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충실한 해병

귀신잡는 해병대와 마게렛 히긴스

by 충실한 해병 2022. 11. 4.

내일(8월17일)이 해병대 최초의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이 있었던 날입니다.

해병대하면 귀신잡는 해병대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귀신잡는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을 보도한 종군기자 [마게렛 히긴스]에 의하여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이라고 그녀의 신문사인 뉴욕헤럴드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에 실었습니다. 그것을 번역하여 보도하는 국내 신문에 의하여 "Ghost-Catching Marines" 이란 의미인 [귀신잡는 해병대]란 용어가 태어났다고 알려졌습니다.

지난 몇달간 두 신문의 사본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끝내 실패했습니다.(현재 미국 00대학 도서관의 자료보관실에 한국전 관련 신문이 있다고 하여 관람을 신청하였음)
이유는 간단합니다. <뉴욕헤럴드트린뷴>이 폐간되었고, 당시 국내 신문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휴간된 상태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명확히 재확인하고자 하는 의지로 시작했던 일 이였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유추이상의 실존적 증거에 의하여 확인되며, 이 경우 역사적 사실에 의하여 부여된 의미 또한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8년간 [귀신잡는 해병대]를 애용한 우리로서는 그 두 증거자료를 확보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해병대가 최초의 상륙작전을 외부의 도움 없이 준비하고 결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
물론 한국전쟁 기간 중에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중앙청 국기게양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해병대는 일본군의 빤츠에 미제 철모를 쓰고 있는 모양으로 창설되어 지금까지 58년간을 이어오며 기형적인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해병대가 좀더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전장에서 용맹했던 것처럼 사무실에서도 용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해병대는 근무(군정관련)와 작전(군령관련)이라는 임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성공적인 작전 수행을 위하여는 평시에 완벽한 여건과 체계하에 훈련을 연마하는 것이 훌륭한 근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온 역사는 그렇지 못합니다.
밥그릇에 연관되어 보신하려는 이기주의가 우리 해병대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파벌과 편가르기, 쓸데없는 아집과 독선들로 전우사회는 더 이상 우리들의 이상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병대 답지 못한 것이 해병대라고 하는 위선 속에 살고 있습니다.]

작금의 화두인 "해병대 원상회복"


앞장서는 자, 찬성하는 자, 반대하는 자, 방해하는 자들 모두에게 비켜갈 수 없는 숙명의 강으로 우리들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비켜가고 싶어서 "너희들이나 하라"는 중앙회 임원들이나 그에 추종해 갖은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이나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원래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맹목적인 수직체계사회에서 합리와 융화의 수평체계사회로 변화를 하는 그 격변기에 지금 우리가 서 있습니다. 한 시대의 [시대 정신]이란 것은 격변 속에서 자라나 자리를 잡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격변의 초입에 서 있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결과를 향해 암투와 공존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격변을 다 겪고 보다 나은 [시대 정신]에 의한 바람직한 [해병대 사회]가 새롭게 탄생하길 바랍니다.
[해병대 원상회복]은 그런 의미에서 밖이 아닌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합니다. 모든 시대정신은 자신들을 부정하면서 시작하고 투쟁합니다. 지금의 [해병대 원상회복]추진운동은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반성과 조직사회의 성찰이 없이 외부에서 모든 원인을 찾고자 함에 있어서 주도면밀하지 못하고 단편적이고 인기몰이에 지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안고 있는 이런 문제들의 근원은 모두 진실되지 못함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귀신이 곡할 노릇" 이런 말들의 내면에는 [진실]이라는 단어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대가 진실되지 못하면 문제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해병대치고 해병대 원상회복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 다음 말로 이런저런 이유들이 열거 됩니다. 그리고 격론이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진실하지 못한 말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 세월을 진실게임을 하며 서로를 적으로 만들고 담을 쌓았습니다.
이제 모두 진실한 전우들로 전우사회에 나오길 바랍니다. 그 진실성이 우리에게 꿈과 희망과 이상을 이루게 해줄 것입니다.


해병대 사령부 홈페이지의 해병대 관련표어 중에 "귀신잡는 해병대"를 보면 "50년 8월 23일 통영상륙 작전에 대한 취재차 원문고개로 해병대(김성은 부대)를 방문한 미 『뉴욕 타임즈』기자【마가렛트 히킨즈】는 해병대가 통영에서 거둔 전과처럼 기습적인 양동상륙작전으로 우세한 적군(북괴군 7사단 600여명)을 공격해서 적의 점령지를 탈환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귀신잡는 해병대'의 표제 아래 취재 기사를 널리 보도함으로써"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대수롭지 않겠지만 마가렛 히긴스는 뉴욕타임즈 기자가 아니고 [뉴욕헤럴드트리뷴]의 기자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과 특히 그녀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게 해준 "War in korea"에서도 뉴욕타임즈를 자신과 가장 치열한 경쟁사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귀신잡는 해병대]라는 최고의 극찬을 받게 해준 분에 대한 예의가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성 결여, 진실의 왜곡이 우리들 해병대의 발목을 잡고 있어서 우리들의 꿈과 이상이 허공에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참고 : 만날수 있다면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그녀의 역작인 "War in Korea"에는 Korean Marines에 관하여 딱한번 나오는데 인천상륙후 시가전에 관하여 하달된 작전계획입니다. 그녀가 직접 종군한 진동리 지구 전투 상황 설명에서는 아쉽게 Korean Marines가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마가렛 히긴스에 대하여]

1951년 여름, 마가렛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란 젊은 여기자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수상은 미국은 물론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뉴욕헤럴드트리뷴>지 소속 기자였던 그녀가 한국전쟁 전선에서 겪은 모험들은 당시 하나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1951년 ‘한국전쟁(War in Korea)’이란 책을 출판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전쟁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브닝드레스 보다 미군 전투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 "화장품 대신 진흙과 먼지를 바른 여자" 남자보다 더 용감한 아름다운 여자". 당시 미국 언론들이 그녀에 관한 묘사는 바로 그녀의 명성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녀는 홀홀 단신의 몸으로 한국전쟁의 전선에 나서 미군병사들의 존경을 받은 유일한 여기자였다(한 미국 병사는 이렇게 그녀를 칭찬하기도 했다. "당신은 내가 형제로 삼고 싶은 아가씨요") 또한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 남성 동료기자들에게 그녀를 따라잡으려면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그녀의 집요함과 탁월한 기사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 남성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녀는 아주 용감하든가 혹은 그저 멍청하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녀의 무모함을 뒤쫓느라 다른 기자들도 모두 힘들어 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히긴스

1950년 6월25일 매기 히긴스는 북한 공산집단의 남침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틀 후인 6월27일, 도쿄 특파원이었던 그녀는 한국의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도쿄에 부임한지 엿새 만에 그녀는 한국 땅을 밟고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히긴스가 3명의 남성기자들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을 때 불시에 기습을 당한 미 군사고문단들은 후퇴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 거리는 피난 물결로 아수라장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가 만난 한국군 장성은 "사태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실제 상황과 동떨어진 발언을 한다.


그녀가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 서울과 한국의 남부지역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던 한강인도교가 폭파된다. 한국군이 북한군의 남침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예고 없이 다리를 폭파해 버린 것이다.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그녀는 나룻배를 타고 구사일생으로 한강을 건너 피난행렬에 동참할 수 있었다.

맥아더와 히긴스

한강다리 폭파소식을 뉴욕으로 송고할 수 없었던 그녀는 미 군용기로 도쿄로 날아가 기사를 보내고 다음날인 6월29일 태평양지역 미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와 함께 전쟁터로 돌아온다. 히긴스와 맥아더 장군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날 맥아더 장군이 반나절 동안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도쿄로 다시 돌아가려고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히긴스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공항 활주로에서 기사를 쓰고 있던 중이었다.

맥아더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도쿄에 가려면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히긴스는 맥아더로부터 이러한 호의 이외에 단독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트루만 대통령에게 미 지상군을 파견해주도록 건의할 생각"이라는 특종을 낚은 것이다.

특종 보도 다음날 그녀는 다시 전쟁터인 한국으로 날아왔다. 수원 비행장에서 만난 미군 대령과의 대화 한 토막은 그녀가 얼마나 직업정신에 투철한 언론인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보세요, 젊은 여기자. 도쿄로 돌아가세요. 이곳은 위험한 전쟁터입니다(Young lady, go back to Tokyo! There may be trouble).” “위험한 전쟁터가 아니라면 제가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위험한 것이 뉴스이며, 나의 임무는 바로 뉴스를 수집하는 일입니다(I wouldn't be here if there were no trouble. Trouble is news, and the gathering of news is my job).”

매기는 뉴욕의 편집실에 긴장감 넘치는 체험 리포트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그 중 하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기자들이 포함된 미군 정찰대는 오늘 오후 적진 안으로 13킬로미터를 침투했다. 지프는 총알보다 빨리 튕겨져 날아갔다. 우리가 탄 차의 오른쪽 뒷바퀴도 총탄을 맞고 찢어져 버렸다."



한국 전쟁터의 짙은 먼지 속에서도 마가렛 히긴스는 여전히 예뻐 보였다. 그녀는 일부러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전선에서의 그녀의 복장은 한 벌의 군용 셔츠, 너덜너덜한 범포바지, 그리고 때에 찌든 몇 켤레의 테니스 신발이 전부였다. 양말도 신지 않았다. 그녀의 가방에는 타자기와 손수건, 칫솔, 립스틱 등이 들어 있었다. 한 미군 병사는 자신의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매기는 다른 여자가 화장하는 것처럼 먼지를 바르고 다녔다."
전투복이 잘 어울렸던 히긴스는 화장품 대신 진흙과 먼지를 바르고 다녔다.

어느 날 그녀가 오랜만에 한적한 강에서 때를 씻고 목욕을 하고 나서 나오려고 할 때, 미군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당황한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어머, 당신 같은 인간들이 이 부근에 더 숨어있어요?" 병사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너머 뒤쪽을 가리켰다. "몇 명 더 있어요. 다른 녀석들은 망원경을 가지러 갔지요."

이 경우를 제외하면, 매기는 처음부터 자신을 특별대우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 곳 대구에서처럼 장교들과 사병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매기가 자신들 사이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매기는 밤  늦게 돌아와 "몸 구석구석에 좀약을 뿌린" 뒤에 잠들어 있는 남자들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시카고의 <데일리 뉴스>지 소속 키즈 비취 기자는 이렇게 우스개 소리를 했다. "뻔뻔스런 놈팽이가 아니라도 매기와 같이 잤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당시 한국에 배치된 미 8군사령관이었던 월튼 M. 워커 장군은 전쟁터는 여자가 머무를 곳이 못 된다고 선언하고 (특히 여성을 위한 편의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매기를 한국에서 추방해 버렸다. 매기는 즉시 맥아더를 찾아갔다. 자신은 여자가 아니라 기자로서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편의시설로 따지자면 "한국에서는 아무데서나 덤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당돌함에 감명을 받은 맥아더는 그녀를 다시 전선으로 보냈다. '한국전쟁'에서 매기는 워커 장군을 "짜리몽땅하고 볼품없는 몸에다가 얼굴은 흡사 불독 같은 표정이었으며, 늘 삐딱한 태도를 보이는 인간"이라고 묘사했다.

매기는 24시간 내내 잠도 자지 않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기사를 타이핑하는 일이 잦았다. 이런 그녀의 지구력은 피곤에 지친 다른 남자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라이프>지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는 그녀가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딱 한번 있었다고 주장한다. 어느 날 그녀는 마이던스와 함께 차를 타고 아주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매기는 손으로 가슴을 꼭 감싸고 등을 웅크렸다. "왜 그래? 배가 아파?"라고 한 사람이 물었다. "아냐. 어제 밤에 브래지어를 잃어버렸어. 이놈의 길이 내 몸을 찢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 이것이 매기의 대답이었다




히긴스에 관한 전설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트리뷴>지의 동료기자 호머 비거트와 한국에서 모질게 싸웠던 이야기이다. 비거트는 노련한 만능 리포터였는데, 그 역시 한국전쟁 전선에 투입되었다. 두 사람은 <트리뷴>지의 1면을 서로 차지하려고 조금의 양보도 없이 싸웠다. <타임>지 기자 톰 램버트는 이렇게 말한다. "호머가 매기를, 혹은 매기가 호머를 죽여버렸다면 기자들 간의 경쟁관계도, 한국전 보도도 시시해졌을 것이다."

비거트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매기는 5번째 상륙선 편대와 함께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해군 보병들과 함께 유탄발사기와 기관총의 빗발치는 세례를 받았고, 덕택에 아주 긴장감 넘치는 기사를 쓸 수 있었다.

매기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던 비거트도 결국 퓰리처 상을 받았다

히긴스의 일생

마가렛 히긴스는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성품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1차 대전 때 조종사로 참전하기도 했던 그녀의 부친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던 사업가였다. 그는 젊은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였고, 매기는 1920년 9월 3일 홍콩에서 태어났다. 12살이 될 때까지 매기는 불어와 중국어만을 할 줄 알았다. 그 후 그녀는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캘리포니아와 뉴욕의 대학에서 1942년까지 공부했다. 대학 시절 그녀는 대학생 통신원 신분으로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그 후에는 화재피해 전문 리포터로 활동했다.

1944년 그녀는 <트리뷴>지 런던 지국으로 발령받았고, 미군이 독일 튀링엔 주의 부헨발트를 점령할 때 처음으로 전쟁기사를 쓰게 되었다. 한 명의 동료와 함께 기자로서는 최초로 다하우에 진입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1947년, 매기는 <트리뷴>지의 베를린 지국장을 맡게 되었다. 미 점령군 사령관 루셔스 D. 클레이와 그녀는 잘 아는 사이였다. 이 막역한 사이 덕택에 그녀는 항상 가장 빠르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때로 매정한 성미를 보여 그녀는 몇 명의 동료기자들과 적대관계에 빠지기도 했다.

서독의 첫 대통령 호이스가 처음으로 만찬을 개최했을 때 매기는 초대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만찬장에 나타나 수위를 째려보며 "나는 여자가 아닙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후 그녀는 당연한 듯이 만찬장에 매번 참석했다.

그녀는 여가시간을 활용하려고 가로수 광고를 보고 바이얼린을 하나 구입했다. 그녀는 춤도 출 줄 알았는데, 특히 캐스터네츠를 들고 스페인식 춤을 잘 추었다. 세련된 모임에 참석하여 아주 우아한 매력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것도 좋아했다. 또한 그녀는 시속 85킬로미터 이하로 달리는 것을 지루하게 여기는 운전광이기도 했다.

베를린 시절 그녀와 함께 일했던 사람 가운데 유일한 증인으로 남은 <뉴스위크>지의 토니 하워드는 '즐거운 외침'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일종의 실화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매기 히긴스와 토니 하워드, 그리고 "별로 여성스럽지 못한 여류기자들 여럿"('연합 프레스' 베를린 지부장 톰 리디의 말)의 특성들을 섞어 만든 인물이다.



한국 전쟁 후 히긴스는 새로운 분쟁지역으로 부각되었던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특히 그녀의 베트남 전쟁에 관한 심층 취재로 당시 미국 정부의 미움을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5년 그녀는 라오스에서 풍토병을 얻게 되어 고생하다가, 1966년 1월 3일 45년 남짓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