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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논문 자료

주한 미 군사력의 상징 - 미 2 사단 그들은 누구인가

by 충실한 해병 2022. 12. 18.

한국땅에 주둔중인 미군 부대중 실질적으로 전쟁억제력을 갖고 있는 주력 전투부대는 제2보병사단이다. 본지는 미 제2보병사단에 대하여 일본에서 발행되는 월간 「軍事硏究」가 최근 특집으로 취급한 기사를 번역 게재하기로 하였다. 내용중에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판단된 것이라 정확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들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도 중요한 읽을 거리라고 판단된다.

- 편집자주 -








부대마크는 인디언 옆모습


머리에 깃털장식을 한 인디언의 도전적인 옆모습을 사단마크로 하고 있는 주한 미 제2보병사단, 닉네임 역시 이 마크대로 ‘인디언 헤드’로 불리고 있다. 미 제 2사단은 사단번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역전의 전투부대로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그 이름이 높다. 무엇보다도 이 사단은 인디언의 용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17년 10월 제1차 세계대전중 멀리 프랑스에서 창설된 이 사단은 당초엔 해병대와 혼성부대로, 사단장 역시 해병대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이 사단은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자마자 미국 텍사스주로 옮겨가게 되었다. ’43년 9월엔 다시 영국으로 이동, 독일과 전쟁에서 유럽대륙을 지키기 위해 미군부대로서는 최일선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특히 ’44년 6월 7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때는 연합군중 두 번째 선발부대로 그곳 ‘오마하 비치’에 상륙해 크게 전공을 세웠다. 이로써 다섯차례나 큰 회전(會戰)에 참전했다. 특히 2사단은 ’44년 12월 벌어전 ‘발지회전’에 참전중 독일군의 중요 탈출구인 ‘엘쟁보룬지역’을 철저히 봉쇄함으로써 적을 섬멸할 수 있었던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이 사단은 유럽전선에 이어진 체코슬로바키아 전장 전면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이 사단은 다시 미 본토로 귀환,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란 곳에 주둔, 실로 오랜만에 병사들은 여유를 즐기는듯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50년 6월 한국전이 발발했다. 그해 7월 4일 미군 선발부대로 한반도로 파견명령을 받았다. 3개 부대로 나눠 수송선편으로 제1진이 그해 7월 17일 출항, 일본을 거쳐 9월중순께 인천이나 군산 또는 동해안 주문진으로 상륙하기로 예정되었으나 전황(戰況)이 날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긴급전보를 입수하게 돼 곧바로 부산으로 직행, 일단 부산을 교두보로 정했다. 때문에 그해 8월까지 사단 주력병력은 모두 부산에 도착, 작전을 개시했다.

이것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주한 미 제2보병사단의 존재와 특별히 한반도와 인연을 맺게 된 과정이다.




본격적인 전투

한국전쟁중 미 제2보병사단은 산하에 제9, 제23, 제38보병연대를 기간부대로 해 주로 미 제9군단에 편입, 전투를 치뤘다. 1950년 9월 인천상륙, 10월 평양점령, 다시 압록강 진격을 끝으로 전쟁은 끝나는 것으로 여겼다. 이렇게 되면 이 사단은 전투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본국으로 철수될 것으로 병사들은 생각했다. 부대철수 순위조차도 제2보병사단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돌변하고 말았다. 바로 그 무렵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전쟁은 지금부터라는 분위기가 팽배, 철군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인디언처럼 용맹하다고 이름 나있는 미 제2보병사단은 전선을 한발짝도 떠날 수 없었다.

여기서 한국전에서 이 사단이 치룬 중요 전투 몇가지만 되짚어 보기로 한다. 최초의 전투는 ’50년 11월 29일에서 12월에 걸쳐 계속된 말 그대로 치열한 전투였다.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 의해 서부전선에서 전투중이던 한국군과 유엔군이 청천강 전선에서 부득이 작전상 후퇴하게 되었다. 대신 미 제2보병사단 주력부대가 투입돼 청천강 남안(南岸)에서 왼쪽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그만 전력(戰力) 80% 가량을 잃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사단 주력부대는 도로 양쪽에 포진돼 있었던 중공군 때문에 독안에 갖힌 쥐 신세나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지만 악전고투 끝에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1951년 2월 중공군이 중부전선으로 대거 이동, 제4차 대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이 사단은 적지 않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원주방향으로 옮겨 전면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해 중공군의 대공세를 분쇄하는데 앞장섰다.

더욱 이 일대에 중공군 3개 사단병력이 포진해 끊임없는 공격을 가해 왔지만, 미 제2보병사단 산하 제23보병연대가 프랑스 대대와 연합전선을 편 끝에 이 지역을 끝까지 사수, 중부전선의 붕괴위기를 넘겼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부터 쌍방간에 주요고지 쟁탈전이 격렬해졌다. 중부전선의 요충지 ‘빤지 볼’(亥安盆地) 서쪽 가칠봉(加七峰)에서 백석산(白石山)에 이르는 주요 고지 가운데 유독 931고지 쟁탈을 위해 미 제23보병연대가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던 일이 있다.

북한군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도 이 고지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바람에 미 제23보병연대도 30%가량의 전력손실을 입고도 끝내 버티었다.

결국 미 제2보병사단은 전투부대로서 임무를 다하고 1953년 7월 27일 성립된 휴전소식을 ‘철의 삼각지’(평강, 철원, 금화) 중간지점에서 비로소 맞이했다.

이 사단은 ’54년 9월 미 본토 조지아주 피트 루이스로 철군, 한반도에서 물러가 ’57년까지 그곳에서 뿌리박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58년 3월 사단병력을 대폭 증강시켜 ’65년 7월 미 제1기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하라는 명령에 따라 재차 한국땅으로 건너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전시체제시의 병력규모

현재 미 육군이 보유중인 육군 현역사단은 대략 10개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작전단위로 전시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사단은 유일하게 주한 미 제2보병사단뿐이다. 그들은 중거리포의 사정거리내에 들어있어 적과 대치상태에 있다는 데서다.



그럼 이 사단 산하 중요부대 현황을 대략 살펴보기로 한다.

◇사단사령부(의정부: 한미 연합 야전사가 있던 곳)

◇제1여단(동부천: 사단사령부가 있던 곳)

◇제2여단(동부천 남쪽)

◇제3여단(미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

◇공병여단(의정부 남동 구리 부근)

◇항공여단(캠프 스탠리)

◇사단지원부대(〃 〃)

◇사단포병대(〃 〃)



이상과 같이 주요부대는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의정부 회랑 한중간에 모두 위치해 있다.

아울러 미 제8군 직할부대의 중요위치를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미8군사령부(서울 용산)

◇제1통신여단(〃 〃)

◇제6기병여단 ‘항공전투부대’(평택)

◇제8인사코만드(서울 용산)

◇제8헌병여단(〃 〃)

◇제17항공여단(용산, 춘천, 화성)

◇제18의료여단(서울 용산)

◇제19전역지원 코만드(대구 인근)

◇제5이 군단지원코만드(캠프 레드 크라우드)

◇제5이 군사정보여단(서울 용산)



2000년판 한국 국방백서에 의하면 주한 미 육군병력은 총 2만 8,100명, M1A1전차 140량, M⅔전투차 170량, M109 155㎜ 자주포 30문, MLRS(다연장 로켓시스템) 30량, AH-64대전차 헬리콥터 70대 등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전투병기를 다시 부대별로 배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차부대 3개(각 전투차 44량)

◇기계화 보병대대 3개(〃 〃)

◇기갑기병대대 1개 (전차 9량, 전투차 39량)

◇포병대대 2개 (각 18문)

◇MLRS대대 1개

◇공격헬리콥터대대 3개(각 24대, 사단항공여단 1개, 제17항공여단 2개)



워싱턴 주 포트 루이스 지역에 남아있는 미 제2보병사단 소속 제3여단은 전차대대 2개와 기계화 보병대대 1개 그리고 포병대대 1개 등이 편성되어있다.

그러나 이 잔존부대는 곧 신형 장갑차여단으로 바뀔 전망이다. 장갑차는 8륜 장갑차 스트라이카로서 2003년 회계년도내에 약 300량을 가지고 창설될 예정이다. 특히 계곡이 많은 한반도 지형에 파견될 경우 그 같은 중무장부대가 과연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지 군사전문가들 중엔 의문시하는 사람도 더러있다.

물론 그런 취약한 부분을 커버하기 위해 3개 헬기대대를 두기로 했다. MLRS도 대대규모로 편성되어있어 지상 화력까지도 눈에 띄게 증강돼 있다. 또한 주한 미8군까지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보급능력도 꽤 높은 편이다.

전투지역에서 부산까지 MSR(주보급로)이 잘 갖취져 있을 뿐더러, 때로는 부산에서 일본, 미 본토에서 시작되는 SLOC(海上補給路)나 ALOC(航空補給路) 등이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는 점도 강점으로 평가된다.




한미 연합군의 역할

한반도가 다시 전쟁터로 변할 때 한국군과 미군 야전부대는 1978년 11월에 창설된 한미연합군(CAC: Combined Forces Command)의 작전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사령관은 미군 대장, 부사령관은 한국군 대장이 각각 맡고 있다.

한미 연합사 기구는 인사, 정보, 작전, 군수, 기획을 비롯 일반참모부, 특별참모부, 통신전자부, 공병부 등으로 편성되어 있다. 요원은 한미 양측에서 제각기 150명씩 차출, 연합군체제가 원만히 운용되도록 임무를 다하고 있다.

종전 CFC사령관은 유엔군과 주한미군 CFC지상혼성군 등의 사령관직을 겸했었다. 그래서 한때 이를 두고 “3개의 모자를 쓴 장군”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것이 ’92년 12월 개편돼 미 8군사령관에는 미군 중장이 지상혼성군사령군에는 한국군 중장이 임명토록 조치되었다.

또한 CFC 사령관은 작전시 한국군까지도 통제하도록 돼있으나 ’94년 12월 이후 부터는 평상시 작전통제권은 한국군에 위임하도록 했다. 다만 그 작전통제권은 한국군 합동참모회의 의장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같은 조치는 육상전투의 경우 지리에 밝은 한국군이 맡되, 미군은 해공(海空)에서 지원한다는 일종의 역할분담에서라 하겠다. 이 때문에 주한 미 제2보병사단의 역할에도 약간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

따라서 CFC사령관 및 부사령관 밑에 지상군혼성부대를 비롯 공군 및 해군혼성부대 그리고 한미해병혼성부대 등에 각기 사령관을 임명하되, 전시에 한해 별도의 한미연합특전사령관을 두도록 되어있다. 그밖에도 각 부대 사령관 산하에는 별동부대까지 두도록 되어있다. 이 별동부대는 한미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한 조치로서, 실제로는 한국군 제 1, 2, 3군과 미8군의 독자성이 더욱 강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군의 독자성은 매년 강화되고 있으며 미군 장군인 CFC사령관의 작전통제 아래 한국군이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군 사령부 권한이 오히려 크게 작용된다.

한국군 사령부에는 미군통신반과 취사반을 거느린 미군 대령 1명만 연락장교로 파견되어 있을 뿐 군 레벨상의 양군관계는 물론 동등하다. 그래서 한국 육군은 수원에서 강릉 이북을 전방지역으로 설정, 야전부대인 제1군과 제3군을 집중배치 해두고 있다.

주한 미 제2보병사단은 한국군 제5군단과 제6군단 중간지역에 주둔하고 있으며, 판문점 경비와 임진강 정면을 주로 경비하고 있다. 그러나 DMZ에는 직접 그들의 병력을 배치하지 않고 있다. 주한 미 제2보병사단은 한국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근접 경로(經路)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적이 이 사단을 피해 서울에 이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북한이 재차 전쟁을 일으킨다 해도 주한 미 제2보병사단과 접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른바 인계철선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셈이다.




사단의 운용형태

한미연합체제내에서 미 제2보병사단은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가 관심거리다. 이는 한마디로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또 전황(戰況)의 진전에 따라 임무 역시 현저하게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한미연합군이 북한의 공격을 받고 대응할 경우를 한정해두고 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한미연합군이 필요할 경우 선수를 취할 경우도 고려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는 것이다.

더 자세한 것은 앞서 밝힌 대로 주요부대의 배치상황만 살펴보아도 대략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재차 각 캠프의 위치를 지도를 통해 살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즉 주한 미 제2보병사단 병력은 주로 북쪽의 임진강과 한탄강, 남쪽의 한강, 동쪽의 북한강과 각 하천지역에 둘러싸인 전역에 주둔하고 있다. 게다가 CFC사령부 조차도 한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무언중 불퇴전의 결의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중요 지역에 위치해 있는 미 제2보병사단의 운용형태로는 CFC체제 아래 상시 한반도 정세변화에 따른 상황대처와 함께 전력집중 그리고 만약 적이 침공해올 경우에 대한 기동타격 강화 등 대략 3가지점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CFC사령부 역시 주한 미 제2보병사단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지금껏 반세기 가까이 이곳에 계속 주둔하고 있기에 누구보다 한반도 지형과 지리에 익숙해있을 뿐 아니라 임무 또한 중차대하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단의 전력(戰力) 3분의 1 가량을 본토에 남겨두고 있기는 하지만, 최강의 작전단위로서, 또는 ‘총예비(總豫備)’로서도 손색이 없다는데서다.

그러나 주둔지역이 너무 전방인 관계상 소위 인계철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할 때 전쟁초기부터 격전에 휩싸여 자유로운 ‘총예비’ 역할을 다하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게다가 현주도지역의 여러 상황을 감안할 때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엄호부대의 역할까지도 떠안게 되어 있어 몹시 벅차지 않겠느냐하는 분석도 있다.

반면 한국 육군은 동원전력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전투발발시 동원령이 발한 뒤 약 7시간내 전방부대에 예비사단 증원부대 제1진이 도착하는 등 적어도 72시간내에 병력규모가 두배로 늘게 됨으로써 기존 3개 사단으로 편성돼 있는 각 군단은 최소한 6개 사단병력으로 강화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전투시는 이같은 동원속도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후방에서 올라오는 예비사단은 대개 전방으로 집중돼 오겠지만, 더욱 한국군의 제1군단, 제5군단, 제6군단 지향의 예비사단군(群)은 물론 어떤 경우엔 제2군단 지향의 부대까지도, 미 제2보병사단 주둔지역으로 집중돼 올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를 지원할 임무도 막중하다. 때문에 만일 실제로 작전이 개시되면 미 제2보병사단은 이 점을 충분히 인식, 임무수행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능히 숙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총예비(總豫備)’가 돼주기도 할 것이며, 곧바로 지원병력역할이 돼주기도 할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미 제2보병사단은 최강의 작전단위로서 화력·기동력·장갑방위력 등을 고루 갖춘 전투부대이지만 진면목은 어디까지나 ‘기동타격’에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역시 CFC 사령관 직할 부대로서, 한국군과 연합해서 또는 미 본토의 군단사령부와 증원사단의 지원 아래 기동사단으로 재편성되는 경우 등 3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긴급사태에 대응해 기동타격대로서 임무에 응할 경우, 미 제2보병사단은 CFC사령관 직할부대로 작전을 전개한다는 사실도 실제로 중요하다. 1950년 8월에서 9월에 걸쳐 부산교두보 당시 미 제27보병연대가 미 8군사령관의 직할부대로서 임무를 수행했던 것과 같은 운용형태라 할 것이다.

다시말해 전쟁초기에 일어날 수도 있는 혼란으로부터 서서히 정상을 되찾아 본래대로 회복된 체제의 경우이긴 하지만 이전에 자주 언급돼온 것이 한국군 제7군단과의 연합형태이다. 1950년 9월 북진을 개시함에 있어 한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군단에 편성된 일이 있어, 그 역(逆)의 형태일 수도 있다.

당시 한국군 제7군단은 DMZ 정면담당을 하지 않는 기동타격부대로서 기계화 된 사단 2개(수도사단, 제20사단, 각 기계화보병대대 3개, 전차대대 3개, 정창대대 1개, 사단 포병대대 1개)를 두고 있었다.

미 제2보병사단은 그 전개지역에 있는 한국군 제6사단 소속 전차여단을 통합해 완전하게 전력을 갖춘 가운데 한국군 제7군단에 다시 편성되었으며 제7군단도 3개 사단을 풀편성해 전투에 임하게 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군 제7군단은 기계화사단 3개를 풀편성해두고 있다는 설도 있어 굳이 미 제1보병사단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미군은 비록 한국과 동맹관계는 있지만 부대를 한국군 지휘 아래 두는 것을 몹시 꺼린다.

세계 1차대전 당시 미 제9군단을 영국군 제21군단 아래 두었던 일이 있은 후 지금껏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다. 즉 ‘지휘관이 미국인이 아닌 이상 같이 전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군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동타격에 나서거나 적에 대해 반격에 나설 경우 미 제2보병사단은 한국군 제7군단과 연합작전을 펴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군 제7군단 사령부가 위치해 있는 장호원(長湖院)에서 이천(利川)과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연속해 산하 부대가 배치되어 있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미군단(美軍團)의 전개와 지원체제

최종적으로 미 제2보병사단은 증원사단과 함께 수시로 지원받게 될 미 제1군단에 편입하게 된다. 미 제1군단은 태평양지역 전담 부대로서 현재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 주둔중이지만, 특별히 한반도와는 인연이 깊다.

미 제1군단은 1918년 1월 창설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향하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부대로 알려져 있다. 2차대전때는 뉴기니어 루슨지역 등으로 전전 일부 항복때는 오사카에 입성하기도 했다. 1950년 3월 일본 교토(京都)에서 일단 해산되었다가 한국전쟁이 날로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자 미국 오스카로 라이나주 포트 브랏크에서 재차 1군단이 창설돼 곧바로 주한 미 8군 지휘하에 전투에 참가, 휴전때까지 서부전선을 주로 담당했다.

휴전직후 신설된 한국군 제6군단과 연합, 계속 서부전선에서 활동했으나 1971년 7월 미 제7보병사단이 철수되고, 제2보병사단의 몫이 커짐과 함께 마침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신설됨으로써 미 제1군단은 다시 본국으로 철수했다. 한미연합사령부는 ’80년 3월 한미연합야전군 사령부로 개편되었으며, 이에따라 종전 사령부는 ’92년 6월 비로소 발전적으로 완전 해체를 보았다.

미 육군의 군단규모는 일반적으로 사단 3개까지를 통제하지만, 만약 우선적으로 증원부대가 필요할 경우 제25사단(하와이·스코필드·바란스)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다. 제25사단 역시 1개여단을 ‘포트 루이스’에 남겨두고 있으며, 이 사단 역시 신형사단 전투부대로 파견될 것이다. 이 사단이 개편돼 새로 활동하게 되면 기동성이 뛰어난 제10산악사단(뉴욕주 포트 드람)이나 제101공중기습사단(켄터키주 포트 칸벨)과도 비견된다.

만약 한국에 다시 군단규모의 병력이 증원부대로 파견된다면, 첫째 하루 약 5,000톤 정도의 보급이 새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를 달성되도록 하는 시스템을 미군은 반세기 이상 유지하고 있어 별문제는 없다. 이 점이 주한 미군의 최대강점인 것이다.

미 본토나 일본으로부터 한반도까지는 미 태평양담당군의 책임아래 보급이 이뤄지고 있으며, 주한 미8군은 각 사단 산하 말단까지 보급책임을 지고 있다. 게다가 각 사단에 대한 지원활동은 각 여단과 대대에서까지도 MSR(주보급로)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보급전담부대 활동상황만 보더라도 하와이에서 제45군단 지원부대가 일본의 제9전역군지역 사령부산하의 제10지역지원부대와 제17지역지원부대와 함께 거미줄처럼 엉겨있다.

특히 한국에 주둔중인 미군에 대한 보급은 제19전역지원 사령부(대구)의 통할 아래 지역을 4곳으로 나눠 지역지원군(群)과 시설 등을 두고 보급품의 원활한 공급을 실시하고 있다.

즉 사단과의 직결부대를 에리어 1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에리어 2로 평택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에리어 3으로 그리고 대구 이하를 에리어 4로 구분해 보급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다. 군수자재부분에 대해서는 제55전역지원사령부의 자재관리센터가 대구에 설치되어 있는데다가 주한미군부대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자재지원센터 역시 경북 왜관에 설치되어 자재수급의 창구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별문제가 없다.




돌파지역과 주전선 측면공격

한반도에서의 미군사력의 상징으로 평가되는 미 제2보병사단의 전시 주된 임무와 역할은 어떤 식으로 맡겨져 있을까?

이는 이미 언급한대로 CFC사령관의 직할부대로 임무를 다하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관심꺼리는 한국군 제7군단과 연합전선을 펼 것인가 아니면 미 제1군단에 편성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사단의 역할은 전쟁 초기와 전쟁과정에서 그 양상이 현저히 달라져 있을 수도 있다.

더더욱 한국군이 MDL(군사분계선)을 사수하지 못하고 적에게 돌파당하고 말 경우 또는 북한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경우 그리고 전장(戰場)을 적의 영역으로 넘겨주었을 경우엔 미 제2보병사단의 임무와 역할은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화력과 기동력이 뛰어나 있는 이상 그리고 한국군 못지않게 지형과 지리에도 익숙해 있는 이상, 또한 누가 뭐라해도 최강의 작전단위를 지탱하고 있는 이상 미 제2보병사단은 선두에 서서 적극 방어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언제나 함께 가자”고 하는 미군의 모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만일 북한군이 다시 침공을 결심했다고 할때 어디를 집중 돌파해 올 것인가 문제이다. 현재의 휴전선 즉 DMZ는 앞서 전쟁 당시 무려 3년동안의 지루한 격전 끝에 양측이 마지못해 전투를 멈춘 선이다. 이 휴전선은 하천을 기준으로 했을 때 다소 남하한 선으로 돼 있지만, 북한군에게는 사실 돌파하기 어려운 선으로 알려져 있다.

최선의 남북경로(經路)인 평양-사리원-개성-서울의 경의본선, 그 보조경로로 돼있는 시변리(市邊里)-고랑포(高浪浦)-서울을 둘러싸고 돌파하고 싶은 선이겠지만 어느 쪽도 임진강이란 큰 장애가 가로 놓여있어 순조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이 삭녕(朔寧)에서 동쪽 ‘철의 삼각지’ 사이를 돌파, 경원선 연안으로 남하, 의정부 회랑(回廊)을 거쳐 서울로 진격해 오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무엇보다 DMZ 인근에 역곡선이란 하천이 있어 그대로 돌파한다 해도 또 다시 한강이란 큰 장애가 기다리고 있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한탄강의 동쪽 금화에서 금성(金城) 정면으로 우회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에도 비록 작은 개천이지만 남대천이 있고, 금화를 거쳐 남하한다해도 한탄강의 지류인 포천천이 있어 역시 어렵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동쪽으로 돌아 금성에서 북한강 연안지역과 맞부딪치게 될뿐 더러 그 지형도 돌파하기가 더욱 어렵다. 그곳엔 북한강의 지류인 금성천까지 뻗어 있어 이를 극복한다해도 역시 화천-춘천간의 복잡한 각종 장애물이 버티고 있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북한군에게 강력한 돌파 도하작전 능력이나 신속한 가교건설능력 등이 가령 있다 하더라도 이같은 하천장애를 극복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하지만 금화(金化)-금성(金城) 정면의 경우 어쩌면 DMZ 돌파작전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정면에 한한 북한군 남하작전의 전반적인 특색은 산맥이 거의 동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 임진강의 대장애를 우회해 극복할 수도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해 볼 때 어느쪽을 돌파한다해도 일단 우선회(右旋回)해 서울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따라서 무정지(無停止) 공격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각 레벨에서 2개의 전투부대를 편성하는 특수전법도 그 하나가 될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 대항하게 될 한미연합군은 우선회해 진격해 오는 적의 총공세에 대비 좌선회(左旋回)해 측면공격을 집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즉 전투부대를 분산시켜 ‘무정지공격’을 불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도 측면공격이 보다 필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서부전선에서 만일 DMZ 돌파를 허용했다고 가정해 본다면, 미 제2보병사단은 한국군 제7군단의 선봉장이 되어 결사반격을 가해 좌선회를 계속해가며 거꾸로 북서로 공세를 집중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미연합군이 진격을 계속 북한영역까지 전장(戰場)을 넓혀 반격했을 경우 이때도 좌선회를 계속해 북한군을 측면공격하는 것도 역시 효과적일지 모른다고 한다. 물론 공격의 주 목표물은 우선 가장 위력적이라고 소문나 있는 적의 전차군단과 기계화군단부터 찾아내 끝까지 전멸시켜야 할 것이다.

반면 북한군도 한미연합군의 배후를 노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돌고 도는 등불같은 꼴이 되겠지만, 사실 북한군의 기동력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분석이 있다.




공격 종결지점은 청천강과 용흥강

’53년 7월 한국전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오랜기간동안 한미연합군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 여러가지 상황을 그려두고 작전을 구상해 왔다. 즉 북한군이 의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DMZ을 침공, 휴전협정을 무효화할 경우 한미연합군은 되려 DMZ를 넘어 북한지역에서 작전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은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는 불량국가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문제는 한반도에서 재차 전쟁이 일어날지 어떨지가 주목꺼리다. 그럴 경우 한미연합군이 북한지역으로 진출, 작전을 수행한다고 가정할 때, 적어도 작전단위는 적극 방어를 위한 측면공격이 최선책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좌선회를 거듭하면서 북상해 갈 것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어떤 이유에서 이같은 작전 형태가 될 것인지 의문이긴 하지만, 한마디로 한반도 지형이 그렇게 하도록 강제하고 있다고 대다수 전략가들은 말한다. 좀더 설명한다면 첫째 적의 방비책이 그렇게 두렵지 않을 뿐더러 적이 기갑부대를 대거 동원한다하더라도 효과적인 반격이 사실 어려운 산악지역임을 들고 있다. 다시말해 그 지역은 태백산맥이 서북부를 감싸고 있는 보다 험준한 산골짜기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거대한 하천을 도하(渡河) 해야하는 어려움을 생각할 때 남하를 기도할 적은 우선회를 그리고 북상하려는 아군은 좌선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공격을 집중할 경우, DMZ의 돌파지점은 어디가 될 것인가도 관심거리라 할 수 있다. 추측한 바로는 그것은 한국군 제2군단 정면인 춘천(春川)-화천(華川)-금성(金城)의 축선(軸線)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경로의 일부를 답사해 본 일이 있는 한 사단관계자는 중포(中砲)를 끌고 진격할 수 있는 지형은 결코 아니라고 단언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전술상 풋내기짓이란 비판도 있다.

왜냐하면 DMZ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전체적인 지세(地勢)를 살펴보면 여기가 남으로 부터의 돌파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53년 7월 휴전직전 중공군은 최종공세를 이 지역에 맞춰 수 ㎞에 걸쳐 압박하는 바람에 결국 한국군 제2군단은 금성(金城)분지와 이어져 있는 능선에서 물러서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한미연합군은 휴전 후에도 이 지역에 긴 사정거리를 가진 화력을 집중배치해 두고 있다. 이런 여러상황을 고려해 볼 때 역시 초동작전은 이 지역에서 DMZ를 돌파하거나 돌파당할 지 모른다.

한국군의 경우 제2군단 산하 기동예비대가 선발대로 DMZ를 돌파케한 후 좌선회해 ‘철의 삼각지대’ 배후를 돌아 들어가는 형태를 움직이며 경원선(京元線)까지 차단, 여기에 맞설 북한군 제5군단을 위한 원산 방면의 증원부대까지도 원천봉쇄한다는 전략이 채택될 것으로 추측된다.

뿐만 아니라 동해지역의 한국군 제8군단, 태백산맥 인근 제3군단도 제2군단의 돌개작전에 적극 호응해 북상, 북한군 제1군단을 포위한 가운데 원산(元山)을 목표로 진격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상륙작전까지 가세할 경우 한미해병대는 원산의 남쪽지역인 통천(通川) 부근으로 상륙하지 않을까하는 추리도 가능하다. 문제는 평양을 향한 서부전선에 관심이 모아지기 마련인데, 임진강 하구쪽을 기점으로 해서 전군이 ‘좌선회 전법’으로 평양 북부쪽으로 돌아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작전에서는 오른쪽 ‘훅’을 날리면서 ‘넉아웃 전법’도 함께 구사하게 될 지 모른다. 그럴 경우 미 제2보병사단 병력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또한 관심꺼리다. 늘 지원을 받는 미 제1군단에 편성된다해도 또는 한국군 제7군단으로 편성된다해도 큰 줄기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의 배비(配備)에서 본다면 미 제2보병사단은 한국군 제1군단에 의해 왼쪽날개를, 제6군단에 의해 오른쪽 날개를 커버, 역곡천(驛谷川) 남쪽에서 임진강을 도하(渡河), 삭녕(朔寧) 남쪽에서 시변리(市邊里)와 수안(遂安) 지역을 경유해 평양 동쪽으로 머리를 내민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50년 10월 한국군 제1사단이 평양을 공략시 사용했던 경로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오른쪽 ‘훅’을 거듭해 사용하게 되면 평양-해주-평강의 삼각지대에 위치해 있는 북한군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도 가능할 것이다.

91년 2월 걸프전에서 다국적군은 왼쪽 스트라이크 연타로 이라크군을 압도했으나, 완벽한 포위로 섬멸시키는데는 이르지 못했다. 그 전례(戰例)와 비교해 볼 때 여기는 지형이 반도이기 때문에 황해 및 동해로부터 압박전술이 먹혀들 수 있기 때문에 포위에서 섬멸까지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끝으로 북한군 주력을 전장(戰場)에서 포착, 평양과 원산을 아군이 점령했다고 가정할 때 그 다음부터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도 궁금하다. 평양과 원산은 한반도의 지형상 최협부(最狹部)로서 군사상으로는 방위선의 이상(理想) 지대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한국군의 입장에서는 국토를 통일시키는데 이를 이용하면 좋은 기회를 맞이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북한국의 자동붕괴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4가지의 문제가 있다.

한미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압록강 두만강까지도 진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까지 정밀유도탄약의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질지도 문제로 꼽고 있다. 또 한가지는 200㎞까지 뻗어있는 전선을 따라 MSR(보급)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도 역시 문제이다.

’50년 10월에 있었던 ‘북진작전(北進作戰)이 결국 실패로 끝난 이유는 보급문제에 있었다는 교훈을 새삼 깊이 되새겨 볼 일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큰 난간이 있다. 중국쪽이 어떻게 대응하고 나설 것인가 하는 문제다. 즉 한미연합군이 깊숙히 진격하게 되면 중국은 필시 동쪽 현관을 지키기 위해 실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측은 결국 평양-원산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전반적인 전초선(前哨線)은 서부에서는 청천강, 동부에서는 원산 용흥강(龍興江) 연안지역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한미연합군의 공세종결선이 아니겠는가 하는 추측이다. 한국에서는 고래부터 ‘四瀆’이란 말을 자주 사용해왔다. 나라의 오욕을 깨끗이 씻어 없애는 강, 나라의 명운이 걸린 강을 두고 한 말이다. 즉 동쪽의 낙동강, 남쪽의 한강, 서쪽의 대동강, 북쪽의 용흥강(龍興江)이 그것이다.

한국이 이 4개의 강을 모두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안태(安泰)’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고래의 문구와 현대의 전쟁양상이 일치하기엔 아직 갈길이 먼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