군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해병대 구성원들의 自負心(자부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빌려줄 수도 없고, 누가 훔쳐갈 수도 없습니다.
해병대의 자부심은 오랜 歷史(역사)와 傳統(전통) 속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自負心(자부심)은 고물트럭과 허름한 택시의 뒤 유리창에서부터
티코나 그랜져, 벤츠의 범퍼나 유리창에까지 모든 곳에서 발견됩니다.
'대한민국 해병대, ROKMC',
'누구나 해병대의 일원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 해병대 構成員(구성원)들은 그들 자신의 삶 어디에서부터
해병대에 대한 愛着(애착)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병대를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때부터
그 해병대원은 한번 해병대원에서 영원한 해병대원이 되는 것이며,
現役(현역)이거나 豫備役(예비역)이거나 항상 해병대의 일원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며,
해병대의 구성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높은 名譽心(명예심)과 自負心(자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대망의 21세기를 향한 미래의 우리 해병대 상을 그려보면서,
먼저 과거 역사 속에서 우리들이 演奏(연주)했던 모습을 再照明(재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청중이 가득찬 음악당에서 화려한 管絃樂團(관현악단)과 함께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한 演奏者(연주자)가 있습니다.
心琴(심금)을 울리는 음율과 음악에 심취한 연주자의 표정 속에서 청중은 감동하기도 하고,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연주가 아주 훌륭할 때에는 우리 해병대이고, 그 청중이 國民(국민)이요,
國軍(국군)이였다면 지나간 반세기의 역사동안 우리 해병대가 한 연주에
그 청중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우리는 두 가지 相反(상반)된 반응을 假定(가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박수를 받거나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戰爭時(전쟁시)에 가장 戰鬪(전투)를 잘하는 軍隊(군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6.25의 격전지 도솔산 전투와 김일성고지 전투 등에서
미해병대 제1사단 5연대와 용전분투하여 한국 해병대의 용맹을 떨치며
그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無敵 海兵隊(무적 해병대)'라는 휘호를 받을 정도로
우리는 전쟁터에서 잘 싸웠습니다.
진동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의 連戰連勝(연전연승)으로
[마거릿 히긴즈] 라는 AP통신의 외신기자로 부터 '鬼神(귀신) 잡는 海兵隊(해병대)'라는
격찬을 받으며 대통령의 명령으로 전 해병대원이 일 계급특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월남전의 짜빈동 방어전을 성공시킴으로서 국내.외 외신 기자들로부터 일제히
'神話(신화)를 남긴 海兵隊(해병대)'라는 칭송을 받으며,
대한민국 해병대의 용맹성을 그야말로 세계 방방곡곡에 떨치고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는데
기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전쟁 속에서의 훌륭한 연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리들은
戰時(전시)가 아닌 平時(평시)에는 과연 어떤 연주를 하고 살아 왔을까요?
우리 모두 전쟁 그리고 그 뒤의 後遺症(후유증)에 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궁굼합니다.
수없이 많은 우리들 선배들은 祖國(조국)의 山野(산야)와 異城(이성)땅에서 목숨을 바쳤고,
살아남은 자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리들은 肉身(육신)이 파괴되고,
정신과 마음이 찟긴 깊은 상처를 안고 황량한 세상을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조국이 빈곤하여 그들을 잘 돌보아 줄 틈도, 여유도 없던 그런 시절이였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전쟁터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忠誠(충성)스럽게 싸우다 살아남은 군인일수록
그 상처는 깊고 험한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報勳病院(보훈병원) 병상에 누워 있는 우리들 선배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그들중 수 없이 많은 자가 본래의 제모습대로 삶을 살지 못하고,
일찍이 세상을 下直(하직)하거나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도 하고,
그 惡夢(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선배 전우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뒤안에는 平凡(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想像(상상)할 수 없는 짓들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개(犬)처럼 되기도 하고, 미친 듯이 無賴漢(무뢰한), 난폭자, 무법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처럼 험한 곳에서 목숨걸고 싸워보지 못한 군대를 賤待(천대)하거나 蔑視(멸시)하기도 합니다.
자기 군대만이 최고인 것으로 여깁니다.
남을 인정하고 包容(포용)하고 尊重(존중)할 줄도 모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전쟁의 後遺症(후유증)이라 부릅니다.
1975년 월남전쟁을 끝낸 미해병대가 그 전쟁의 후유증으로부터 치유되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미국 議會(의회)가 인정한 것은 16년이 지난뒤인 1991년 제29대 사령관 [그레이] 대장때 였습니다.
우리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처럼 전쟁의 상처는 깊고 오래가는 것이여서
治療(치료)라는데 많은 세월이 소요됨을 우리들 자신은 看過(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6.25전쟁이 停戰協定(정전협정)으로 중지된 1953년 이후 10년도 되기전인 1961년
우리는 또 다시 生死(생사)를 건 5.16軍事革命(군사혁명)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인 1965년 해병대는 다시 월남전쟁에 투입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또 다시 생사를 건 전투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1972년 월남전쟁에서 철수하였던 해병대는 1년 뒤인 1973년 10월 10일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고
해군에 통합되면서 海兵科(해병과)라는 戰鬪兵科(전투병과)의 한 부분으로 남기도 했습니다.
친애하는 해병대 전장병 및 군무원 여러분!
지나온 반세기의 역사중 이처럼 전쟁과 전쟁을 마감하고,
전쟁이 없이 停戰時(정전시)를 살아온 세월을 구분하면 꼭 반반씩이 됩니다.
본인이 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 해병대 장교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해병대 입대를 극구 만류하시던 어머니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병대는
[못된 사람들이 가고, 거기가면 사람 못쓰게 되고, 버려서 나오는 군대라더라],
[해병대는 군대도 아니라더라]
시골 한 조그만 어촌에 살고 있었던 우리 어머니까지도
어디서, 누구에게서, 어떻게 보고 들었는지는 몰라도 해병대에 대한 評判(평판)을 생생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시골 한 구석까지 우리들 평판은 국민들 속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지금도 늘 그때의 그 어머니 말씀을 기억하고 敎訓(교훈)으로 삼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인의 편지로
전쟁터에서 그렇게도 國民(국민)속에 칭송받고 尊貴(존귀)하게 여겨졌던 해병대가
전쟁이 끝난 뒤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왜? 국민과 국군속에서 진실로 사랑받고 존경받고 신뢰받지 못했던가 하는 그 까닭을
여러분 모두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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